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신교도다. '모태신앙'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골 고향의 작은 교회를 다녔다. 교회를 안 가면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일요일에 교회 가는 일은 엄마 손 잡고 가는 나들이나 다름없었다. 깊은 신앙심은 안 생겼어도 교회 가는 일이 늘 즐거웠다.
내가 다닌 시골 교회는 사나운 세월의 물결에서 비켜나 있다.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35년 전이나 지금이나 신도 수가 항상 거의 그대로다. 이제는 머리 하얀 노인이 된 지난날의 청년 집사님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 지어진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다. 노인 신도를 위해 계단에 손잡이를 설치한 것을 빼면 크게 고친 게 하나도 없다.
그 시골 교회에서 목사님을 네 분 만났다. 모두가 검소하고 소탈하며, 신앙에 결연하신 분들이시다. 초등 시절에 만난 송 목사님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가끔 어머니와 우리 자형제들의 신앙 생활을 '박해'(?)하시던 아버지의 완강한 마음을 크게 누그러뜨리셨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쯤에 오신 강 목사님도 나와는 특별한 인연을 맺고 계시다. 그 분은 훗날 내 아내가 될 여자를 소개해 주신 '중신아비'셨다. 목사님은 내 결혼식 축도도 해 주셨다. 지금은 드넓은 순천만의 한 귀퉁이 마을에 있는 어느 조그만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신다.
기억의 왜곡일까, 허술한 기억력 탓일까. 송 목사님이든 강 목사님이든 시골 교회를 거쳐간 그 어떤 목사님으로부터도 '돈'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지 않다. 교인은 헌금을 해야 한다느니, 십일조를 내야 복을 받는다느니 하는 등의 삿된 말은 내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런 말이 없더라도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교회에 '물질'을 바쳤다. 모든 게 부족했던 시절, 그래도 세 끼 굶지 않고 밥 먹으며 살 수 있게 해 준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아서였다.
주일이면 어머니께서는 내 손에 백 원짜리 동전 몇 닢을 꼭 쥐어 주셨다. 단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언젠가 어머니께 여쭌 적이 있다. 교회가 돈 내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매번 갈 때마다 돈을 내야 하느냐고. 어머니께서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셨다.
"목사님께 귀한 하느님 말씀을 들으니 당연히 감사해야지. 돈은 얼마를 내든 상관없단다."우리도 살기 힘든 마당에 푼돈이나마 헌금으로 내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 단순 명쾌한 한 마디에 마음 속 의혹이 시원하게 풀렸다. 자발적으로 내는 헌금의 의의를 소박하나마 최초로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 뒤로 어느 교회를 가든 헌금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되었다.
예배 보고 헌금하는 일, 마음으로 하는 감사의 표시
시골 교회 어머니들의 '물질' 봉양은 지극했다. 어머니께서는 저녁 끼니를 준비하실 때마다 쌀 반 주먹 정도를 따로 마련한 주머니에 넣어 두셨다. 그렇게 한 주머니 모인 쌀들은 주일에 예배당으로 향했다. 교회 입구에 놓인 성미함에는 이 집 저 집 어머니들이 반 주먹으로 정성스레 장만한 쌀들이 수북이 쌓였다.
식구들 생일이 끼어 있는 주일이면 어머니께서는 내게 특별한 부탁을 하셨다. 새하얀 봉투 겉면에 '○○○ 생일감사헌금'과 감사의 문구를 쓰는 일이었다. 한동안은 기도 문구를 직접 불러 주시기도 했다. "주님 품안에서 ○○이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같은 문장이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던가. 언젠부턴가는 내가 직접 썼다.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 그 일이 가끔 귀찮아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에 대해 스스로 감사하는 일이 주는 기꺼움을 느끼는 특별한 순간이 훨씬 더 많았다.
교회를 '일상'처럼 다니는 모든 개신교도가 그렇지 않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대다수 개신교도는 예배 보고 헌금하는 일을 감사의 표시로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교회에 물질을 내는 행위에 대해 목사들로부터 신앙적인 의의나 필요성 등을 들을 필요는 없다. 성경 교리를 알고 내면 좋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저 좋은 말씀 들었으니 감사하는 것이다. 그 말씀으로 지혜로워지고, 하느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으니 감사해 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낸 물질로 교회는 기본 살림 꾸려 가고, 지역과 주민에 봉사도 한다.
돈이 많으면 좋겠지만 적어도 상관없다. 모인 물질로 행하는 그 모든 일들 자체가 감사하고 아름다운 일들이어서다. 그래서 나는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물질이야말로 모든 종교·신앙 공동체의 건강성을 재는 핵심 척도라고 믿는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교회 주보 뒷면에 십일조헌금이며 생일감사헌금 등을 낸 신도들 이름을 적는 교회들이 마구 생겨났다. 선교헌금·건축헌금·차량구입헌금·장학헌금 등 별의별 이름의 헌금들이 고안된(?) 것도 그즈음부터가 아닐까.
감사와 정성의 하얀 쌀들이 모이던 성미함은 이제는 예배당 입구 한쪽에 고풍스러운 가구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다. 대신 시선이 자연스레 가는 정면에는 등록교인이나 교인가족을 위해 마련한 헌금봉투꽂이함이 거창한 규모로 놓여 있다.
나는 지금도 '등록교인'이라는 말을 참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등록(登錄)'이라는 말은 일정한 '자격 조건'을 갖춰 '허가'나 '인정'이 필요할 때나 쓰인다. 한번 생각해 보라. 교회 나가는 일이 일반 단체나 기관에서처럼 '허가'나 '인정'을 받은 후에야 가능한 일인가.
학업과 직장을 따라 도회지에서 살게 된 지 25년이 넘었다. 그 시간 동안, 교회 나가는 일이 갈수록 점점 더 어렵고 부담스러워진 것 같다. 어느 교회를 처음으로 나가는 일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처음 오신 성도님들은 꼭 등록하고 가세요"라는 목사님들의 한결같은 '반강권' 때문이다.
하긴 나는 그때서야 그런 '반강권'의 배후에 도회지 교회들의 치열한 생존 경쟁(?) 시스템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내게는 '등록 교인'이라는 말이 여전히 못마땅하다. '미등록 교인'은 교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건가. 허가하고 인정하는 일은 누가 하나. 목사가? 장로들이?
'십일조 의무조항 신설'... 속보이는 개신교의 '꼼수'교회를 다니면서도 삐딱해진 내 생각은 제자리를 찾을 줄 모른다. 그런데 어제, 개신교도인 나를 더 삐딱하게 만드는 어떤 말을 만났다. '교인의 의무'다.
"십일조라는 것보다는 헌법적 규칙에 나오는 대로 교인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당회의 결의로 공동의회 투표권을 (제한한다.)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십일조) 안 한 (교인들이) 무더기로 와서 (투표하면)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까 '결의'와 '투표권'을 제한한다, 그런 의미입니다."개신교 내 최대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 합동) 총회 헌법 전면개정위원회 서기 한기승 목사가 지난 19일 서울 대치동 총회회관에서 공청회를 열어 십일조 의무 조항 신설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예장 합동은 지난해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교인의 자격을 정지시키겠다"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추진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교인의 의무'라는 꼼수를 고안한 이유이리라.
솔직히 말해 정나미가 뚝뚝 떨어진다. 무결점과 무오류의 종교가 있을 수 없겠다. 그렇지만 '개독교'니 '먹사'니 하는 말까지 들으며 조롱을 받는 처지에 놓인 종교가 내 모태신앙이라는 게 가끔 부끄럽다.
그런데 헌금이, 그것도 십일조가 의무라니. 봉건적인 율법 시대도 아니고 이 무슨 시대착오적이고 반신앙적인 수작이란 말인가. 개종이라도 해야 하나 싶은 반발심까지 생긴다.
이해는 한다. 지극히 세속적인 이유로 다툼과 갈등에 휩싸인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회는 기본적으로 신앙 공동체다. 하지만 세상 한 가운데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세속적인 시스템과 구조의 영향 아래 놓일 수밖에 없다.
문제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헌법'이니 '투표'니 하는 세속 정치의 단어가 교단 내 서기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된다. '법'이 중요하니 '교인의 의무' 같은 게 있어야 한다는 논리도 여기에서 나왔을 터. 그래야 문제를 신속게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여기서 십일조의 율법적 의미나 기독교 교리적인 의미를 자세하게 논하고 싶지 않다. 그럴 능력도 못 된다. 다만 성경 최초의 십일조 주인공이라는 아브라함이 무슨 '교인의 의무' 따위를 생각하면서 십일조를 내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성경적인 율법주의에 근거해 십일조헌금을 강요하거나,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견강부회하고, 심지어는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가르는 핵심 지표인 것처럼 말해서도 안 된다.
진정한 '교인의 의무'는 순수한 신앙 생활 그 자체
'교인의 의무'가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의 생활 바로 자체이겠다. 어떤 식으로든 모인 돈을 하느님의 뜻을 살리는 일에 감사하며 정성껏 쓰는 일이겠다. 의무라고 무슨 돈을 어떻게, 얼마나 내야 하는 일 따위로는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의무라면 그야말로 순수한 마음으로 십일조를 내는 이들이 뒤돌아설 수도 있지 않을까.
신도의 참된 의무는 그런 데 있지 않다. 교회가 신도들과 함께 해야 할 일은 '교인의 의무'에 붙들리는 게 아니라 세상의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이는 지난 며칠간 대한민국을 감동의 도가니로 만들어 놓고 떠난 교종 프란치스코를 통해 알 수 있다.
파파 프란치스코는 250명을 훌쩍 넘는 역대 교종들 중 아시시의 프란치스코(Francisco of Assis, 1182~1226) 성인을 자신의 이름으로 선택한 최초의 교종이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중세의 탁발승이다. 예수처럼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의 벗이 되어 산 이였다.
그는 원래 황제의 용사처럼 살고 싶었다. 하느님의 계시를 들은 후, 그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아버지에게 건네준 뒤 완전히 벌거벗은 채 복음의 외길로 나섰다. 그의 헌신적인 모습에 감동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때 첫 번째 추종자인 베르나르도가 하느님의 종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복음서의 다음 구절을 읽어 주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의 옷도 지니지 마라." (한상봉,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32쪽)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동료와 형제들에게 개인으로든 공동으로든 어떤 종류의 재산도 소유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들의 삶은 오직 노동과 탁발(구걸)로 꾸려졌다. 돈을 가지거나 심지어는 돈에 손을 대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바란 것은 그야말로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사는 일이었다. 그런 성인을 자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인 프란치스코 교종이 수많은 한국인을 따뜻하게 위로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부유한 교회는 세상의 적이자 하느님의 적이다. 목사나 신부는 교회 '대표'가 아니다. '헌법' 같은 것에 '교인의 의무' 따위를 집어넣어 교회를 평화로운 법치주의가 지배하는 공간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을 하고 싶어하는 이유가, 혹시 교회를 세속의 공간처럼 만들어 자신들만의 부유함과 권세를 마음껏 누리기 위함은 아닌가.
교회는 가난을 미덕으로 삼아야 한다. 그곳은 부자보다 빈자가 넘쳐나야 한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이들이 아무 때나 편하게 올 수 있는 곳이면 더 좋겠다. 그렇게 문턱이 낮아진 교회에 와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깊은 영적인 치유를 할 수 있을 때 하느님의 몸 돈 교회가 실현된다.
오늘날 교회는 어떤가. 교회 규모가 그 교회의 영성을 증명하는 것처럼 돼버렸다. 신도 수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식이다. 신도들로부터 돈을 그러모아 거대하게 '성전'을 짓고, 이곳저곳에 땅을 사들여 '센터'니 '회관'이니 하는 것들을 지어대는 일이 목사의 영적 능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돼버린 것 같다.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다.
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복음 사역의 길을 묻는 베르나르도에게 다음과 같은 구절도 들려 주었다. 나는 이 말을 '십일조는 교인의 의무'라고 부르대는 한국 기독교 '헌법주의자'들에게 전해 드리고 싶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위 책, 32쪽)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