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고궁(故宫)에서 승덕(承德) 피서산장까지 거리는 약 230킬로미터. 박지원은 백하를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건너 열하(热河)로 갔다지만 경승(京承)고속도로를 달리면 3시간도채 걸리지 않는다. 가깝다고 자주 가는 게 아니듯 북경에 산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승덕을 찾았다.
'선조가 남긴 은덕을 계승한다'는 승덕의 지명은 청나라 옹정(雍正) 11년(1733)에 처음 등장한다. 기원전에는 북방 민족이 말 달리던 터전이었고, 몽골족이 세계를 제패한 이후 '뜨거운 물 줄기'라는 뜻의 지명 하룬가오루(哈倫告盧)를 그대로 청나라가 '열하'로 번역했다. 승덕은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 시기 열하 성의 수도였다가 신중국 수립 후 1955년 열하 성이 폐쇄되자 하북성으로 귀속됐다. 이렇게 몽골족과 만주족의 아름다운 이름이 사라졌다.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피서산장은 황제의 행궁이다. 강희제부터 건축해 건륭제가 대대적으로 확장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89년이나 걸렸다. 이화원의 두 배에 이르는 564만 제곱미터의 넓이에 궁전뿐 아니라 호반이 있는 정원, 농사와 사냥터인 평원으로 나누어져 있다.
피서산장의 입구는 '아름다운 정문' 여정문(麗正門)이다. 건륭제가 하사한 편액으로 만주어·한족어·몽골어·티베트어·위구르어 등 다섯 개 민족어로 나란히 새겨 있다. 정문을 넘어 넓은 마당을 지나면 북경 고궁과 같은 이름의 오문(午門)이 나타난다.
오문을 지나 관리 및 소수민족 사절을 검색하고 친견하는 열사문(閱射門)이 나온다. 문 위에는 강희제 친필의 도금 동판 '피서산장(避暑山莊)' 편액이 걸려 있다. 네 면을 용 문양으로 새겨 놨으니 황제가 아니라면 감히 사용하기 어려운 편액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피(避)'자가 좀 이상하다.
이 글자, 뭔가 이상한데...
예민한 사람은 금방 알 수 있는데 매울 신(辛) 자에 한 획이 더 그어져 있다. 황제가 직접 쓴 글자인데 잘못 썼더라도 다시 쓰면 될 일이고, 강희제는 고문과 지식이 해박해 실수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이지 피난이란 뜻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는 의지였다는 해석도 있다.
이백이 감동이 지나쳐 대동 현공사나 무한 황학루에 장관(壯觀)이란 글자에 점 하나를 더 찍은 것처럼 강희제가 발랄한 성격도 아니었을 듯하다. 청나라 시대까지 고대 한자에서는 '피'자에 두 글자 모두 범례로 사용했다는 것이 정설로 보인다. 네 면을 용 문양을 두른 것도 흔하지 않은 편액이다.
궁문을 지나면 정궁이다. 강희제가 처음 세웠고 건륭제 때 운남·귀주·절강 등지에서 19만 명이 동원돼 운반해 온 녹나무(楠木 또는 樟樹)를 기반으로 재건했다. 녹나무는 지름이 2미터, 높이가 20미터에 이르며 방충 역할도 해 고급 건축물에 많이 사용한다. 이 7칸 남목전(楠木殿)은 대리석 바닥 위에 옥좌가 놓여있고, 주위는 황제를 상징하는 선학(仙鹤), 향정(香鼎), 여의(如意) 등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정면 위에 담박경성(澹泊敬誠)이라 써 있는 편액이 걸려 있다. 직역해보면 '욕심 없이 마음이 깨끗하고 온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다. 강희제의 친필 하사 편액으로 고전으로부터 인용했다. <역경(易經)>에 나오는 '평상심을 가지라'는 담박은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때 한 대학교 강연 중 읊은 말이기도 하다. 말이 꼬여 '담백'이라고 말했다가 얼른 '담박'이라 주워담았다. '담백'처럼 쉬운 말이 아닌데 굳이 '마음이 담박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 없고'라고 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 마음이어야 뜻을 바로 세울 수 있다'라고 쉽게 풀어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진취적 기상을 젊은이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제갈량이 <계자서>에서 밝힌 '비담박무이명지(非澹泊無以明志)'이 그 출처다.
담박경성 아래에는 나무 병풍이 하나 있는데 무려 163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농가경직장락도(農家耕織長樂圖)가 있다. 생생한 모습으로 농사와 직조를 하는 모습이 황궁 안에 있는 게 독특하다.
박지원을 따라가서 배운 <역경>의 '싸가지'
정궁 뒤는 정무를 본 후 탈의하거나 소수민족 대표와 사절단 환담하고 신하를 접견하는 사지서옥(四知書屋)이 있다. 황제가 꼭 지켜야 할 원칙으로 삼기 위해 군자의 덕목 네 가지를 강조했다. <역경> '계사하(繫辭下)전'은 '군자가 네 가지를 알면 만백성이 우러른다(君子知微知彰知柔知剛, 萬夫之望)'라고 언급한다.
미(微), 장(彰), 유(柔), 강(剛)을 직역하지 말고 중국 최초의 한자 사전으로 평가받는 <설문(說文)>의 해석에 따르면 '감추어야 할 일(隐行)'과 '드러내 밝힐 일(文彰)' '옳고 그름(曲直)' '단호한 결단(彊斷)'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원래 강희제는 '맑고 넓은 마음으로 통치하라'는 의청광(依清旷)이라 불렀는데 건륭제에 이르러 사지서옥으로 바꿔 불렀다. 4가지라는 말이 싹수 없는 사람을 부를 때 통속적으로 쓰이듯, '싸가지' 없는 지도자에게 말해주고 싶은 경구(警句)이기도 하다. 고전을 인용한 작명이 부럽기도 하다.
사지서옥 뒤쪽은 침궁 연파치상(煙波致爽)이다. '온 사방이 수려하고 넓은 호반이 있어 상쾌하니' 기분이 좋다고 한 강희제의 말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 너비 7칸, 깊이 3칸 크기의 침궁 안에 거실과 난각(暖閣), 불당이 있다. 태평천국의 난과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외국 열강에 시달리던 함풍제는 1860년 바로 이곳 서쪽 난각에서 붕어했다.
내우외환과 황제 사망, 권력승계로 혼란한 와중에 27살의 의귀비(懿貴妃, 서태후)는 공친왕 혁흔과 짜고 신유정변(1861)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서소(西所)는 당시 서태후가 기거하던 장소로 자희거가(慈禧居家)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뒷문으로 나가는 곳에 운산성지(云山胜地) 누각이 있다. 1층은 황제가 공연을 보던 무대이고 불교를 숭상했던 만주족답게 2층에는 불당이 있다. 마당은 중국 정원 양식을 따라 가산(假山)이 만들어져 있고, 누각 뒤 수운문(岫雲門)을 빠져나오면 바로 넓은 호반과 평원으로 연결된다. 궁전은 피서산장의 극히 일부분이다. 대부분은 호반과 평원과 산으로 이뤄져 있다.
소주 창랑정을 본떠 만든 이곳
호반에는 수많은 건물과 다리가 연결돼 있다. 항주(杭州) 서호에 있는 백제(백거이가 만든 제방)와 소제(소동파가 만든 제방)를 모방해 만든 다리 지경운제(芝徑雲堤)는 '지(芝)'자 모양으로 강희제가 명명했다. 서호처럼 제방을 쌓자 나누어진 호반마다 제각각 호수 이름을 지었다.
은호(銀湖)와 경호(鏡湖)가 있고, 다리 하나가 상호(上湖)와 하호(下湖)를 갈라놨으며 징호(澄湖)와 여의호(如意湖)라는 이름도 있다. 여희호 속에는 작은 섬 여의주(如意洲)가 있는데 여의는 불교 설법 도구이자 신하가 황제에게 보고할 때 들고 있곤 한다. 섬과 제방을 이어보면 위가 둥글고 길게 휘어진 모양새가 여의와 닮아 보인다.
여의주에는 호반을 바라보며 연꽃을 관람하던 관련소(觀蓮所)와 창랑서(滄浪嶼)도 있다. 창랑서는 정원으로 아름다운 도시 소주(蘇州)에 있는 창랑정(滄浪亭)을 본떠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북송 시대 문인 소순흠(蘇舜欽)이 낙향해 지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정원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곳이다. 무서청량(無暑清涼), 금연영일(金蓮映日), 수방암수(水芳岩壽), 연훈산관(延薰山館), 일편운(一片云) 등의 이름, 호반과 잘 어울리는 건물이 즐비하다. 2층 누각 연우루(煙雨樓)는 드라마 <황제의 딸(還珠格格)>을 촬영한 곳으로 유명하다.
맞은 편 징호 호반 금산도(金山岛)에는3층 목탑과 함께 옥황상제와 진무대제에게 제사를 지내던 상제각(上帝閣)이 있다. 명나라 영락제가 반란으로 차지한 황제의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스스로 도교의 신으로 우상화했는데 바로 진무대제이자 진무사상이다. 금산도는 강소성 진강(镇江)에 있는 행궁이자 사원인 금산사(金山寺)를 본떠 지은 것이다.
피서산장 평원에는 어과포(御瓜圃)나 보전총월(甫田丛樾) 등 벼농사를 짓던 논이나 과일·채소를 재배하던 곳도 있다. 호수를 따라 곳곳에 수많은 건물이나 농토가 연이어 있다. 호반 길을 따라 한 바퀴 돌아 북쪽으로 걸어가면 숲 속에 아담한 건물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 바로 국가도서관 북사각 중 하나인 문진각(文津閣)이다.
건륭제는 중국 문헌 총서인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한 후 영파(宁波)에있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설도서관 천일각(天一閣)의 구조를 따라서 국가도서관을 만들어 보관했다. <사고전서>를 만든 건륭제는 화재 등에 인해 손실될 것을 우려해 국가도서관 7곳에 복사본을 만들어 각각 보관했다. 세월이 흘러 각 <사고전서> 도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문진각에 보관됐던 복사본은 민국 초기 북경으로 옮겨져 현재 중국국가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문진각을 들어서면 돌로 쌓은 가산이 막고 있고 뒤로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 뒤쪽으로도서관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밖에서 보면 2층이고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암층이 하나 있어 모두 3층 구조이다.
문진각을 벗어나면 넓은 벌판에 몽고바오(蒙古包) 수십 채가 있다. 피서산장에서도 돈을 벌겠다는 노력이 멈출 리가 없다. 풀이 빽빽하게 자란 만수원(万树园)과 몽고바오 뒤쪽으로 높이 솟은 탑이 보인다. 건륭제가 세운 영우사(永佑寺) 내 9층 사리탑이다. 피서산장에서 가장 큰 건물로 본전과어용루(御容楼)는 사라지고 터만 남았고 석비와 탑만 남아있다.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의 화상을 어용루에 걸어놓고 피서산장에 올 때마다 가장 먼저 영우사에 들러 제배(祭拜)했다.
세계문화유산이라 입장료는 120위안(약 2만 원)으로 꽤 비싼 편이다. 박지원이 다녀간 열하의 땅에 있는 피서산장의 궁전에 담긴 역사 흔적과 호반의 풍광을 거닐고 문진각과영우사까지 둘러봤다. 박지원이 왔던 땅, <열하일기>를 생각하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13억과의 대화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