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해 사과한 1993년 '고노 담화'는 일제의 아시아 침략과 식민 지배 전반에 대해 사죄한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와 함께 지난 20년간 한일 관계를 지탱해온 양대 축이었다. 때문에 아베 정부가 '고노 담화'는 한일간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취지의 검증보고서를 낸 것은 한일관계를 파탄낼 수 있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비판의 목소리만 높일 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이라는 결정적 패착 이래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에도 '강경 대응'으로만 일관해왔을 뿐이다.
지난 23일 만난 성공회대 일본학과 양기호(53) 교수는 "김대중 대통령은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했어도 두 달 뒤에 정상회담을 했다"면서 "역사 문제와 영토 문제만 매달리면 아무 것도 해결 못한다. 한쪽으로는 실용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지금 한일 양국 정부 모두 국내 정치를 위한 포퓰리즘으로 서로에게 접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더 큰 차원에서 "박 대통령의 한반도신뢰프로세스는 남북관계와 한일관계가 최악이라는 점에서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새로운 구상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 교수는 일본 게이오대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1996년에 성공회대에 부임해 일본정치와 한일관계를 연구해온 대표적인 일본 전문가로 꼽힌다.
아래는 양 교수와의 문답전문이다.
- 아베 정부가 '고노 담화' 검증보고서를 냈다. 아베 정부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고노 담화는 정치적 산물'이라는 것이 보고서의 핵심이다.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인하려는 것이다. 또 보고서 21쪽 중에 8쪽이 아시아여성기금 관련 부분인데, 이는 1993년에 김영삼 대통령이 진상규명만 하면 보상은 요구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왜 입장이 바뀌었느냐는 것이다.
일본은 자신들은 할 만큼 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1995년에 만든)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통해 네덜란드, 필리핀, 대만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보상했고 한국에도 250명 중에 61명에게 총리의 사과 편지와 함께 500만엔씩 지급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대부분의 위안부 피해자들과 정부는 일본의 이런 접근은 위안부 문제를 국가범죄가 아니라 민간문제로 격하시킨다는 측면에서 반대했다. 그래서 우리 정부가 자체적으로 피해자들에게 5천만 원 정도를 지급했다.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활동과 우리 정부의 지원으로 이 문제가 국제화했고, 일제 때 강제징용 문제로까지 관심이 확대되고 있다. 일본은 이에 대해 (극우 정당인) 유신회와 산케이 신문 주도로 '고노 담화' 검증을 요구하는 18만 명의 서명을 받았고, 위안부 증언에 맞서 (제국주의 시대) 옛군인들의 증언을 수집하고 있다.
그런데 1993년 '고노 담화'발표 이후 일본 정부의 개입과 강제성에 대한 500건 이상의 증언이 나왔다. '민간업자 옆에 헌병이 있었다'는 증언들은 국제적으로 명백한 강제성이 인정되는 증언들이다. 결국 아베 정권은 고노 담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할 경우 국제적으로 고립되기 때문에 말로는 승계한다고 하면서 현실적으로는 사문화하려는 것이다."
"우리 정부, 북한·일본과는 대화 않고 있어"
- 일본은 이번에 외교 당국자간에 오간 비공식 대화까지 공개해 버렸다."보통은 30년 뒤에 공개하는데, 이번에 21년 만에 공개했다. 대단히 이례적이다. 그만큼 일본 정부의지가 강한 것이다. 역사 교과서 내용도 개악됐지만 10년마다 하던 검정을 6년으로 앞당겼다.
아베 정부는 2012년 12월 2차 집권 이후 교과서 왜곡, 집단적 자위권 추진, 내각 안에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와 독도 문제를 담당하는 영토주권대책실 설치, 고노 담화 검증 등 우리와 중국이 대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일본 의회에는 한국과 중국이 매우 가까워졌으며, 이렇게 계속 가면 한국은 과거 근대 이전의 중화질서로 회귀할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반면 우리에게는 일본의 중요도가 낮아진데 비해 중국의 비중은 굉장히 커졌다. 박근혜 정부는 일본을 배제하고서라도 한미중 3자 관계를 만들려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취임 후 행사장에서 만나는 정도 외에는 한 번도 주한 일본 대사를 만난 적이 없다."
- 외교부는 주한 일본 대사는 장관이 아니라 1차관이 파트너라고 한다. "급으로 따지는 것 같은데, 이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베 정권의 우경화 때문에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인데, 미국, 중국, 일본 대사는 자주 만나야 한다. 연구자인 저도 일본 대사를 몇 차례 만났다. 문제는 우리가 일본을 빼고 한미중 3자관계를 추동할 힘이 있느냐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노무현 정부때 균형자론과 비슷하게, 미중 사이에서 우리가 균형잡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현재 우리 국력으로는 이게 어렵다. 그래서 남북관계, 한일 관계를 좋게 가져가면서 다양한 카드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일본, 북한과는 대화를 하지 않고 있다."
"아베, 재선 가능성 높아... 박 대통령 임기와 함께 가는 것"- 우경화 행보가 아베 정권의 지지도에는 도움이 되는 것 아닌가."우경화에는 아베 총리의 개인적인 정체성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정치인으로서의 자기 소명으로 보는 것이다. 지지도 부양에도 도움이 된다. 민주당은 사실상 붕괴했기 때문에 유신회 같은 우파와의 연대 공간이 넓어져 있다. 아베 정부는 고노 담화가 한일간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입장이지만, 실제는 아베 정권과 일본 우익들간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말로는 승계한다고 했지만 실제는 내부 압력과 타협한 것이다.
내년 가을에 자민당 총재 선거가 있는데, 현재로써는 아베의 재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2018년까지 집권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 임기와 함께 가는 것이다. 현재 지지도가 45%수준인데, '아베노믹스'에 따라 소비세를 8%로 인상한 뒤 지지도가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래도 버티고 있다. 집단적 자위권 추진으로 지지도가 떨어지기는 했는데, 아베를 대체할 만한 차기 주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 '무라야마 담화'도 흔들리게 되는 것 아닌가."아베 정권은 2차 대전 종전 70주년인 내년 8월 15일에 전후체제 탈피를 핵심으로 하는 '아베 담화'발표를 준비하고 있다. 고노 담화와 함께 무라야마 담화도 무력화할 가능성이 높다. 고노 담화 검증은 거기로 가는 중간단계로 보인다."
- 아베 총리는 그간의 반북적인 행보와는 달리 북한과 '납치문제 재조사-독자제재 해제'에 합의했다. "아베 총리로서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은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는 데 좋은 카드다. 그리고 2002년 고이즈미 총리 방북 때 수행하면서 자신의 인지도가 급상승한 기억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만약 납치자 몇 명이라도 송환한다면 아베로서는 굉장한 성과가 될 것이다."
- 실제 성과를 내기는 굉장히 어려울 것 같다. "일본은 납치자 규모를 200~300명 수준으로 보고 있는데 반해 북한은 납치자는 13명뿐이고 이중 5명이 생존해 있다는 말한다. 납치자의 상징처럼 돼 있는 요코다 메구미 생존여부도 가려야 하는데, 이게 굉장히 어렵다. 또 납치 문제를 조사하다 보면 납치 상황 등과 관련해 끔찍한 얘기가 계속 나오면서 북한 입장이 어려워 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더 큰 차원에서 보면 납치자 문제를 통한 북일 수교도 어려운 얘기다. 일본은 핵문제와 납치자문제 해결을 수교 전제조건으로 제시해 왔는데 둘 다 굉장히 어려운 사안이다. 또 북한과 수교하면 일본이 100억불 이상 지원하게 될 텐데, 북미 관계, 남북관계가 악화된 상태에서는 미국과 한국 모두 반대하게 될 것이다."
"남북관계, 한일관계 파탄으로 한계 도달... 새로운 구상 나와야"
- 박근혜 정부는 이후 대일 외교를 어떻게 해야 하나.
"역사 문제와 영토 문제만 매달리면 아무 것도 해결 못한다. 한쪽으로는 실용적 접근을 해야 한다. 과거 김대중 정부는 실용적으로 접근했다. 대응할 건 하고 경제협력도 하면서 공동 월드컵 개최하고 문화개방 통해 한류붐을 만들었다.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 했어도 두 달뒤에 정상회담을 했다. 박 대통령의 최근 5년간 일본 관련 발언을 살펴 본 적이 있는데 대단히 일반적이고 추상적이었다.
지금 한일 양국 정부 모두 국내 정치를 위한 포퓰리즘으로 서로에게 접근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지난 1년 평가에서 제일 점수가 좋았단 분야가 대일외교와 남북관계 부문이었는데, 이런 게 현재도 작용하고 있다.
이제는 양자관계에만 집중하지 말고, 동북아 전반을 봐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아세안+3(동남아시아국가연합+한중일)와 동아시아정상회의(EAS) 등을 주도하면서 그림을 크게 그렸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북한과 일본, 동남아가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는 남북관계와 한일관계가 최악이라는 점에서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새로운 구상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청와대 외교안보라인은 안보지상주의자들이 차지하고 있고, 외교부는 관료중심으로 경직돼 있어 우려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