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저녁, 기분 좋은 목요일 퇴근길에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회사를 나선 직후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에 받은 전화는 나에게 충격적인 내용을 전했다. 아버지가 심각한 뇌출혈 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지금 당장 수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드님이시죠? 수술하려면 보호자 동의가 필요해서요. 지금 오실 수 있나요?"담당 의사의 말로는 바로 수술하지 않으면 당장 오늘 밤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이미 머릿속에서 출혈이 상당히 진행되어 오늘 어느 순간에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 "바로 수술하지 않으면..."
그 말을 듣는 순간 온 세상이 멈춘 듯했다. 깜빡이던 신호등 녹색 불빛도, 내 곁을 스쳐 먼저 횡단보도를 건너간 사람들도, 날아가던 새들도, 다가오는 차들까지도 모든 것이 움직임을 멈춘 채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이윽고 눈 앞이 캄캄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 듯 멍해졌다.
"아… 네. 거기가 어느 병원이라고 했죠?"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목소리를 짜내듯이 간신히 대답했다. 대구의 어느 병원 응급실이라고 위치를 듣자마자 나는 전화를 끊고 달렸다. 일단 회사앞 역에서 지하철에 올라타고 가장 빠른 노선을 스마트폰 어플로 검색했다. 그리고 영등포 인근에서 서울역까지 한 번의 환승 끝에 공항철도를 타고 20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하철을 내려서도 계속 달려서 매표소에 도착한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동대구역 KTX 가장 빠른 걸로 주세요"를 외쳤다. 숨이 차올라서 한 문장을 몇 번이나 끊어서 말했는지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다.
땀에 옷이 다 젖은 상태인 나를 보고 역무원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명이시죠?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가벼운 말로 대답했다. 업무적이고도 일상적인 그 말투가, 필사적으로 다급한 나로서는 한순간이지만 괜시리 부럽다고 느꼈다.
4분 뒤에 출발하는 열차라는 말에 나는 또 뛰기 시작했다. 11번 게이트를 찾고 계단을 두세 칸씩 딛으며 넘어질 뻔하면서 기차에 겨우 올라탔다. 서울역에서 출발한 시각이 오후 6시 40분. 예정대로라면 1시간 50분 뒤에는 동대구역에 도착할 것이고, 병원까지는 택시로 10분 안에 도착 가능할 것이라고 계산할 수 있었다. 내가 빠르게 갈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노선이었다.
기차 안에서 겨우 숨을 고르는 사이에 또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이번에도 병원의 의사였다. 수술이 급한데 언제쯤 도착하느냐고 재촉하는 전화였다. 나는 지금 서울에서 출발해서 최대한 빨리 병원에 가겠다고 대답했다. 마음같아선 날개를 달고 날아서 가고 싶지만 이미 오른 열차 위에서 발만 구를 뿐이었다. 흐르던 땀이 말라가니 이제는 눈물이 핑 돌았다.
순간 머릿속에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평소 혈압 상태가 좋지 않아서 몇 년째 약을 드시던 아버지, 지난 주에 머리가 며칠째 아프시다며 무거운 목소리로 전화가 왔던 것, 그리고 오늘 갑작스러운 수술 소식까지. 며칠 전에 전화가 왔을 때 진작 병원에 얼른 가보시라고 권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며칠을 더 버티면서 고집을 피우셨던 것이다.
그리고 기차가 운행되는 동안의 어색한 정적을 따라온 불안함과 초조함이 열차를 타고 가는 내내 곁을 맴돌았다. 10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느꼈던 불길한 예감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장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억누르고 삼켰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눈을 질끈 감고서 내 예감이 빗나가기를 빌고 또 빌었다.
2시간여의 수술, 아버지의 멍한 표정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아버지를 찾아다녔다. 침대에 누운 피투성이인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빠르게 훑으면서 점점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른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무리 봐도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심장 뛰는 소리와 함께 불안함이 더 커져갔다. 그리고 멀리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이동식 침대 하나를 목격했다. 그 위에 누운 사람의 모습이 슬프게도 낯이 익었다.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그야말로 드라마의 한 장면같은 순간이었다. 내가 응급실에 막 도착한 순간에 아버지는 수술실로 향하다니. 내가 이런 상황을 겪게 될 줄은 미처 생각해 보지도 못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엘레베이터를 멈춰세우고 달려가서 아버지의 손을 감싸쥐었다. 맞잡은 손이 아직 따스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놀랬제? 큰 수술 아닐끼다. 괜찮으니까 걱정말그라."내가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내게 걱정말라고 다독였다. 내가 아버지에게 하려던, 그리고 해야 할 말이었다. 그리고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의료진은 "수술이 급합니다"라고 말하며 수술실로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멍한 표정의 나를 세워두고 엘리베이터 문이 굳게 닫혔다.
3층의 수술실 앞을 찾아가니 수술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다. 대형 벽걸이 TV옆에 걸린 모니터에 '수술중' 환자 목록에 아버지 이름이 보였다. 모니터 오른쪽의 '회복중' 목록에 아버지의 이름이 옮겨지기 전까지, 수술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아버지가 무사하기를 빌었다. 두 시간이 이틀처럼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수술이 끝나고 아버지가 병실로 옮겨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의 입원 수속을 밟고 신경외과 병동으로 따라올라간 나는 병실 안의 분위기에 기가 눌렸다. 모두 머리에 큰 흉터를 새기고서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환자는 머리를 다쳐서 간호사가 몇 번을 물어봐도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다른 침대에선 사고를 당한 듯 보이는 중년 남성이 난데없이 허공에 욕을 하며 마늘을 마저 팔러 가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옆에선 그의 아내로 보이는 여성이 "마늘은 이제 다 팔았잖아. 정신 좀 차려, 제발"하고 흐느끼며 울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의식이 돌아왔다. 눈을 뜨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그 모습이 병실의 주변 풍경과 묘하게 조화되기 시작했다. '설마 아버지도 이제 거동을 못하고 기억을 잃게 되는 건가' 하는 걱정이 삼켰던 울음과 함께 터져나올 것 같았다. 아버지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발, 제발 최악의 상태만은 아니어야 한다고 속으로 계속 되뇌이며 아버지의 시야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순간, 초점 없는 눈동자가 내 쪽으로 움직였다.
4일 만에 퇴원한 아버지"수술은 내일 아침에 하려나 보다…?"깨어난 아버지가 멍한 표정으로 내게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나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웃으면서 "아니에요, 수술 잘 끝났어요"하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이 "벌써?"하고 되물었다. 또박또박, 말하는 것이 전과 다름 없었다. 수술이 끝난지도 모르는 아버지에게 무사히 잘 끝났다고 대답하면서 나는 그제서야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날 밤부터 나는 병실에서 아버지의 곁을 지키며 간호를 시작했다. 수술하느라 삽입해 놓은 배변통을 비우고, 아버지가 목마르다고 하시면 물을 떠다 드렸다. 식사 시간엔 밥을 가져와서 먹을 수 있도록 해드렸고, 다 드시면 빈 그릇을 치우는 일도 내 몫이었다. 아버지가 화장실에 갈 때 부축하고 수액이 주렁주렁 달린 수액걸이를 끌고 다니는 것도 내가 맡아서 했다.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순간에 잘 대처하려고 하다 보니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다만 밤마다 아버지를 먼저 재우고 조그마한 보호자용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누울 때면, 아버지가 어린 나를 키우면서 겪었을 이런저런 일들이 떠올라서 괜히 가슴 한편이 찡해지곤 했다. 나는 고작 며칠 병수발을 했을 뿐인데, 아버지는 나를 보살피느라 이런 고생을 수십 년간 해오셨을 터였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내가 평생 옆에서 지켜본 아버지는, 늘 자상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수십 년간 안경 가게 일을 하시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그랬다. 그래서 늘 인자한 웃음을 띠고 살아오셨기에 얼굴에 패인 주름이 근사하다고 느껴진 적도 있다. 내가 바보같이 착하다는 소릴 들었던 것도, 돌이켜보면 고지식할 정도로 정직하다는 평을 주위에서 듣는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는 병원에 일찍 이송된 덕분에 수술 후 경과가 매우 좋았다. 머릿속에 고인 피를 빼내느라 삽입해 놓은 실리콘 튜브로 이틀 동안 100ml 이상의 혈액이 제거됐다. 혈색도 더 좋아졌고 그동안 아버지를 괴롭혔던 두통도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뇌출혈로 수술을 했는데도 혼자서 화장실을 다닐 정도로 몸상태가 좋았고 기억상실이나 언어장애같은 문제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기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다행스러운 회복력이었다. 덕분에 아버지는 월요일인 7일에 퇴원할 수 있었다.
아버지, 이젠 아프지 말고 행복하세요
몇 달만에 다시 만난 아버지와 나는 처음엔 울상이었지만 점차 다시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대로 다시 못 볼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거짓말처럼 회복해서 다시 나와 걸어다니고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봄 이후에 이런 일이 있고서야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미안하기도 했다. 마음같아서는 자주 찾아뵙고 싶었지만 현실은 1년에 몇 번 대구에 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서울과 대구는 물리적으로, 아니 사실은 일상에 치여 바쁘다는 핑계로 심리적인 거리가 너무 멀게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뇌출혈은 완쾌되었지만 적은 확률로 다시 재발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과 함께 정기적인 검진을 진단 받았다. 이제는 아버지도 머리가 아플 때면 참지 않고 병원에 찾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나도 이번에, 아버지를 보러 더욱 자주 대구에 오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쪽도 말로만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꼭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아버지가 아프지 않고 앞으로도 오래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싶다. 그것은 나의 아버지라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지켜본 그의 일생이 그럴 만한 삶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평생 나를 포함한 타인을 위해 고생하면서 살아왔다. 가족의 정을 떠나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아도 존경스러운 길을 걸어온 한 남자가, 이제부터라도 즐겁고 편안한 나날을 보내셨으면 한다.
그리고 작은 바람을 하나 더 보태자면, 그 풍경에 내가 웃는 얼굴로 서 있을 수 있었으면 싶다. 지금까지 30년간 그래왔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