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도망간 노예를 쫓는 드라마 <추노>가 인기를 끌었다. '추노'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조선 성종 때 활동했던 최부(崔溥:1454~1504)다.
최부를 알려면 우선 그의 '표해록'(漂海錄)을 알아야 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하멜 표류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표해록을 아는 이는 드물다.
'바다를 표류한 기록'이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최부가 제주도에서 육지로 오던 길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중국 저지앙성 닝하이(寧海)에 도착하여 갖은 고초를 겪은 후 조선에 돌아오기까지 기록을 담은 여행기다. 표해록은 '세계 3대 중국여행기'로 꼽힌다.
그 최부의 관직이 재밌다. 바로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인데 도망간 범죄인을 잡는 게 업무다. 이 중에는 노비도 포함되어 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최부는 1477년(성종 8) 진사에 급제하고, 148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아원(亞元:장원 다음)으로 급제해 1487년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의 임무를 띠고 제주도에 갔다. 경차관은 조선시대 수시로 특수임무를 띠고 각 도에 파견된 특명관인데 3~5품에서 임명됐다. 1487년에 최부의 나이가 33살이었으니 상당한 수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부는 제주도에 부임한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급한 마음으로 포구에 가지만 날씨가 흐려서 배가 뜰 수 없었다. 하지만 하관 전에 부친을 봐야한다는 마음에 출항을 독려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난다. 결국 모든 원망은 최부에게 돌아오고, 이들은 거친 풍랑 속에서 헤매다가 한 바닷가에 닿는다. 바로 저지앙성의 닝하이다. 제주와 닝하이는 직선거리로도 700킬로미터이니 이들이 얼마나 힘들게 표류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제주에서 닝하이까지 표류한 최부
하지만 육지에 도착해서도 곤욕을 치러야 했다. 중국인들은 이들을 해적으로 알아보고 물건을 빼앗는 것은 물론이고 온갖 고초를 주었다. 다행히 닝보(寧波)에서는 그가 필담(筆談)을 할 수 있어 누명을 벗는 한편 대우를 받으면서 항저우, 베이징을 거쳐서 조선에 돌아온다. 그리고 최부는 왕의 명으로 그 표류의 기록을 적는데 그 책이 바로 표해록이다.
이 책을 읽으면 최부가 얼마나 꼼꼼한 기록자인지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당시 중국 연안의 해로(海路), 기후, 산천, 도로, 관부(官府), 풍속, 민요 등이 잘 소개되었으며, 특히 수차(水車:踏車)의 제작과 이용법도 있다. 이를 바탕으로 최부는 충청도 지방의 가뭄 때 수차를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부의 인생은 그리 평탄치 못했다. 성종의 뒤를 이어 연산군(1494년~1506년)이 즉위한다.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와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엄숙의(嚴叔儀), 정숙의(鄭叔儀)는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를 합심해서 폐출시키고, 사약을 받게 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사림파들이 중앙으로 진출한다. 이런 여파로 최부는 연산군 2년(1496년)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으로 제수된다. 사간은 왕에게 충고를 담당하는 언론의 역할이다. 때문에 다음 해 최부는 왕에게 오락을 멀리하는 것 등의 5가지를 상소하는 등 비판에도 힘쓴다.
그런데 연산군이 어머니에 관한 비밀을 알고 피의 향연이 벌어진다. 사건의 발단은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최부도 무사할 수 없었다. 결국 1504년 갑자사화 와중에 최부는 희생된다.
중국의 위대한 여행가들
중국에도 위대한 여행가들이 많다. 필자에게 꼽으라면 서하객(徐霞客, 1586 ~ 1641)과 왕양명(王陽明 1472 ~ 1529)을 들고 싶다. 서하객은 중국에서 여행가의 대명사인데, 재미있는 것은 그의 여행기가 자신은 존재도 알지도 못한 타성받이 친아들에 의해 정리됐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4대 사화에 버금가는 정치적 사건인 동림당 사건(명말 동림당東林黨을 중심으로 개혁파 정치가들이 중앙에서 활동하려다가 환관 위충현의 세력에게 좌절되는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서하객은 세상을 주유하고 기록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의 여행지는 동서남북으로 현 중국 대륙의 상당수를 포함하고 있다. 교통이 좋지 않았고, 언어도 차이가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곤란을 겪었다.
그의 여행기는 자칫 동림당 사건의 후화로 모두 잃어버릴 처지에 놓였다. 그런데 그가 잠시 만났다가 헤어진 첩이 낳은 아들 이기(李寄)가 필사적으로 그의 기록을 모아서 10분의 1정도가 남겨졌는데 그것만으로도 중국 최고의 여행가로 꼽힌다.
반면에 왕양명은 여행가가 아닌 군인으로 중국을 주유했다. 철학자이자, 사상가이자, 교육자였던 왕양명은 중국 남부 대부분을 다녔다고 할 만큼 넓은 영역을 다녔다. 그의 칼에는 수만 백성의 피가 묻었기에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경험을 바탕으로 독특한 사상을 만들어냈다.
그 뒤를 잇는 여행자로 강희제를 꼽을 수 있다. 강옹건 시대의 초석을 닦은 강희제(康熙帝, 1654.5.4 ~ 1722.12.20)는 중국 역사상 가장 활동 범위가 넓은 황제로 중국 곳곳에 그의 흔적이 쌓여있다. 황제의 방문은 단순한 감시의 영역을 넘어서 각 지역과의 소통의 의미까지 담고 있기 때문에 그의 행보는 놀랍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특히 반청복명의 기운이 팽배한 시대에 중국 전역을 다니면서 닦은 기반이어서 더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최부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에서 남긴 여행기도 만만치 않다. 우선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은 중국을 넘어선 위대한 여행기로 인정받고 있으며,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중국에서 출간되어 연구에 활용될 만큼 좋은 여행기다.
최부가 그러했듯 박지원 역시 필담으로 중국인들과 교류했다. 열하일기가 담고 있는 내용을 보면 그 깊이나 이해에 놀라게 된다. 특히 저잣거리에 쓰인 글을 읽고 와서 쓴 '호질' 등은 그 양이나 깊이에서 어느 창작 작품보다 뛰어나다. 사실 시대를 불문하고, 국가를 불문하고 통하는 역사나 사고의 깊이는 큰 차이가 없다.
2004년 여행사를 만들고 제일 먼저 기획한 여행이 '고미숙과 떠나는 열하기행'이었다. 한국에 들어와 당시 동숭동에 있던 '수유너머'를 찾아가 여행의 취지를 설명하고, 길을 준비할 수 있었다.
욕심때문에 너무 무리한 일정이었지만, 여행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이후에도 몇차례 고미숙 선생과 중국을 같이했다. 그 여행길에 고 선배가 던진 말은 지금도 각인되어 있다. "읽은 후에 스스로가 변화되지 않은 책읽기나 다녀온 후에도 변화가 없는 여행은 진정한 독서나 여행이 아니다"는 말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마찬가지다. 당대 최고의 천재 인문학자였던 연암은 그 연행길을 통해 다시 진정한 지성으로 태어났다. 길이나 책, 모두 고통스러운 인생의 숙제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