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반 동안 한반도 전역은 슬픔에 빠졌다. 곳곳에서 "가만히 있지 않겠다", "잊지 않을게" 등의 구호가 울려퍼졌다. 그러나 어느새 한 명 한 명씩 잊어가고 있단 두려움이 생긴다. 나도 마찬가지다.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에 '노란 리본 사진' 걸어놓고 '아, 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예의를 표했어'라며 자위하는 나를 발견했다. 일상의 희로애락 때문에 점차 304명의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들을 잊어가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그러는 동안에도, 더운 날씨에 '가만히 있지 않고' 머나먼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단 사실을 알았다. 6월 27일 오후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발대식을 하고 진도 팽목항을 향해 출발한 세월호 '별들과의 동행' 도보순례단(아래 순례단).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팽목항까지 거리는 465.54km, 순례단이 걷는 거리는 425.46km다. 이들뿐만 아니라 부산, 대구에서 출발하는 순례단의 행진 거리까지 합치면 1146km다.
덥고 습한 6월 말~7월 초에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그리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위해 머나먼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단 얘길 듣고, 나도 단 하루나마 힘을 보태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틀째 행진에 동참하기 위해 28일 토요일 아침, 수원역으로 향했다. 내가 사는 남양주에서 수원까진 2시간이 좀 넘게 걸렸다. 오전 8시까지 가야 했는데 10여 분가량 늦고 말았다. 순례단은 이미 수원역을 지나 행진 중이었다. 급한 마음에 택시를 타고 세류역 방면으로 향했다. 중간에 노란 옷을 맞춰 입은 사람 8명가량이 눈에 띄었다. 나는 택시에서 내렸다.
상상했던 것보다 순례단 인원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함께 걷는 이들을 보니 백발이 성성하신 어르신 두 분, 중년 남성 세 분, 여승(女僧) 한 분, 그리고 20대 청년 둘이었다. 그리고 지원대가 탄 차량 두 대가 바로 옆에서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남양주에서 왔다고 하니 "먼 길 잘 오셨다"며 반가워했다. 내 바로 앞에서 걷던 두 분은 '별들과의 동행'이라 적힌 플래카드를 든 채 행진했다. 한 분은 나와 마찬가지로 오늘부터 합류한 직장인이었고, 한 분은 79세의 어르신이었다. 잠시 후 나는 어르신 대신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다.
눈길 안 주는 사람들이 야속했지만... 그래도 걸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염없이 걸었다. 순례단은 서울과 수원을 잇는 경수산업도로에 들어섰다. 우리 바로 옆으로 온갖 승용차와 버스, 레미콘이 지나다녔다. 차량들이 지날 때마다 매캐한 먼지가 우리 눈, 코, 입으로 들어갔다. 잠시 넋 놓고 걷다, 옆으로 넘어지면 부딪칠 거리에서 버스가 지나가 번뜩 정신을 차린 일도 몇 번 있었다. 버스에 탄 승객들은 행진하는 우리에게 눈길을 아예 안 주거나, '뭐하는 사람들이야' 하는 눈길로 쳐다봤다.
1시간 정도 걷다 휴식을 취했다. 순례단의 행진은 1시간 정도 걷고 10~15분 쉬는 식으로 이뤄졌다. 한 번에 걷는 거리는 대략 4.2km 정도였다. 나도 원래 많이 걷는 편이라, 그때까진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때 순례단의 행진을 지도하던 사람이 말했다. 그는 같이 걷던 청년들에게 '목사님'이라 불렸다.
"아마 처음 걷는 분들은 장딴지가 많이 땡기실 거에요. 그리고 내일쯤부턴 슬슬 무릎도 땡길 수 있으니까, 몸 관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오전 행진은 12시경에 마무리됐다. 우리가 멈춘 장소는 전철 1호선 오산대역-오산역 사이에 있는 오산시민회관 근처였다. 순례단은 이 무더운 날씨에도 멀고도 위험한 길을 무사히 지나온 자신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며 오전 일정을 매듭지었다.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산시민회관 안의 등나무 그늘에서 1시간 정도 쉬었다. 무덥고 쨍쨍한 날씨 때문인지 슬슬 잠이 왔다. 등나무 그늘의 나무의자에 잠깐 누웠더니 금방 잠이 왔다. 다른 순례단원들도 자거나 담소를 나누며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나와 함께 오늘 합류한 아저씨가 안 보인다. 약 30분 후, 그가 지원대 대원인 여성분과 함께 돗자리를 들고 왔다. 돗자리에 누워서 쉬게 하려고 근처 마트까지 갔다 왔다고 한다. 다들 쉬는데 그들만 제대로 못 쉰 듯해서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오후 행진을 하면서 그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중학생과 초등학생인 자식들을 두고 있었다. 그는 그날 아침에 합류해 그 다음 날인 29일 일요일 저녁까지 행진을 함께할 거라고 했다. 월요일 출근하는 데 지장이 없겠냐고 묻자 "전 원래 등산을 많이 다녀서 괜찮아요"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를 점점 잊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세월호 참사가 점점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건 아닌지..."
"(세월호 참사가) 점점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리 큰 일이 있어도 빨리 잊고 만단 생각도 드네요. 언론에서 사고 진상규명 등의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계속 얘기해야 되는데 그러지 않고 있는 게 문제라 생각해요. 방송사들도 JTBC 정도 제외하면 세월호 문제를 얘기 안 하고 있고…."순례단에 동참한 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은 82세, 그 다음은 79세였다. 두 분은 아무래도 연세가 연세이니 만큼 젊은 사람들만큼 오래 걷진 못했다. 순례단의 다른 대원들은 그들에게 "선생님,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차 안에 계세요"라며 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르신들은 체력이 닿는 한 최대한 걸으려고 했다. 뙤약볕 속에서 걸으며 나도 모르게 '아, 잠깐만 차에 타서 에어컨 쐬고 싶다'라고 생각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82세의 김제현 어르신은 "우리 같은 늙은이도 걷는다"고 하시며, 내 또래의 젊은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에 약간의 아쉬움을 표하셨다. 난 또 다시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한 명이라도 같이 가자고 말이라도 해볼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연령 서열 2위'인 79세의 어르신은 참가 계기를 묻는 내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죄책감 때문에. 나 같은 어른들이 잘못했단 죄책감 때문이야. 우리 기성세대가 사회를 제대로 이끌었다면 그들이 그렇게 죽진 않았지. 근데 정작 그들을 죽게 만든 사람들은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어. 이건 이조(조선)시대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온 문제야. 진정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은 꼭 해야지…."더위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가는데 벌써 오산-평택의 경계선이다. "시민 모두가 행복한 평택시"라 쓰인 표지판이 우리를 맞이한다. 걸어서 네 곳의 도시(수원, 화성, 오산, 평택)를 지나고 있다.
우리 가는 길 옆으론 논이 펼쳐져 있었다. 그 옆 경부선 철길 위엔 수시로 무궁화호 열차와 수도권 전철이 지났다. 그날 우리를 '추월'한 열차만 수백 대는 됐다. 그리고 맑은 하늘을 노니는 백로가 종종 눈에 띄었다. 그리고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시원한 바람이 순례단의 땀을 식혀줬다. 세월호 추모곡 <천 개의 바람이 되어>의 그 바람이, 304개의 바람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었다.
"체력이 다해 쓰러지지 않는 한 계속할 생각"
"얘들아! 조금만 천천히 가라!"목사님이 맨 앞에서 쌩쌩하게 걸어가는 두 청년에게 소리를 지른다. 두 청년은 그날 행진 내내 선두를 놓치지 않았다. 지치지도 않나 보다. 잠깐 화장실 가느라 대열에서 뒤처져도 순식간에 따라왔다. 20대 초반의 두 청년은 너무 빨리 걸어서 때로는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그 패기 넘치는 모습 때문에 어르신들의 예쁨을 독차지했다. 쉬는 시간 간식을 먹을 때마다 어르신들은 그들에게 먹을 걸 더 많이 주시며 "젊은 사람들이 많이 먹어야 돼"라고 격려하셨다.
원정스님은 점심 식사 도중 압박붕대로 발을 싸맸다. 발목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서울역 인근 동자동에 있는 원정사란 절의 스님이었다. 스님은 팽목항까지 계속 행진을 하실 거냐는 내 질문에 "체력이 다해 쓰러지지 않는 한 계속할 생각"이라 했다. 순례단의 다른 사람들도 스님이 걱정됐는지, "더울 땐 무리하지 마시고 차 안에 계세요"라고 말렸다. 그러나 스님은 괜찮다며 한사코 사양했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그녀는 승복 위에 순례단의 노란 옷을 겹쳐 입고 있었다.
어느새 오후 6시가 됐는데도, 햇볕은 누그러질 기미가 안 보인다. 오늘의 목적지인 평택역은 아직 한참 남았다. 당초 계획보다 우리의 행진은 약간 늦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걷다간 더위 때문에 쓰러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지원대가 차량을 통해 순례단 인원들을 평택역까지 태워주기로 했다. 우리가 멈춘 곳은 지제역(평택역 직전 역) 약간 못 미친 지점이었다. 차를 기다리며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목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네, 송정근입니다."깜짝 놀랐다. 세월호 참사 직후 실종자 가족 대표를 맡았던 송정근 목사가 바로 그였다. 목사는 18년 동안 경기도 안산·시흥 지역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청소년들을 위한 쉼터를 운영해왔다. 그러다 참사 직후 실종된 단원고 학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단숨에 진도로 내려갔다. 그 직전에 6·4지방선거 새정치민주연합 경기도의원 예비후보도 사퇴했다. 진도에 가선 실종자 가족들의 동의 하에 실종자 가족 대표직을 수락했다.
지금도 그들은 걷는다... 함께하자
그럼에도 채널A 등 보수 언론은 그를 '가짜 실종자 가족 대표'라며 매도했다. 송 목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조중동'이야 나를 한번 스쳐 지나가는 먹잇감 정도로 생각했을 거니 정정보도 같은 건 기대 안 한다. 그러나 진보 언론도 몇몇 인터넷 언론을 제외하면 그 이후 내 입장을 다뤄준 데가 별로 없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송 목사는 매년 7월엔 자신이 돌보는 청소년들과 함께 국토순례를 떠났다. 순례 때마다 청소년들에게 부족한 재정에도 꼬박꼬박 고기를 사 먹였고, 저녁엔 영화도 보여줬다고 한다. 이번 순례에서도 송 목사의 지론은 변함없었다.
"아무리 돈이 들어도 오랫동안 걷는 사람들은 잘 먹여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퍼집니다."그날 저녁 식사 또한 삼겹살이었다. 차를 타고 평택역에 가서 서명 활동을 벌였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생각 이상으로 서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특히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거의 100% 서명에 동참했다. 한 청년은 팔순의 어르신이 "우리 진도까지 걸어서 가"라고 말씀하신 것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서명 후 "힘내세요"라며 격려하는 시민도 여럿이었다. 행진하느라 지쳤을 텐데도 순례단원들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서명운동 진행 중입니다", "아직도 11명이 바닷속에 있습니다", "세월호를 잊지 맙시다"라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날 내가 걸은 거리는 30km였다. 그 정도 걸었는데도 밤에 집으로 갈 때 무릎 뒤쪽이 결렸다. 진도를 향해 40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갈 순례단원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땅 어딘가를 걷고 있다. 송정근 목사는 그날 동참했던 이들에게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동참해주신 여러분이 아니었으면 이 무더운 길을 가는 데 더 쓸쓸했을지도 모릅니다." 동참하자. '별들과의 동행'은 7월 13일 팽목항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계속된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지금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힘을 보태주자. 그 길엔 밤하늘의 별들도, 그리고 저 하늘 위를 나는 '천 개의 바람들'도 함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