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얼마 전, 고교 2년생인 딸애가 학교에 갔다가 이내 조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열이 펄펄 끓어 39도를 넘었다. 의사는 인후와 편도가 모두 헐고 고름까지 가득하다며 무조건 쉬라고 처방을 내렸다. 딸애는 너무 아픈 나머지 마음도 약해졌는지 의사의 걱정스런 말 한마디에도 금세 눈물을 보였다.

열 때문에 추워하는 딸애를 찬 수건으로 계속 닦아주었다. 하고 싶은 일은 많고 힘에는 벅차고, 그런 모습을 보며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러다 문득, 장래 꿈들을 수첩에 적었다는 단원고 학생 고 박수현군이 떠올랐다. 가수가 꿈이라던 고 이보미양, 그리고 그날 4월 16일 수학여행 길에 있었던 딸애와 동갑내기인 아이들, 그리고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자식과 생이별을 하게 된 학부모들도 연이어 떠올랐다. 딸애가 아파서 정신없어 했는데 이것은 차라리 호사스런 투정이었다. 가슴이 다시 먹먹해져 왔다.  

같은 날 오후, 막내가 다니는 중학교에서 학부모교육을 진행한다고 해서 학교에 갔다. 마침 쉬는 시간이었는지, 운동장에서 교사(校舍)에 가까이 이르자 아이들 소리가 왁자지껄했다. 남자 중학생들이 내지르는 소리는 건물을 들썩거리게 할 정도로 기운찼다. 대여섯 학생은 비를 맞으면서 건물 현관문 앞에서 짓궂게 장난치며 놀고 있었다.

변성기의 남학생들 목소리 그리고 삼선 슬리퍼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날, 4월 16일, 침몰하고 있는 세월호 실내를 담은 동영상 속 아이들이 겹쳐지며 다시 머리가 아득해졌다. 교실 밖으로 흘러나오는 저 4백여 명의 학생들 소리는 온 몸을 휘감으며 나에게 다그쳐 묻는 것 같았다. 진도 앞바다에서 아이들이 이유도 모르고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지금 교실 안에서 저렇게 떠들고 장난치고 소리 지르고 있어야 할 아이들이 왜 여기 사람이 아니게 되었는가.

아이들을 보며 난 단원고 학부모가 돼 있었다

눈물 닦는 집회 참가자 21일 오후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대회에서 시민들이 우의를 입고 손피켓을 들고 있다.
눈물 닦는 집회 참가자21일 오후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대회에서 시민들이 우의를 입고 손피켓을 들고 있다. ⓒ 이희훈

'그날'로부터 49일째 되는 날이었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개별적으로 49재를 올렸고, 시신을 찾지 못해 49재조차 지낼 수 없는 실종자 가족들은 숨죽여 울어야 했다. 망자들의 눈물처럼 하루 종일 추적추적 제법 많은 비가 내렸고 곳곳에서 이들을 기억하며 추모제가 진행되었다. 나는 우리집 아이들을 통해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였다.

'그날' 이후 좀처럼 이전의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기가 어렵다. 특히 단원고 학생들 또래의 자식을 둔 나로서는 '그날' 이후 한동안은 그 또래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것만 보아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이들끼리 모여 장난치는 모습이나, 과장된 말이나 행동, 쉴 새 없이 깔깔거리며 웃어대는 모습도 그냥 예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볼 수 없었다.

막내가 수업을 마치고 집안으로 들어오며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할 때엔 다시는 이런 인사를 할 수 없는 아이들 그리고 저 인사를 받으며 "학교에서 별 일 없었느냐"고 다시는 물어볼 수 없는 부모들이 떠올라 머리가 멍해지고 하얘졌다. 아이들이 어리광을 섞어 혀 짧은 소리로 과일을 달라고 할 때엔 나는 거의 단원고 엄마가 되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어리광을 부릴 아들을 볼 수 없구나. 들뜬 기분으로 수학여행을 떠난 딸애가 영영 저 현관문을 열고 돌아오지 못하는구나. 너는 무슨 연유로 열여덟 그 나이로 다시 엄마의 가슴 속으로 들어와야 했니... 나는 혼자서 묻고 또 물었다. 머리는 좀처럼 맑아지지 않았다. 정신을 근근이 붙잡고 이 미친 세상에 냉정하게 대응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해야 했다.

어떤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나 '세월호'에서 조금 빗겨나 있었을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월호'는 내 일상의 중심에서 여전히 떠나지 않고 있다. 나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타인의 죽음이 이토록 오랜 시간 나의 일상을 지배한 적이 있었던가.

오래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작년에 오빠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가족과의 사별은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그리움 그리고 살아 있을 때 조금 더 잘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 같은 슬픔을 가져다 주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죽음과 부재는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고 슬픔 또한 차차 엷어지다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정작 남의 죽음 임에도, 시간이 지나도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어떤 구조활동도 펴지 못한 정부, 언론은 허위보도만

세월호 참사가 남다르지 않게 다가오는 것이 어찌 나 뿐이겠는가. 국민들 대다수는 참사가 발생한 직후 며칠 동안은 경악과 공포 가운데 아이들이 차가운 물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생중계방송으로 봐야만 했다. 자고 일어나면 기적적인 생환소식이 들려오지 않을까 실날같은 희망을 갖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국가는 속수무책 어떠한 구조 활동도 하지 않음으로 응답했다. 언론은 권력의 시녀답게 정권이 하달한 거짓말을 사실인양 보도하기에만 급급했다. 그러다 세간의 원망어린 비판이 쏟아지고 사실을 은폐하려는 의혹 어린 정황들이 포착되자 박근혜 정권은 승객들을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한 이유를 해경의 무능함으로 단정지어 버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전문적인 민간 잠수사들의 자원봉사를 가로 막고 첨단 장비들도 투입하지 않았던 그들은 무능했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구조할 의도가 없었다. 그들은 구조하지 못한 게 아니라 구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월호 안에서 아이들은 뭔가 위험한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실제로 배가 침몰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살아서 만나자고 서로 토닥였다. 절대 이동하지 말고 대기하라는 방송에 1시간 20여 분 동안이나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구조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국가는 조직적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국민을 기만하는 데에 열중했다. 그러는 줄도 모르다가 배가 거의 침몰하고 객실까지 물이 차오르면서 출입문이 닫히고 꼼짝 없이 고립된 순간 아이들은 창문을 깨려고 안간 힘을 썼지만 저들은 전혀 그런 움직임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결국, 침몰 초기에 '자발적 판단'으로 선박을 탈출했던 사람들을 빼고는 단 한 명도 살아나오지 못했다.

이것이 안전불감증으로 인해 발생된 단순사고인가?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인가? 아니면 갑작스럽게 당한 교통사고와 같은 것인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부끄럽게도 우리의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산 목숨을 희생 제물로 삼아 수장 시키는 순간을 중계방송으로 보지 않았는가. 이것은 명명백백 학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의심하고 물을 수밖에 없다. 당시 세월호 운항에 은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이, 어떤 일이 있었는가? 무엇을 위해 산목숨들을 희생 제물로 삼는 극단의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이렇게 무고한 학생과 국민들이 이유도 모르는 채 학살을 당했는데 도저히 모른 척,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수는 없다. 저 304명의 죽음이 과연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일까.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또 얼마나 큰 고통을 끌어안고 살고 있을까.

박근혜 정권은 세월호 침몰의 원인을 엉뚱한 곳으로 유인하며 민심을 흩어놓고 있고, 일부 사람들은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얼렁뚱땅 마무리 지으려 한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내 자식들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이 저 차가운 바다에서 공포 속에 죽어갔다. 죽음을 바로 앞에 두고 연거푸 엄마를 찾으며, "엄마, 아빠,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마지막 인사를 보내왔다. 그 울먹이는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한데, 어떻게 그 아이들을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산 채로 죽임을 당한 저 아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마지막 인사에 응답해야 한다. 우리가 밝혀냈다고. 그리고 응징했다고. 그러니 이제 편안하게 잠들어도 된다고. 죽을 때까지 너희들을 열여덟 예쁘고 건강한 아들 딸로 기억하고 사랑할 거라고.

노란우산 아래 젖은 손피켓 지난 21일 오후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대회에서 우산을 쓴 참가자 앞에 '박근혜도 조사하라' 손피켓이 놓여 있다.
노란우산 아래 젖은 손피켓지난 21일 오후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대회에서 우산을 쓴 참가자 앞에 '박근혜도 조사하라' 손피켓이 놓여 있다. ⓒ 이희훈

이 참사로 인해 '세월호 세대'라든가 '세월호 이전과 이후'라는 말들이 생겼다. 이 말에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지만 단지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이런 세상을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그저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분노하는 데 멈춰서도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이쯤에서 세월호 학살을 깊은 상처를 주었던 그저 그런 사건으로 규정짓고 일상으로 흩어져 돌아가자고 해서도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우리가 '세월호'를 놓아 버리는 순간, 세월호 학살보다 더 강력한 어떤 것이 우리의 생명을 옥죄며 달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멋진 옷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악마가 우리 일상을 침탈해 오는 것을 곧 맞닥뜨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슬픔을, 분노를 개인적으로 덮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것을 넘어 함께 소리쳐 물어야 한다. 왜 죽여야만 했는가!

세월호 참사를 단지 하나의 끔찍한 사건으로 기억하지 않기 위해, 304명의 억울한 영혼들의 한을 풀기 위해 날마다 칼을 간다. 그리고 날마다 주변을 정리한다. 학살의 전말을 밝혀낼 작은 물꼬라도 틀 수 있도록 몸뚱아리를 담보로 내어놓는다. 세월호 이전으로 돌아갈 것인지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나는 단 하나의 길 밖에 다른 방도는 모르겠다. 다만 그 길이 살아남은 자들에게 주어진 숙제를 풀어줄 열쇠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뿐이다. 

덧붙이는 글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기관지 <정세와노동> 제 102호에 게재한 내용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세월호참사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