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치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정치를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하던 사람들마저도 빠져들 만큼 잘 만들어진 수작이기 때문일까.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제작사인 넷플릭스는 2013년 1분기에만 300만 명의 가입자가 새로 늘고, 37억 5천만 달러(3조8000억원)라는 회사 설립 이후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하우스 오브 카드>는 TV가 아닌 온라인 드라마 시리즈다. 미국에서는 피시나 태블릿 피시, 스마트폰 등으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청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에 넷플릭스는 두 번째 시즌 방영과 동시에 시즌2의 흥행 여부와 무관하게 시즌3를 제작하겠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 시리즈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까지 스스로 애청자임을 밝힐 정도로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하우스 오브 카드>는 <파이트클럽> <소셜 네트워크>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등 영상미와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으로 영화계에서 천재 감독으로 불리던 데이비드 핀처가 연출을 맡았다.
더불어 그의 작품 <세븐>에서 악역을 맡았던 배우 케빈 스페이시가 주연이다. 그 외에도 핀처 감독의 작품에서 조연이나 단역으로 출연했던 연기파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장면들을 감상하는 것도 이 작품의 묘미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익숙한 얼굴이 배역에 적절히 어울리는 것을 보면, 핀처의 인력풀이 얼마나 깊고 풍부한지 실감할 수 있다.
미국 워싱턴 정가를 뒤흔드는 프랭크 언더우드
정치 스릴러를 장르로 한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는 미국의 워싱턴 정가를 배경으로 한다. 백악관과 국회를 분주히 오가며 고군분투하는 민주당 소속 정치인 프랭크 언더우드(케빈 스페이시)가 주인공이고, 그를 둘러싼 많은 정치인과 언론인, 로비스트와 시민들이 등장한다.
서로 얽히고설킨 관계가 언뜻 복잡해 보이지만, 정작 등장인물인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단순하다. 그들이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내 편'과 '적', 그리고 언제든지 이용 가능한 '잠재적 우호관계'로 간편하게 나뉘기 때문이다.
이들은 각자의 이권을 위해 두뇌 싸움을 벌이고, 함정을 파고, 궁지에 몰리면 가차없이 상대를 배신하고 뒤통수를 친다. 곁에 있을 때는 함께 웃고 악수를 나누며 '의리'를 외치지만, 뒤돌아서면 조롱과 비수를 준비하고서 빈틈을 노린다. 드라마가 그려내는 정치판은 한 치의 어설픈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야생의 초원같은 공간이다. 상대를 잡아먹지 않으면 곧 먹히는 먹이사슬이 유일한 법체계인 세계다.
첫 번째 시즌은 새로운 민주당 대통령의 임기와 함께 시작한다. 대통령의 당선을 곁에서 도왔던 프랭크는 선거캠프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국무부장관 임명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집권 이후 대통령이 이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고 하면서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된다. 결국 프랭크는 피의 복수를 다짐한다. 자신의 지략과 인력을 총동원하여 대통령을 비롯한 주변인물을 차례로 하나씩 공략하면서 끌어내리기로 계획하고 이를 실행한다.
이 과정에서 제각각의 야심을 채우려는 인물들이 각자의 욕망을 충족하고자 뛰어든다. 프랭크는 이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듯 속을 꿰뚫고 이용한다. 돈이든 정보든, 적절하게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듯하다가 이내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폐기처분한다.
그 무엇도 프랭크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 권력의 정점에 올라선 그의 손에는 피가 잔뜩 묻어있을지언정, 자신의 등뒤에 칼을 꽂으려는 사람은 결코 성하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근엄한 분위기로 권좌에 앉은 프랭크의 모습이 담긴 드라마의 포스터는 등장인물의 성격과 관계를 한 장의 사진으로 압축해 놓은 듯하다.
정치판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하우스 오브 카드><뉴스룸> 시리즈를 제작한 아론 소킨의 <웨스트 윙(1999~2006)>을 기억하는가? 총 7시즌까지 제작된 이 드라마는 백악관의 대통령과 참모진이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며 탁월한 팀플레이로 멋지게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을 담았다. 정권의 안위보다 국가와 국민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 이는 마치 '우리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를 브라운관에 그려내려고 노력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우스 오브 카드>는 다르다.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카드로 만든 집에서 서로가 '신의 한 수'를 쥐고 있다고 여기며 각자의 숨통을 노리는 모양새가 드라마의 핵심이다. 주인공 프랭크를 비롯한 드라마 속의 많은 정치인과 언론인에게 '진실'과 '정의'는 선거철에 꺼내드는 피켓에나 쓸 정도의 유용함을 지닌 단어에 불과하다.
모두가 점잖게 정장을 입고 근엄한 표정으로 침착한 척 하지만, 사실은 타인을 짓누르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 아비규환일 뿐이다. <웨스트 윙>과는 정반대로, <하우스 오브 카드>는 우리가 애써 눈돌려 외면하던 정치판의 잔인한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셈이다. 드라마의 포스터에 그려진 '거꾸로 뒤집힌 미국 국기'처럼, 마치 실제 정치판은 우리의 기대와는 정반대라는 듯이.
유권자의 애타는 민심? 권력의 정점에 오른 프랭크는 애초에 그런 것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냉소하며 무시한다. 다만 언론의 카메라가 비추고 누군가가 지켜보는 앞에서는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공감하는 척 할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뉴스에 나오고 이미지가 지켜지니, 20년째 정당에서 굵직한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며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다. '정치, 그거 알고 보면 참 별 거 아니다'하는 식이랄까.
프랭크는 체스판에서 말을 옮기듯이 인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누가 희생되더라도 아무런 미련없이 털고 다음 수를 계산한다. '정치 스릴러'라는 장르명이 아깝지 않다. 이런 인물이 정치판에서 국가의 앞날을 좌우할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니, 상상만으로도 무서울 지경이다.
한국 정치 현실은 위태로운 '하우스 오브 수첩'오바마 대통령은 IT기업 대표단을 만나는 공식석상에서 "실제 백악관도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처럼 무자비하지만 효율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라고 농담 반 진담 반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주인공이 보여주는 화끈하고 뒤끝 없는 일처리는 일견 한 나라의 대통령마저 감탄하게 만들 정도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정작 <하우스 오브 카드>의 현실화가 필요한 것은 미국의 백악관이 아니라 한국의 청와대인지도 모른다. 임기가 시작되고 2년도 채 되지 않아 레임덕이 거론될 정도로 지지율이 흔들리는 박근혜 대통령을 보면 드라마 속의 정치판보다 더 처참하다. 정책적 무능과 불통의 수첩인사가 정권의 국정 지지도를 깎아내리는 악재를 불러왔고, '프랭크 언더우드' 없이도 이미 스스로 무너지고 있다.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차라리 드라마가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미국 순방 중에 인턴 성추행 의혹을 받으며 물러난 후 '칩거' 중인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연이은 인사 파동의 시작이었다. 과거 한나라당 시절 이른바 '차떼기 사건'에 연루되었던 이병기씨가 국정원장에 임명되었고, 음주운전 전력과 각종 비리의혹으로 결국 자진사퇴한 정성근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도 있다. '전관 예우' 파문으로 셀프 낙마한 안대희, "식민지배와 분단은 하느님의 뜻" 발언으로 논란이 되어 사퇴한 문창극, 두 명의 총리후보는 수첩인사 논란의 절정이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무색하게 '인사가 참사'가 되어 버렸다. 이쯤 되면 '하우스 오브 카드'가 아니라 '하우스 오브 수첩'이라고 부를 만하지 않을까. 자질부족과 도덕성 논란으로 인사청문보고서 채택이 무산된 김명수 후보를 대신해 임기가 막 끝난 황우여 전 새누리당 대표를 교육부장관 겸 사회부총리 후보로 지명한 것을 두고는 "수첩의 마지막 장이 넘어가니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가는가"하는 탄식마저 들려온다.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는 '온건한 중도파'의 이미지로 당선된 대통령이 맡은 분야에서 정책을 책임지고 이끌 인재를 장관 등의 인사로 기용한다. 그들을 권모술수로 끌어내리는 프랭크는 단지 자신에게 거슬리는 인물이라는 이유만으로 복수극을 펼칠 따름이다.
그런데 한국의 박근혜 정부가 지명한 인사들은, 전문성과 도덕성은 제쳐두고 '친박'이라는 키워드만으로 인사를 하다 보니 끝내 본인들이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사퇴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정치 스릴러'가 아닌 '정치 코미디'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과 청문회 방식을 탓하면서 자기정당화를 하는 것은 불통의 재확인에 불과하다.
지난 14일 열린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는 '친박'의원들을 제치고 비박계로 분류되던 김무성 의원이 1만 표가 넘는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며 대표로 선출됐다. 이 결과는 최근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는 대통령에 대해 집권 여당 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거세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대통령의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는 정치인이 당권을 쥐게 되는,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의 낯익은 풍경이 박근혜 집권 2년차에 현실이 되었다.
박근혜 정부가 히든카드로 꺼내든 '내각 2기'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웨스트 윙>과 무자비하지만 효율적인 <하우스 오브 카드> 중 어느 쪽도 아닌, 외딴 종착역으로 추락하는 모양새가 되어가고 있다. 성공적인 개각을 위해, 이제는 수첩을 덮고 소통을 해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