"20년 전 베껴 쓴 논문을 그냥 놔두면 위험할 것 같아 빼달라고 해서 없애면, 나중에 공직을 맡게 됐을 때 인터넷에서 검색 해도 안 나오게 된다. 앞으로 그걸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안 하면 좋겠다."(이민재 서울대 융합기술원 교수)
"구글이 검색 결과 링크 중단 신청을 받았더니 4일간 4만여 건이 들어왔다. 결국 법원 의도와 달리 잊혀질 권리 주장이 사회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게 아니겠나."(정찬모 인하대 법대 교수)유럽 발 '잊혀질 권리' 논쟁이 뜨겁다. 유럽연합(EU) 사법재판소가 지난 5월 13일 자신에게 불리한 10여 년 전 신문 기사에 대한 구글 검색 링크를 중단해 달라는 한 스페인 변호사 요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시간 흐름에 따른 '잊혀질 권리'를 인정한 세계 최초 판결로, 인터넷 개인정보 보호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의미는 있지만 '공개된 정보'에 대한 접근까지 막아 표현의 자유나 알 권리를 침해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공교롭게 16일 오후 정부, 인터넷기업 주도로 제각각 열린 토론회에선 양 진영의 상반된 시각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방통위-포털업계, '잊혀질 권리' 법제화 놓고 같은 날 '맞짱 토론'우선 '잊혀질 권리'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는 방송통신위원회는 16일 오전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열린 '온라인 개인정보보호 컨퍼런스'에서 '잊혀질 권리' 법제화에 시동을 걸었다. '우리 법상 잊혀질 권리의 인정 문제와 법제화 방향'이라는 주제로, 사실상 법제화를 염두에 둔 공청회였다.
그동안 정부의 '간섭'에 비판적이었던 네이버, 다음, 구글코리아 등 인터넷 포털업체들이 주도하고 있는 한국인터넷기업협회(인기협)도 같은 날 오후 강남 테헤란밸리에서 프라이버시정책연구포럼 주최로 토론회를 열었다. '잊혀질 권리'란 폭넓은 표현 대신 '정보 삭제 권리와 인터넷 검색 기업의 역할'이란 주제로 포털 차원의 대응에 초점을 맞췄다.
인터넷 상 '잊혀질 권리'를 처음 인정한 EU 사법재판소 판결에 대한 양쪽 발제자들 평가부터 크게 엇갈렸다.
우선 방통위 토론회 발제자들은 개인정보보호를 중시하는 기구나 정부기관과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시민단체, 인터넷기업간 찬반 논란을 들어 '잊혀질 권리' 국내 도입에 신중해야 한다면서도(정찬모 인하대 법대 교수), 개인정보보호법 제36조와 37조의 삭제·처리 정지권(김경환 법무법인 민후 변호사)이나 정보의 삭제 요청 등에 관한 정보통신망법 제44조 2(백수원 KISA 박사)를 근거로 '잊혀질 권리' 입법이나 제도적 보완에 무게를 실었다.
반면 인기협 토론회 발제를 맡은 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는 이번 판결이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놨다. 박 교수는 "역사적으로 공개된 정보에는 개인정보보호법이 적용되지 않았다"면서 "이번 구글 스페인 판결은 개인정보보호법의 원래 입법 취지를 망각한 판결"이라고 지적했다.
한 발 더 나아가 박 교수는 "이번 판결이 구글 검색에 관한 것일 뿐이고 논문에 대한 건 아니라고 보는 건 오해"라면서 "컴퓨터 기술 발달로 누구나 (EU 사법재판소나 개인정보보호법에서 규정한) 개인정보 처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문창극에 관한 논문도 본인 동의를 얻어야 쓸 수 있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잊혀질 권리가 언론-표현의 자유보다 우월하다는 판결 아냐"
다만 함께 발제를 맡은 구본권 한겨레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은 이번 판결에 대한 EU 집행위원회의 '사실 보고서'를 근거로 "사법재판소 판결은 잊혀질 권리가 언론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 같은 기본권을 능가하는 우월한 권리라고 격상시키지 않았다"면서 "오히려 판결은 정보 주체의 자기 정보 삭제 권리가 절대적이지 않고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실제 이번 판결은 구글 검색 결과에 한정한 것으로 기사 원문 삭제까지 인정한 건 아니다. 또한 삭제 요청 역시 사안별로 처리돼야 하고 데이터가 원래 목적에 비쳐 더는 필수적이거나 부적절한 상황 등에 한정했다. 오히려 유럽연합 개인정보보호 법규인 GDPR(일반 데이터 보고 레귤레이션)안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 ▲공중보건 ▲역사적·통계적·종교적 연구 ▲법규상 개인정보 보존을 요구하는 상황 등 4가지를 잊혀질 권리 예외로 규정했다.
구 소장은 "이번 판결의 함의는 검색 엔진이 모든 정보를 연결시켜 주고 있는데 접근 가능한 정보가 모두 이용하는 공공의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것"이라면서 "(인터넷 검색으로 인해) 다양한 프라이버시나 권리 침해 주장이 나오고 있는 상황"을 강조했다.
인기협 토론회 패널들 사이에도 '잊혀질 권리' 국내 입법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다. 박광배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잊혀질 권리는 개인의 주관적 가치가 개입되는 반면 정보 삭제 권리는 가치중립적이어서 서로 다른 개념"이라면서 "우리 정보통신망법이나 개인정보보호법 체계상 사이트 가입자뿐 아니라 검색 결과에 포함된 개인정보까지 책임을 부과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내에선 '잊혀질 권리' 관련 제도가 도입돼선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반면 김유향 국회입법조사처 미래방송통신팀장은 "이미 잊혀질 권리 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고 방통위가 입법 타당성 연구에 들어갔으며 이번 EU 판결을 계기로 국회의원들도 입법화를 시도하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그동안 논의 과정을 보면 국내 표현의 자유나 언론 상황에 대한 감정 이입이 지나친데 그와 별개로 잊혀질 권리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김 팀장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을 통해)우리는 이미 광범위하게 인터넷 게시글 삭제 요구가 인정되고 있다"면서 "기존 임시 조치와 EU 판결을 비교하면서 엄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경신 교수 역시 "우리나라 개인정보보호법에도 OECD 가이드라인(1980년 프라이버시 보호 및 개인정보 유통 국제 가이드라인)처럼 '프라이버시 침해 가능성이 없는 정보에 대한 일괄 면책 조항'이나 (사법재판소 판결 근거가 된) EU 디렉티브(1995년 개인정보처리에 관한 개인의 보호 및 자유로운 정보유통에 대한 디렉티브)처럼 '언론, 학문, 예술 분야에 대해서는 일괄 면책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