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은 다시 버스를 타고 '온수리 성공회성당(溫水里 聖公會聖堂)'으로 갔다. 1906년에 지어진 한옥성당과 나란히 지난 2004년에 새롭게 신축한 성당이 보기 좋게 넓은 터에 자리 잡고 있어 무척 아름다웠다. 옆의 한옥 사택 또한 옛스럽다.
온수리 성당은 서양 교회양식을 적용한 동서 절충식의 목조건물이다. 성 안드레아 성당이라고도 한다. 건축 당시 대한성공회 주교였던 조마가 정면 3칸, 측면 9칸의 규모의 한옥으로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고, 용마루 양 끝에는 연꽃 모양으로 된 곡선미를 살린 돌십자가가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다. 건물 내부는 예배공간인 신랑(身廊)과 측랑(側廊)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루는 성당 남쪽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인데, 중앙 1칸을 2층 종루로 삼은 2층 누각식 외삼문 형식이다.
종루에는 본래 서양식 종이 달려 있었으나 1945년 일제에 징발당한 뒤 1989년 새로 우리나라 전통양식의 종을 제작하여 걸었다. 다른 성당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멋진 솟을 대문 모양의 종루가 아름다운 곳이다. 성당 전체는 지난 2003년 인천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성공회가 강화도에 선교를 시작한 것은 지난 1893년부터이다. 워너신부가 갑곳이에서 소외된 고아들과 노숙인을 양육하면서 교리와 신앙을 전파한 것이 계기가 된다. 강화 선교는 북부의 갑곳이를 중심으로 남부는 1898년 온수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온수리성당은 평신도의 특별헌금과 땅 기부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온수리성당은 다른 교회와는 달리 시작에서 축조까지 평신도의 힘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성당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곳이다.
현재는 2004년 신축된 본당 성당만 사용하고 있었고, 소나무가 너무 멋지고 큰 것이 두어 그루 자리하고 있어 터의 의미를 더욱더 아름답게 하는 듯 보였다. 구 한옥 본당은 박물관이라 기념관으로 개조를 하려고 하는지, 내부 곳곳을 다듬고 수리하는 중이다.
이어 더운 날이라 일과를 빨리 정리하면서 조금은 이른 5시에 강화도의 우측 맨아래에 있는 길상면 동검도에 있는 숙소로 이동했다. 식당과 민박을 겸하는 집에 짐을 풀고는 일부는 씻고 나서 쉬기도 했지만, 나와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사무국장 등은 짐을 두고는 바로 나와서 바닷가로 나갔다.
10여 분 걸어서 가니 멀리 김포도 보이고, 갯벌도 펼쳐져 있었다. 갈대가 많기는 했지만, 곳곳에서 기어 다니는 게들을 보면서 장난을 치며 놀았다. 한 시간 정도 산책과 갯벌 구경을 한 다음 숙소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했다. 간단한 해산물 요리에 국을 먹었다. 나는 식사 후 샤워하고는 좀 쉬었다.
7시부터 강화 덕신고의 김경준 교감 선생이 방문하여 한 시간 반 동안 강화의 고인돌 및 역사, 연산군·철종 등 왕족들의 귀양살이, 고려 후기부터 시작된 강화 800년의 간척사를 들려 주었다.
특히 강화의 간척사는 너무 재미있었다. 강화 땅의 1/3 가량이 간척에 의해 늘어났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강화군 전체는 원래 해안선의 기복이 매우 심한 전형적인 리아스식 지형이었다. 고려말 몽고의 침입 때부터 왕실의 피난처가 돼 온 척박한 강화에서의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간척을 통해 논을 만들었다.
상당히 많은 갯벌을 메워 논을 만들었지만, 현재도 강화에는 넓은 갯벌이 남아있다. 그 이유는 고려 시대부터 간척이 시작되었지만, 당시 기술력이 부족한 관계로 너무나 친환경적이고 또한 천천히 진행된 공사라서 물을 막고 흙을 메우고 땅을 넓히고 논을 만드는 동안 다시 한강과 예성강·임진강에서 떠내려온 부유물이 다시 갯벌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당시의 간척은 요즘보다 속도면에서도 너무 느려 자연파괴도 거의 없었고, 메워진 논에 농사를 짓는데도 10년 이상의 물 내림 공사를 추가로 해야 했기 때문에 요즘 사람들이 봐서는 간척을 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해안선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나는 김경준 선생이 쓴 <철종이야기> 책을 선물로 받고, 서울로 돌아와 읽었다. 천주교 신자였던 철종 임금의 가족사와 조부와 부친의 아픔을 새롭게 알게 되는 등 공부가 많이 되었다.
강의까지 전부 듣고 난 우리는 일부 피곤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강화도에서 생산되는 지역 막걸리 '민족'과 함께 맥주를 한 잔씩 하고는 늦은 시간까지 담소를 나누다가 잠이 들었다. 바닷가에 소재한 시골 마을이라 모기가 다소 날기는 했지만, 별다른 피해 없이 잘 잤다.
늦은 밤까지 술을 한 잔해서 아침 7시를 넘겨 겨우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는 바로 식사를 했다. 생선구이와 된장국을 먹고는 기운을 내에 8시에 '교동도(喬桐島)'로 향했다. 강화도와는 전혀 다른 문화와 역사를 자랑하는 교동도는 초행길이라 무척 설렌다.
교동도는 강화 북서부에 위치하며, 남쪽으로 석모도, 북쪽으로 불과 2~3㎞의 바다를 끼고 황해도 연백군이다. 약간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특히 썰물 때면 도보로도 연백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그래서 북의 민간인들과 군인들이 가끔 저녁에 걸어서 넘어오기도 한다.
예전에는 달을참(達乙斬), 고목근(高木根), 대운도(戴雲島), 고림(高林)이라고도 불렸다. 원래 개화산·율두산·수정산을 중심으로 세 개의 섬으로 되어 있었으니 계속된 육화와 간척 등으로 하나가 되었다. 조선 1395년(태조 4)에 현이 설치되었다. 1629년(인조 7)에는 수영(水營)이 설치되어 현을 부로 승격시키고 수군절도사 겸 부사를 두었다.
1633년 서남해의 방어를 더한층 강화하기 위하여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교동에 두고, 삼도, 즉 경기·황해·충청을 통괄하게 했다. 1895년 이후 강화군에 속하게 되었다.
인구는 한국전쟁 뒤 몰려온 피난민으로 1965년에는 1만2500명에 달해 최고를 이루었다. 현재는 교동면 인구는 3000명 정도이다. 특산물인 교동쌀의 생산량이 많고 질이 좋아 다른 지방으로 많이 팔려나간다. 그리고 밭에서 하는 인삼재배가 많고, 화문석도 이름이 높다.
육지와 격리된 섬인 까닭에 고려 중엽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교동도 사람들은 오랫동안 강화와 동급의 부사가 부임했던 교동도를 외지인들이 강화의 부속 도서로만 생각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그리고 예부터 석모도와 교동도 사람들은 배를 타고 황해도 연백장을 보러 다닌 관계로, 자신들은 강화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교동사람이라고 칭하는 것을 좋아한다. 강화와는 다른 역사와 관청이 있었고, 물산이 풍부하며 경제 및 생활권이 달랐으며, 왕실의 귀양지였다는 사실을 긍지로 여기며 사는 것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는 지난 7월 초에 개통된 '교동대교'를 건넜다. 아직도 군인들이 검문하고 있어 불편하기는 했지만, 인원 파악을 하는 단순한 행위였다. 버스는 바로 '고구저수지'로 향했다.
교동도의 우측 상단에 있는 고구저수지는 특히 알이 크고 실한 민물고기가 많이 잡혀 낚시꾼에 인기가 높은 저수지로 섬 반대 편의 난정저수지와 함께 교동도를 대표하는 농업용 저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