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이 이어진 정동길은 정다운 돌담길 외에도 미술관, 공연장, 근대시절의 건축물 등이 길섶에 있어서 도시 산책 장소나 약속 삼아 때마다 찾아가게 되는 곳이다. 길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수십 년에서 수백 년 된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건축물들이 길을 따라 이어진다. 정동길 들머리인 덕수궁의 정문 대한문에서 매일 열리는 흥미로운 왕궁 수문장 교대식도 구경할 수 있다(수문장 교대 의식은 매일 오전 11시, 오후 2시, 3시 30분에 시작되며 월요일은 쉰다).
이렇게 여러 명소가 많은 정동길을 찾아갔다가 꼭 들러 잠시 쉬어가는 나만의 비밀스런 장소가 있다. 정동길 한복판에서 100년 넘게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쳐 온 정동제일교회다. 언제가도 늘 문이 열려 있는 데다 나무 그늘이 진 작은 벤치에 앉으면 바로 앞에 고풍스러운 옛 예배당(벧엘 예배당)이 마치 큰 그림처럼 마주하고 서 있어 이채로운 기분이 든다.
명동성당처럼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한 첨탑도, 근처의 성공회 대성당처럼 고풍스러운 분위기도 없지만 붉은 벽돌의 소박한 외관이 어릴 적 친구들과 다녔던 동네 교회처럼 친근하다. 정동길의 도로와 보행로에서 교회 안마당으로 살짝 들어왔을 뿐인데 도시의 소음이 잦아들어 신기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소박한 아름다움이 좋은 예배당
정동제일교회는 기자처럼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도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 건축미와 근현대 역사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화려함보다는 고졸(古拙, 오래되고 질박함)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적 건축미가 느껴지는 정동제일교회는 정동길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교회 안마당에는 교회의 100주년 기념탑과 함께 정동제일교회를 세운 아펜젤러와 최초의 한국인 담임 목사였던 최병헌의 흉상이 있다. 미국 감리교단의 선교사로 1885년에 한국 땅을 밟은 아펜젤러는 그해 우리 역사 최초의 서양식 근대 학교인 배재학당을 세웠다.
당시 조선은 기독교 전파 활동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교육 사업을 통해 전도를 했다. 이때 그의 나이가 스물일곱. 푸른 눈의 미국인 청년은 마흔넷의 아까운 나이에 그만 사고로 숨지기까지 우리 근대사에 작지 않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이날도 교회 안마당 벤치에 멀거니 앉아 쉬고 있는데 마침 상하이에서 자매결연을 맺은 노란 단체티를 입은 중국인 신자들이 정동제일교회를 견학삼아 찾아와 옛 예배당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늘 예배당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던 터라 슬쩍 중국 사람들 줄에 끼어들었다. 단체 티 때문에 금방 들통 날 짓이었지만 인솔자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한국인 선교사의 호의로 운 좋게 예배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정동제일교회는 구한말 격동하는 근대 우리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구한말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정동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한 정동길을 따라 일어났다. 1895년 일본인들에 의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졌을 때, 정동제일교회를 일군 초대 담임목사였던 아펜젤러는 이곳에서 황후의 추모 예배를 드렸다.
붉은 벽돌의 옛 예배당은 6·25전쟁 때 건물이 반이나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1897년 완공된 예배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당이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19세기 교회 건물이기도 하다. 처음 예배당을 지었을 때는 얇은 휘장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남성 신도들 혹은 배재학당 남학생이, 다른 한쪽은 여성 신도들 혹은 이화학당 여학생이 따로 마룻바닥에 앉아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학교인 배재학당과 개신교회인 정동제일교회(당시엔 벧엘 교회당)를 세운 선교사 아펜젤러는 우리 근대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다. 정동제일교회는 미국의 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새문안 교회와 더불어 우리나라 개신교회의 양대 기둥을 이루는 교회라고 한다.
격동의 구한말, 한국 근대사의 한복판에 있던 교회
미국, 러시아, 독일 등 서양 열강의 공관이 줄지어 있었던 정동길은 각종 사건과 음모가 판치는 공간이었다. 그 복판에 정동제일교회가 있었고 여기에 나라의 독립을 바라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 망명길에 올랐던 서재필은 귀국한 뒤 정동교회 청년회를 중심으로 협성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는 독립협회의 모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02년 6월 아펜젤러 목사가 선박 충돌 사고로 순직한 이후 목회자로서 교회를 이끌어간 노병선(1902~03)·최병헌(1903~13)·현순(1914~15)·손정도(1915~18)·이필주(1918~19) 목사는 하나같이 개화 개혁운동과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이기도 하였다. 협성회와 독립협회의 활동에 열심이었던 이승만은 정동제일교회의 장로였다. 하지만 모든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결국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정동제일교회에도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이 울렸다. 교인들은 교회 지하실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정동제일교회의 신자이자 바로 옆 이화학당의 학생이었던 열아홉 살 나이의 유관순은 결국 일제의 서대문 형무소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후에도 정동제일교회는 나라의 독립을 소망하는 많은 이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하여 혹자는 정동제일교회를 '붉은 벽돌로 쓴 역사서'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옛 예배당 건물 옆에 있는 큰 현대식 새 예배당에도 들어갔다. 옛 예배당보다 훨씬 큰 건물이지만 외부로 크게 드러나지 않게 지었다. 별을 닮은 지붕을 가진 새 예배당은 겸손하게 엎드린 모습이다. 덕분에 정동제일교회는 그 옛날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고, 정동길은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예배당 건물이 한국건축가협회로부터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악기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옛 예배당에서 처음 들어 보게 되었다. 장엄하면서도 고요하고 부드러운 음색과 울림이 좋았던 금빛 파이프 오르간은 우리나라 최초로 정동제일교회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견학 온 중국인 단체 신자들이 파이프 오르간에 맞추어 (중국말로) 성가를 불렀는데, 무척 이채로웠다.
마음을 다해 합창을 하는 중국인 신자들의 모습을 보니 태초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했던 신앙심은 이념으로도 어쩔 수 없구나 싶었다. 파이프 오르간 또한 6·25전쟁 때 그만 파손되어 후일 전자식 파이프 오르간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일요일에 하는 주일 예배에 참석하면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들을 수 있단다.
빛바랜 붉은 벽돌, 야트막한 지붕, 최소한의 장식으로 마무리한 창문··· 3층 높이의 종탑도 뾰족하지 않은 평탑 형식(고딕 양식)이어서 위압적이지 않고 아담하고 담백한 느낌이 좋았다. 안내판엔 이런 건축 양식을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전원풍 고딕 양식'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더불어 정동제일교회가 어엿한 국가 지정 문화재(1977년 사적 제256호로 지정)란 것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정동을 오가는 이들에게 늘 열려 있는 정동길의 상징 정동제일교회. 다음 번에 이곳에 오게 되면 전과는 다른 시선과 감흥으로 교회와 정동길을 대하게 될 듯 싶다.
덧붙이는 글 | 지난 7월 4일에 다녀 왔습니다. 위치 : 시청역 1번, 12번 출구로 나와 덕수궁 돌담길 - 정동극장 건너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