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월정사오대산 월정사는 나와 인연이 깊다. 대학시절 스승이었던 조동탁(조지훈) 선생께서 일제강점기인 젊은 날 이곳에서 한때 지내셨다는 말씀을 들은 탓인지, 왠지 절 분위기가 그윽하고 정감이 갔다. 게다가 오대산 언저리는 산수가 아주 빼어난 곳이다. 그래서 나의 첫 장편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 첫 장면을 이곳으로 정했다.
이 작품은 1970년대 초 청춘남녀가 버스를 타고 강릉을 가던 중 폭설이 내려 대관령을 넘지 못해 진부에서 머물게 되자 이들이 달밤에 산사를 찾아가게 설정했다. 나는 1990년대 초 그 대목을 집필할 때 진짜로 폭설이 내린 날을 골라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과 월정사 선방에서 1박한 뒤 이튿날 새벽 예불에도 참석하면서 그 분위기를 그대로 입력시켰다.
새벽 예불을 마친 뒤 선방으로 돌아오자 다시 졸려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일어나 보니 바깥이 훤했다. 주지 스님에게 인사를 한 뒤 공양간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이미 공양시간이 끝난 뒤였다. 아들과 함께 아침도 굶은 채 눈길을 터덜터덜 걸으며 당시 버스종점인 매표소에 이르자 한 밥집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났다.
어느 해 겨울 아침밥집 문을 열며 식사가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운 가운데 주인인 듯한 분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문을 닫고 돌아서려는데 "들어오시오"했다. 우리 부자는 식당 한 구석 자리로 안내됐는데, 그날 그곳을 메운 이들은 가족들로 주인 영감생일을 축하하고자 멀리서 온 듯했다.
그날 아침 모처럼 가족끼리 아침을 막고 있는데, 이른 시간 눈길에 찾아온 손님을 보낸 게 안 됐던지 다시 부른 모양이었다. 그날 우리 부자는 된장찌개를 주문하여 먹었는데 쇠고기불고기도 두어 점, 잡채도 한 쟁반 덤으로 먹었다.
그래서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그 밥집이 생각이 났고, 매번 가면 특히 산채비빔밥, 산채백반, 산채정식, 그리고 겨울철에는 청국장백반이 일품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이나 친지들과 같이 가서 취향대로 주문하여 먹으면 모두들 산나물 맛과 향취에 감탄했다. 주방장인 할머니에게 그 비법을 물었다.
"우리 내외가 이곳에 밥집을 시작한 지 40년이 넘었소. 우리 영감은 오대산 골짝골짝 산나물이 어디에 있는지 자기만 알고 뜯어오지요. 그래서 그 나물을 내가 다듬어 삶고 말려두고 일 년 내도록 쓰지요."오대산 진품 산나물곧 재료가 좋고 바로 오대산에서 나는 진품 산나물이기에 그럴 거라고 했다. 지난 목요일 이곳을 찾아 산채 정식을 주문하자 평소와 같이 20여 개의 반찬에 산나물만 16가지가 나왔다. 호기심이 많은 내가 묻자 할머니가 하나하나 일러주었다.
사진에서 1열 오른편 윗줄 4번째부터 밤나물, 곰취장아찌, 전우, 취나물이라고 했다. 2열 풋고추절임(그 왼편 더덕구이), 우산나물, 비름나물, 동이나물 3열 곤드레, 잔디나물, 명이, 방품나물, 4열 샐로리장아찌, 곰취, 밤나물, 나물취라고 했다.
영감님 존함은 정희도(88)요, 당신은 김종숙(75)이라고 했다. 주말이나 주문이 많은 날은 아래 마을에 사는 아들내외가 도와준다고 했다.
"언제까지 하실 거예요?""우리 영감 죽을 때까지 할 거래요. 내가 이 밥집을 하는 건 운동에 좋기 때문이래요."말년의 큰 복본토 강원도 사투리를 들었다. 이날따라 내가 다른 날과는 달리 사진도 찍고 이것저것을 묻자 무슨 눈치를 채셨는지 밥값을 내자 굳이 받지 않겠다고 했다.
"저도 이제 갈 날이 멀지 않았기에 글 공덕 나왔습니다. 주머니에 돈을 두고도 공밥 얻어먹고 가면 안 되지요."
할머니는 평생을 절 가까이 사신 탓으로 금세 말귀를 알아들으시고는 두 손으로 감사히 받으셨다.
나는 이미 조상 네 분을 월정사 지장암 옆 수목장에 모셨고, 나 또한 그곳으로 가겠다고 아이들에게 유언한 바 있다.
곁에 있는 영감님에게 작별 인사 겸 한 마디 했다.
"그 나이에도 마나님 밥 잡수셔서 큰 복 받으셨습니다.""나도 그렇게 생각해요."영감님이 문을 잡고 손을 흔들었다.
"잘 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