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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대한민국 인구 중 10%가 한 자리에 모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우리 인구를 5천 만 명이라고 치고 부산의 인구를 훌쩍 넘는 500만 명을 모두 한 자리에 놓고 거대한 축제를 벌이는 게 가능할까?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을 자리도 없겠지만, 그들을 어디에서 재울 것이며 밥은 또 어떻게 먹일 것인가. 생각해보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런 일이 실지로 일어나는 나라가 존재한다. 바로 에스토니아다.

에스토니아에서는 5년마다 한 번씩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인구 수만 명이 거대한 합창을 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수도 탈린으로 모이는 것. 에스토니아 말로 라울루피두(Laulupidu)라 하는 이 마법같은 행사가 지난 4일부터 6일까지 3일에 걸쳐 열렸다.

5년에 한 번 열리는 노래잔치... 150년 역사의 인류문화유산
 
 7월 4일부터 6일까지 열린 에스토니아의 대합창제, 라울루피두(Laulupidu)
7월 4일부터 6일까지 열린 에스토니아의 대합창제, 라울루피두(Laulupidu) ⓒ 서진석

1869년에 시작되어 200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한 이 거대한 행사는 올해로 26번째다. 아름다운 발트 해안가에 설치된 무대는 기계의 도움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사람들의 목소리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되었다. 이 합창무대에 전국 각지와 해외에서까지 모인 최대 2만여명의 합창단이 동시에 올라 웅장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그 장관을 보기 위해 7만여명의 사람들이 모인다. 즉, 그 공간에 무려 10만여명의 사람들이 들어서는 셈이다.

이는 120만의 에스토니아 인구 중 12분의 1에 해당하고, 40만의 수도 탈린 인구 중 4분의 1, 더 나아가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인 타르투 전체 인구와 맞먹는다. 평균적으로 1평방킬로미터당 30명에 불과해 유럽 최저의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에스토니아지만, 이 행사장에는 10만여명이 모이니 미국 맨해튼 인구의 두 배가 넘는 셈이다.

이렇게 정신 없을 것 같은 행사를 위해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장장 5년을 손꼽아 기다리며 준비한다. 또 이 행사의 매력에 폭 빠져서 행사마다 꼭 참석하는 해외의 마니아들도 늘어나고 있다. 나처럼 말이다. 이 엄청난 행사를 올해로 세 번째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아마 내가 늙어 기력이 없어질 때까지 이 행사가 열리는 해마다 에스토니아를 찾게 될 것같다.

라울루피두(Laulupidu)는 에스토니아 말로 '라울=노래'이고 '피두=잔치'이니 우리말로 그냥 '노래잔치'라도 해도 좋을 것이다. 이 노래잔치는 1869년에 처음 시작했고 1934년부터는 무용잔치인 '탄쭈피두(tantsupidu)'도 함께 열렸다. 에스토니아 민족은 20세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나라를 만들지 못하고 주변 국가들의 노예들처럼 살아왔다. 라울루피두는 제정 러시아의 지배 하에서 신음하던 당시, 요한 볼데마르 얀센과 그의 딸 리디아 코이둘라 같은 19세기 말 선각자들의 제창으로 시작됐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며 에스토니아인으로서 긍지를 북돋고 독립국가에 대한 의지를 세계에 천명하는 행사를 에스토니아의 정신적 수도와 같은 타르투에서 처음 열었다. 그 후 대략 10년에 한 번 꼴로 부정기적으로 열리다가 1896년 장소를 수도 탈린으로 아예 옮긴 이후로는 지금처럼 5년마다 한 번씩 치르는 것으로 고정되었다.

이 노래잔치는 서슬 퍼런 소련 지배 시절에도 변함 없이 열렸다. 정치적 분위기에 따라 에스토니아의 애국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노래들은 상당히 축소되고 소련의 이데올로기를 찬양하는 러시아곡이 주를 이루기도 했지만, 행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현재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공식국가로 불리는 노래는 소련 시절에 금지되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부를 수 없었다. 하지만 리디아 코이둘라라는 에스토니아의 민족시인이 창작한 시에 구스타프 에르네삭스가 곡을 붙인 제2의 국가격인 노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은 언제나 피날레를 장식하며 에스토니아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 노래가 가지고 있는 파급력을 두려워 한 소련은 1960년에 열린 라울루피두에서 그 노래를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 그러나 행사가 끝날 때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의 조국, 나의 사랑>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 노래를 작곡했던 구스타프 에르네삭스가 지휘대에 올라 그 노래를 지휘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소련 정부 역시 이 행사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편이었다. 1980년 열린 라울루피두는 모스크바 올림픽을 축하하는 기념행사로 지정되었을 정도니까.

노래는 이렇듯 정치·사회적 압박 속에서도 거대한 바위 아래를 흐르는 맑은 지하수처럼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민족 정신을 꾸준히 지켜주었다. 라울루피두는 그 지하수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 행사는 인근 국가인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까지 전파되어 발트3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노래로 지킨 에스토니아 민족정신... '노래하는 혁명' 가능하게 해

 7월 4일부터 6일까지 열린 에스토니아의 대합창제, 라울루피두(Laulupidu)
7월 4일부터 6일까지 열린 에스토니아의 대합창제, 라울루피두(Laulupidu) ⓒ 서진석

에스토니아인들은 노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을까? 이것을 통계나 수치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올해 '노래에 미친 사람들' 틈에서 아주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행사가 열리는 일요일, 시내 교통은 거의 차단되었다. 라울루피두가 열리는 장소로 가는 버스는 온통 사람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난데없이 바깥 온도마저 20도 이상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시민들로 꽉꽉 들어찬 버스 내부는 불쾌지수가 최고조에 달할 정도였다.

느낌에, 정원의 2배 이상 탄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의 선창으로 버스는 난데없이 합창의 무대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찜통 같은 버스 속에서 화음을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아직 행사장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질곡의 역사를 노래로 승화시킨 그들의 정서와 감정을 한껏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합창에 대한 에스토니아인들의 애정은 각별하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백화점이나 술집은 없어도 같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은 있을 정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라도 합창단이 결성되고 노래판이 펼쳐진다.

라울루피두를 처음 보는 사람은 당연히 그 규모에 놀라기 마련이다. 합창도 합창이지만, 북한의 아리랑 매스게임 공연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춤꾼들을 보면 얼마나 피나는 연습을 해야했을까 하는 경외감 마저 든다.

하지만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엄청나게 피나는 연습을 하지는 않는다. 에스토니아는 지역, 단체별로 민요와 전통춤을 익히는 모임이 존재하는데, 라울루피두가 열리기 몇 개월 전 합창의 곡명과 무용의 안무가 결정되고 각각의 모임으로 전달되어 자체적으로 연습을 하게 된다.

라울루피두에 참가하려면 지역마다 열리는 최종 오디션을 통과해야 하는데 내가 듣기로는 그 조건이 상당히 까다롭다. 오디션을 통과한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연습을 하다가 행사가 열리기 며칠 전, 전체 단원들이 무대에 올라 몇 차례 총연습을 하게 된다. 합창의 경우는 지휘자의 지휘에 맞추어 몇 차례, 무용은 그보다 조금 더 긴 일주일 정도를 한꺼번에 모여 연습하는 것이 전부다. 올해 1월부터 공식적으로 이번 축제를 준비하기 위한 공연은 전국에서 총 704회 열린 것으로 집계되었다.

백화점이나 술집은 없어도 '야외무대'는 있는 나라

 수만 명에게 식사를 동시에 공급하는 주방 풍경
수만 명에게 식사를 동시에 공급하는 주방 풍경 ⓒ 서진석

올해는 합창에 총 3만485명, 무용에 9188명이 참가했다, 합창 참가자 중 만 명은 청소년, 어린이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남자는 3분의 1 정도이다. 나이대도 다양하다. 가장 어린 참가자는 6살, 가장 연장자는 무려 97살이다. 게다가 해외에서 온 참가자들도 있었는데, 특히 에스토니아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동양인들도 반주나 직접 합창에 참여하여 화제가 되었다.

이런 규모다 보니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 한 번쯤은 라울루피두 무대에 서본 경험이 있을 정도이다. 합창단원으로 선발된 이들은 공연 참가를 위해 사업도 잠시 접어두고 라울루피두에 매진한다.

이번 행사를 위해 필요한 예산은 모두 300만 유로(약 42억 원)가 책정되었다. 대략 반 정도가 정부의 지원으로 해결되며, 나머지는 대기업 후원과 입장권 판매요금으로 충당된다. 예산은 각 지역을 대표하는 민속의상 제작, 숙식 및 숙박 지원, 연습에 필요한 비용지원 등 참가자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대략 130만 유로, 나머지는 행사 기획, 안무, 창작비용, 저작권료 등 부대시설 등에 사용된다.

7만여 명이 관람하는 대합창공연은 총 2차례, 2만여 명이 관람하는 대무용공연은 총 3차례 열리는 만큼 관람객들의 입장권 수익으로만 따져보아도 필요한 예산을 준비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탈린에 사는 참가자들이라면 자기들 집에서 다니면 되니 숙식 문제가 없지만, 지역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탈린 시내 50여개 학교에서 단체생활을 한다. 학교 교실이나 강당을 비워서 딱딱한 바닥 위에서 매트리스를 깔고 자는 식이지만 대부분의 공연단원은 이 축제를 몇 번 이상 참가했기 때문에 다리미, 옷수선 장비, 구급약 같은 단체생활에 필요한 물건들도 완벽하게 준비된다.

사람들이 체류하는 동안 먹게 될 음식 역시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올해부터는 특별히 행사장 뒤편에 따로 단체급식소를 마련했는데 그곳에서 4만여명의 참가자들과 자원봉사자, 임원들을 위한 식사를 제공했다. 이들이 총연습과 본행사 기간 중 먹은 빵의 양은 총 7톤, 그들에게 배급된 수프의 양은 50톤, 전부 7만 그릇의 수프가 준비되었다.

전국 각지의 노래와 춤, 음식과 사람이 만나는 화합의 장

 7월 4일부터 6일까지 열린 에스토니아의 대합창제, 라울루피두(Laulupidu)
7월 4일부터 6일까지 열린 에스토니아의 대합창제, 라울루피두(Laulupidu) ⓒ 서진석

수만 명이 모이는 곳이다보니 경찰, 의료진, 자원봉사자들도 총 동원된다. 가끔 미아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잠시 보호자의 손을 벗어난 아이들은 무대 한구석에 마련된 에스토니아 유명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을 모티브로 한 로테마 공원에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 무더위와 강행군 일정에 지친 사람들을 위해 의료봉사팀은 행사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행사가 끝날 때까지 경찰을 찾은 사람은 분실물로 인한 신고 정도였을 뿐 범죄 사건은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미아 역시 모두 보호자를 바로 만났다. 본인도 취재를 위해서 정식 기자증을 발급받았으나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테러 같은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함인지 장소에 따라 까다로운 입장 심사를 받아야 하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무런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 행사는 단순히 노래와 춤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전국 각지의 음식과 특산물, 수공예품 등이 한곳에 모여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에게 소개되어 때로 거대한 시장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지역 간 화합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

에스토니아는 우리나라처럼 무슨 일을 치를 때 경제적 가치를 운운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행사가 가진 금전적 가치에 대한 정보는 나온 것이 없다. 그러나 행사가 열릴 즈음 이것을 보기 위해 탈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 비행기와 호텔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덕분에 식당들도 대호황을 누리는 시너지효과도 얻어진다. 게다가 IT강국이나 구소련독립국이라는 이미지 이외에도 유럽의 주류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이런 문화적 자산이 있는 것만으로도 국격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이 어마어마한 볼거리는 애석하게도 5년에 한 번씩만 열린다. 그러나 다음 행사 전까지 크고 작은 합창제는 많이 열린다. 그리고 이 행사는 에스토니아만이 아닌 주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도 열리는데 라트비아 행사는 2018년으로 잡혀 있고, 리투아니아는 공교롭게 올해 에스토니아와 같은 때에 동시에 대합창제가 열렸다.

특히 5년 뒤 2019년에 열리는 라울루피두는 첫 행사가 열린 지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보니 더 성대한 축제가 예상된다. 그 무렵 유럽여행을 꿈꾸는 사람은 희망 일정에 넣어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에스토니아#라울루피두#합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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