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전철 타는 거야? 휴대폰 켜 놓고, 잠들지 마."
"응,"
"엄마가 전화할 테니까 꼭 받고."
"알았어요."
이쯤 되면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야.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알았어요. 알았다니까."
어느새 내 목소리는 한 옥타브쯤 높아져 있었다. 엄마는 내가 매번 전철을 탈 때마다, 타고 가는 중에도, 심지어 내릴 때까지 휴대폰을 통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물론 엄마는 나를 염려하기 때문이지만 가끔은 좀 심하다 싶을 정도이다.
"얘. 전철 안에서 정신없이 잠들었다가 치한한테 끌려갈 수도 있어. 특히 승객이 별로 없을 때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끌려간단다."
"누구는 전철 안에서 아가씨가 술을 먹고 잠들었는데 옆에 앉아있던 남자 가 주변사람들한테 자기 여자 친구라고 둘러대고는 끌고 내렸다는 구나."
"얘. 전철 안에서 뜬금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조심해야 해. 뭘 먹으라고 건네줘도 절대 먹으면 안 돼.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니까, 그렇게 먹었다가 정신을 잃으면 큰일 난다."
정말이지 엄마의 걱정은 끝이 없다. 정작 전철을 타고 다니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오히려 전철을 타면 마음이 편안해지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엄마는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그런 엄마가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스카프는 챙겼니? 선물은? 그 아주머니 만나면 전화번호라도 좀 알아와라. 엄마가 고맙다는 인사라도 좀 하게."
"오늘도 못 만났니? 한 번은 꼭 만나야 할 텐데."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아주머니를 찾곤한다. 하긴 나도 엄마처럼, 아니 엄마보다 더 많이 아주머니를 만나보고 싶다.
나의 통학 주요교통 수단은 전철이다. 새벽5시 30분에 중앙역에 도착해서 4호선 전철을 타고 창동까지, 다시 그곳에서 1호선을 타고 의정부역까지, 거의 두 시간 반 정도 전철을 타고 간다. 의정부역에 도착해서는 셔틀버스를 타고 학교에 도착하면 9시 첫 강의를 듣게 된다.
특히 집으로 돌아올 때는 전철을 타면 새벽부터 시작된 하루의 피곤이 풀려 잠이 들고 만다. 가끔은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때로는 옆 사람의 어깨에 기대었다가 놀라 깨기도 하고 한 번쯤은 내릴 곳을 지나쳐버리기도 하고, 또 앉아있던 자리에서 떨어져 무릎을 꿇고 내려앉기도 하고.......
그래도 지금까지 잠 때문에 민망할 때는 많았지만 엄마가 우려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집을 나설 때 항상 무릎 담요를 가방 속에 넣고 간다. 전철을 탈 때, 특히 치마를 입었을 때 무릎 위에 펴고 앉기 때문이다. 전철을 타고 가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잠 들 때도 많아 혹시라도 민망한 일이 생길까하는 생각에 갖고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날은 정신없이 나오느라 무릎담요를 챙겨오지 못했다. 전철을 타고 빈자리에 앉아 자세를 바로 하고, 잠을 자지 않기 위해 휴대폰을 통해 음악을 듣기도 하고, 책을 꺼내 훑어보기도 하며 애를 썼다.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 버렸다.
누군가 나를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학생."
".......네?"
눈을 뜨니 나는 옆자리에 앉았던 아주머니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있었다. 그리고 무릎에는 처음 보는 스카프가 놓여 있었다.
"나는 다음 역에서 내려요. 하도 곤히 자길래. 그리고 이 스카프는 다음에 만나게 되면 줘요. 나도 학생 같은 딸이 있어서."
"아, 죄송해요. 그리고 이건 가져가세요.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데요."
순간 나는 당황해서 무릎에 놓여있던 스카프를 그 아주머니께 건네려했다.
"아니야. 나는 괜찮아요. 치마 입고 앉아 있으면 신경이 쓰이잖아요. 그리고 못 만나면 그만이지 뭐. 대신 내릴 곳을 지나치지 않게 해요. 그럼......."
아주머니는 손사래를 치면서도 환한 웃음으로 나를 다독여주셨다. 그렇게 아주머니는 방학역에서 내리고 나는 아주머니의 주홍색 스카프를 무릎위에 펼쳤다. 그리고는 의정부역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잠을 자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더 맑아지고 마음도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스카프의 부드러움은 딸같은 내가 정신없이 자는 모습이 안쓰러워 자신의 무릎에 기대어 잠들 수 있게 해주고, 치마를 입은 채 잠자다가 혹시라도 자세가 흐트러질까봐 자신의 스카프를 내 무릎에 펄쳐 준 아주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그날 이후부터 내 가방 속에는 아주머니의 스카프가 들어있다. 그리고 고마움을 담은 작은 내 선물도. 아주머니를 만나고 싶은 바람에 전철을 타면 주변을 둘러보게 되고 아주머니가 내린 방학역에 가까워지면 출입구 쪽으로 눈길이 가곤 한다. 덕분에 잠도 많이 줄었고 잠이 들 때도 예전처럼 깊은 잠에 빠지지 않아 공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나처럼 잠이 들어 민망한 여학생이 있으면 나도 아주머니처럼 도움을 줄 것이라는 치기어린 결심도 갖게 되었다.
아주머니를 만난 지 3달이 지난 지금까지 아주머니를 만나지 못했지만 나는 믿는다. 언젠가는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 때는 아주머니께 스카프를 돌려주고 감사했다는 말을 꼭 전할 것이다. 내 작은 선물도.
'띠리리링, 띠리리링.......'
전철이 역사로 들어오는 알림소리에 나는 출입구 쪽으로 다가가 줄을 섰다. 오늘은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기를, 따뜻한 웃음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