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무릎을 타고 기어올라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 투시된 화면으로 보이는 길고 꼬부라진 모양의 회충? 혹은 사람의 가슴을 찢고 나오는 괴물이 등장하는 영화 <에이리언>의 한 장면?
사람마다 다양하게 많은 것들을 상상하겠지만, 아마 공통적으로 불쾌함이나 혐오스러운 느낌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기생'은 곧 '기생충'이라는 단어로 연결되면서 벌레의 이미지가 연상되고, 흔히 일상에서 보지 못하던 기괴한 생물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생충은 숙주인 동물의 영양분을 빼앗아서 섭취하는 생활방식이 얄밉게 표현되고, 심지어 다른 활동에 쓸 영양분도 빼앗기 위해 숙주를 '거세'해서 짝짓기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 얼마나 끔찍한가!) 많은 사람들이 들었던 기생충에 대한 정보는 이렇듯이 자극적인 부분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부정적인 인식이 만연한 것은 이러한 흐름에 기인한 게 아닐까.
'기생'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깨다
기생충 박사 서민 교수와 정준호씨, 박성웅PD의 EBS다큐프라임 팀이 함께 만든 책 <기생>은 그런 생각을 지우도록 도와준다. 본문은 기생과 관련된 생물과 그 생활방식을 알려주면서, 다양한 정보와 함께 우리 사회가 품고 있던 편견을 깰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한다.
"기생충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세상에 무조건 나쁜 것은 없으며 꼭 흑백으로 나눌 수만은 없다는 것, 그리고 무조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라졌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도 보여준다." (본문 7쪽, '프롤로그' 중에서)책에서는 기생충 권위자 칼 짐머를 인터뷰하며 "기생충이란 다른 생물의 표면 위나 내부에서 살아가며 숙주의 고통을 양분삼아 살아가는 유기체"라고 정의한다. 기생충이 잘 살수록 숙주는 힘들어지며, 기생충의 범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바이러스나 모기·흡혈파리 같은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고도 덧붙인다.
우리가 '기생충'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올리는 회충은 전세계에서 대략 12억 명의 사람들이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며, 회충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왕과 신하들이 아파서 쓰러진 모습이 쓰여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동의보감>에는 기생충의 감염 증상이 자세하게 나와있고, 성경에도 모세가 '메디나충'에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을 치료하는 듯한 묘사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역사 기록물을 뒤져보면, 기원전 1600년 전 중국과 이집트의 미라에서 회충의 알이 발견된 바 있다. 그야말로 기생충 감염에 있어서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기생충 같은 놈"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기생과 관련된 표현은 주로 비하의 의미를 가진 욕으로 쓰인다. 하지만 386세대에게는 채변봉투, 그보다 최근에는 영화 <연가시>로 기억될 '기생충'들은, 서민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비열할지는 몰라도 악랄하지는 않다"고 한다. 실제 뱃속의 기생충이 그들의 생존을 위해 뺏아가는 영양분은 쌀 몇 톨의 양에 불과하며, 생물과 생물의 관계를 의인화하고 인간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생물 그 자체의 모습을 이해하는 일에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독자를 인도하기 위해서 저자는 좀 더 발걸음을 멀리 옮겨, 생태계의 차원에서 기생충을 조명한다. '기생'은 인간보다 수십만 년 더 오래 지구에서 살아온 생물의 생활방식이며, 숙주와 기생체가 끝없이 서로를 범하고 막으려는 시도가 이어진 끝에 진화가 촉진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도 밝힌다. 침입과 방어를 위해 기생충과 인간을 포함한 많은 동식물들이 지금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기생충이 인류에게 해가 되기만 한다는 생각은 편견인 셈이다. <기생>은 그런 편견을 깨트릴 수 있게끔 다양한 정보를 자세하고도 폭넓게 제공한다.
기생의 오래된 역사와 신비로움과거에는 기생충에 대한 혐오가 짙어서 아예 연구조차 시도되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기생충학이 서서히 관심을 얻고 있다. 그 신비함과 더불어 기나긴 생존의 방식이 시사하는 점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기생을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물체가 빙하기의 시련조차 뛰어넘어 인류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기생이 인류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기생도 생명이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이며, 반드시 지구상에서 박멸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기생을 하는 생물이 숙주에게 도움을 주거나 생태계를 구원하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그 다양한 사례 중 하나가 '기생벌'인데,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는 큰 피해를 주지 않는 '깍지벌레'가 2002년경 미국 중북부 미시간 주에서 물푸레나무를 초토화시킨 일이 있었다. 이후 해당 지역에서는 물푸레나무의 집단고사로 호흡기 질병이 극심해졌고, 무려 2만1000명이 이에 영향을 받아 사망했다는 끔찍한 조사결과가 있다. 그리고 해당지역에 깍지벌레의 천적인 '기생벌'이 부재했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로 선정되었다.
아마 기생벌이 아니었다면 깍지벌레들은 주체할 수 없이 늘어나 세상의 나무들을 모조리 먹어치웠을 것이다. 이처럼 기생벌을 비롯해 생태계의 조정자 역할을 하고 있는 다양한 기생충들은 생태계를 균형있게 유지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삶까지 지켜주고 있다. (본문 275쪽 중에서)게다가 기생벌의 이런 역할은 이미 국내외를 불문하고 농업의 분야에서도 쓰이고 있다. 다른 벌레의 유충에 알을 낳는 '잔인한 번식법'을 가진 기생벌은, 방제법의 일환으로 1900년대부터 연구가 시작되어 현재는 해충을 막는 '친환경 농법'의 사례가 되어 국내에서도 관련제품이 시판되고 있다. 화학적 살충제의 부작용을 덜어내면서 진딧물 등의 숙주가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개체가 조절되는 등 이점이 많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사례는 더 있다. 쥐와 고양이를 숙주로 삼는 기생충인 '톡소포자충'은 치매를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한 장에 염증이 생겨 심한 설사와 복통을 유발하는 질환 '크론병'이 있는데, 그 치료법은 본문에 발표된 연구결과에 따르면 '기생충을 사람의 몸에 직접 주입'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충격적이지 않은가?
인간이 항생제를 개발하여 기생충을 없애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되지 않았고, 긴 세월 동안 인류의 몸 안에 살던 회충이나 편충을 갑자기 제거해서 기생충에 적응되었던 인간의 면역계가 무너진 것이 크론병의 원인이라는 가설이다.
아직 명백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크론병의 치료법으로 쓰이는 '기생충 주입'이 우리 몸의 항체를 만드는 'T세포'를 활성화시켜 면역계의 균형을 되찾게 도와준다는 부분은 사실로 드러났다고 한다. 미국식약청도 기생충을 이용하여 간과 장의 면역력을 높이는 해법을 연구중이라니, 기생충의 신비로움을 이미 과학계가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붉은 여왕'과의 달리기, 승자는 누구?예전에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하면 초반부에 '호환·마마·전쟁보다 무서운 재앙'이라 묘사된 무언가를 들은 기억이 있는가? 그 가운데에서 두 번째로 언급된 것이 바로 '천연두'이다. 삼국시대의 기록과 <조선왕조실록>에도 50여 건의 기록이 있는 천연두는 원래 일본말이 건너온 것으로, 한국에서는 '두창'이나 '마마'라 불렀다고 한다.
이 질병은 1885년 지석영이 우두신설을 지으며 접종을 시작했는데, 일제강점기 이후 다시 빈번하게 나타났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4만여 명 이상의 감염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 뒤 예방접종사업이 다시 시작되어 1959년 3명의 마지막 감염자가 나타난 이후로는 한국에서 자취를 감춘 질병이다.
천연두를 비롯한 각종 전염성 질환, 특히 기생충 질환들은 문명과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지금 세계의 권력구조를 형성하고 인류의 분포, 기술의 발달 등을 주도해 온 것이 바로 균, 즉 기생충들이다. 기생충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인류의 역사, 나아가 문명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본문 237쪽 중에서)하지만 천연두의 사례처럼 늘 인간이 질병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다. 1900년 무렵 40세에 불과했던 인간의 평균수명이 최근에 두 배 가량 늘어나게 된 것은 백신과 항생제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세균에게 당하기만 하던 인간이 대항할 무기를 갖게 되었고, 덕분에 홍역과 소아마비 등의 질환을 지구상에서 거의 사라지게 했다. 그런데 왜 말라리아는 여전히 매년 100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낳는 질병으로 남았을까?
1600년대 유럽에서 창궐하기 시작한 말라리아는 남미 기나나무의 추출액을 약으로 쓰면서 치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백신 개발은 힘든 과제로 남았고, 오히려 다른 질병들마저 항생제에 면역력을 가지면서 인류가 통제력을 잃어가는 처지에 놓였다.
<기생>은 이 지점에서 '붉은여왕' 이론을 제시한다. 이는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소녀 앨리스에게 붉은 여왕이 "보렴, 여기서는 있는 힘껏 뛰어야만 제자리에 있을 수 있단다"라고 말하는 것을 인용한 표현이다. 기생충과 인간, 혹은 질병과 인류의 대결을 '붉은여왕과의 달리기'로 묘사한 것인데, 서로가 공격과 방어를 거듭하면서 우위를 점하고자 진화하는 것을 일컫는다.
두 생물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같이 진화한다는 '공진화'의 개념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적응력인 면역과 동시에 선택된 개체들만 살아남게 만드는 자연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백신과 면역력을 쌓아가는 인류와 말라리아의 대결에서는, 과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까? 부디 인간이 힘없이 뒤처지며 질병에 정복 당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2014년 한국에서 발견한 '노올'... 씁쓸하다"자비로운 신이 다른 애벌레의 몸을 산 채로 파먹으며 자라나는 기생벌처럼 잔혹한 생명체를 창조하고 유지시키는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본문 54쪽 중에서, 찰스 다윈의 말)옛말로 '노올'이라 불린 기생충의 출현은 구충제와 항생제가 널리 보급된 오늘날에는 다큐멘터리, 혹은 뉴스에서나 가끔 볼 수 있을 정도로 점차 사라져가는 추세가 되었다. 그에 따라 '기생'을 삶의 방식으로 삼는 무언가의 숙주가 되는 일은, 이제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겪을 일이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고 해야 옳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과연 그럴까?
친일과 부패뿐만 아니라, 과거 독재정권의 만행도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며 합리화하고 현실도피를 일삼는 무리들이 여기저기서 창궐하고 있다. 그리고는 국민을 숙주로 삼으며, 우리의 시야를 '북한에 대한 공포심'과 '지역주의 편견', '땅값 관련 이기주의'를 부추겨 가리면서 생존도구로 쓴다. 그야말로 권력에의 충성을 위해 '기생'을 삶의 방식으로 사용하는, '노올'의 인간화를 보는 듯하다.
서민 교수와 박성웅씨, EBS 다큐프라임 팀이 공동으로 집필한 생물학 저서 <기생>은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하던 기생충의 세계를 쉬운 설명과 깔끔한 묘사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그 덕분에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동시에 접하는 효과를 얻으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한층 넓어지는 느낌도 든다. 깔끔한 편집이 책을 한결 읽기 수월하게 만들어준 것도 매력이다. 유일한 한가지 씁쓸한 점은, 책장을 덮고나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2014년 한국을 매개체로 기생하는 권력지향형 기생체 '노올'이 사회 각계를 배경으로 눈에 들어온다는 것, 딱 그 뿐이다.
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글 | <기생> (서민, 정준호, EBS다큐프라임 <기생> 제작팀 씀 | MiD | 2014.6. | 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