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시마를 둘러보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지중미술관으로 향했다. 오후 2시 20분발 다카마츠행 페리가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5시간뿐이었다. 우리는 미술관 중심으로 나오시마를 둘러보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가장 먼 지중미술관까지 간 다음 이우환 미술관을 거쳐 베넷세 하우스 뮤지엄으로 나오는 루트를 택했다.
미야노우라 지구의 예술작품을 보고 지중미술관에 도착하니 오전 10시였다. 그런데 이미 11시 15분 입장 대기표를 배부하고 있었다.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니 난감했다. 나와 아내는 지중미술관으로 가는 길에 마련된 수련 연못을 보고 지중미술관 입구로 향했다. 그러나 대기표를 받은 우리는 아직 입장을 할 수가 없다. 다시 매표소로 내려와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아내가 이우환 미술관을 먼저 보고 오자고 한다. 다행히 지중미술관-이우환 미술관-베넷세하우스를 연결하는 셔틀버스가 수시로 운행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이우환 미술관 입구에 도착하니 아래 미술관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이곳부터가 이우환 미술관 영역이다. 이우환 미술관은 자연과 예술 그리고 건축이 어우러진 독특한 공간이다. 그래서 공간의 여백이 두드러진 새로운 개념의 미술관으로 불린다.
공간에서 미학을 추구하다
계단을 내려가니 미술관 앞 정원이 펼쳐졌다. 정원에는 돌과 철판과 쇠막대가 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술이 된다. 그게 바로 이우환의 예술이다. 철판과 자연석이 '대화'를 하고 있고, 철봉이 자연석에 기대 '휴식'을 취하고 있다. 돌과 쇠가 대화를 하고 휴식을 취하다니... 이게 이우환식 예술철학이라는 생각에 감탄이 나왔다. 정원에서 미술관으로 들어가려면 기둥의 광장(柱の廣場)을 지나야 한다.
이곳에도 콘크리트 기둥, 철판, 자연석이 있다. 기둥은 높이를, 철판은 넓이를, 자연석은 둥근 물체성(Object)을 강조한다. 기둥과 철판이 인위성을 표현한다면, 돌은 자연성을 강조한다. 기둥의 광장 앞으로는 콘크리트 벽이 가리고 있다. 그 벽을 돌아가야 미술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벽 안으로 좁은 길이 있고, 표를 끊은 다음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조응(照應)의 광장이 나온다.
엄밀하게 말하면 광장이 아니다. 그리 넓지 않은 삼각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곳에도 돌과 철판이 한 개씩 놓여 있다. 그런데 이들이 나란히 서서 상대방을 응시하고 있다. 그래서 조응이다. 작품 제목은 '합도(合圖)'라고 붙였다. 영어로는 시그널(A Signal)이란다. 바닥에는 자갈이 깔려 있다. 아쉬웠다. 공간에서 느끼는 미적 감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감가상각의 법칙은 예술에도 적용된다.
예술에서 철학을 추구하다
이곳을 지나면 자연스럽게 발길이 만남의 방(出會いの間)으로 이어진다. 여기서부터는 실내공간이다. 만남의 방에서 그나마 전통적인 회화를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곳에도 한 가운데 철판 위에 자연석을 갖다 놓았다. 작품제목은 '관계항 1968/2010'이다. 이우환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관계항(Relatum)과 대화(Dialogue)다. 내가 있어야 네가 있고,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 그 가운데 대화를 주고받는다.
실존주의와 환경주의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관계는 존재에서 나오고, 대화는 환경 속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변 벽에 6개의 그림이 걸려 있다. 이들 역시 상호 관계를 가지고 대화한다. 작품 제목도 점(点,) 선(線), 풍(風), 조응(照應), 대화(對話)다. 이들 그림에서 추상성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그림들이 바닥의 철판에 비친다. 이를 통해 조응과 대화 그리고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공간은 명상의 방이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이 방은 앉아서 쉴 수도 있고, 드러누울 수도 있다. 아내와 나는 이곳에 누워 공간을 응시하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곳을 나와 침묵(沈黙)의 방으로 가기 전에 잠시 그림자(影)의 방을 들여다본다. 그곳에 '관계항-돌의 그림자(石の影)'가 있다. 돌이 빛을 받아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림자가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고 색깔도 조금씩 변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침묵의 방으로 갔다. 그곳에도 철판과 자연석이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는 침묵하면서 작품을 응시한 다음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30분만에 이우환 미술관 관람을 마쳤다. 나는 그 시간동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돌과 쇠, 그림 그리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 나는 이렇게 단순한 물체와 대상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예술과 미학 그리고 철학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우환 예술철학의 세 가지 특징
그럼 이러한 예술작품을 통해 이우환이 말하고자 하는 철학은 무엇일까? 첫째는 '느끼고 생각하기'다. 예술은 시간적인 행위인 동시에 공간적인 체험이다. 예술가가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든 작품을 감상자는 공간 속에서 수용한다. 이처럼 창작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객체와 주체는 상호 교감을 한다. 대화와 교감이 이우환이 추구하는 예술철학이다.
둘째는 예술을 통해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는 것이다. 이우환의 작품이 존재하는 공간은 신비하다. 그래서 종교적인 공간, 자궁, 무덤, 별천지 등으로 불린다. 그 공간을 들어갔다 나오면 주위 풍경이 다르게 보인다. 이전과 똑같은 대상인데도 말이다. 그의 예술을 체험하고 나서 우리가 새로운 관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이우환 예술의 힘이다.
그러면 이러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우환 예술철학의 세 번째 특징인 심플리즘(Simplism)과 미니멀리즘(Minimalism)에서 나온다. 우리말로 풀어내면 '단순화'와 '최소화'다. 돌과 철판, 철봉, 콘크리트 구조물을 최대한 단순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대상물의 변형과 움직임을 최소화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체와 객체는 천천히 대화하고 교감하기 시작한다. 예술이 다르게 보인다. 예술을 새롭게 보게 된다.
대상인 자연과 환경을 큰 변형 없이 예술에 도입한다. 자연과 함께 생각하고 그 본성을 최대한 살리려 노력하고 있다. 예술가의 의도와 철학이 이우환 미술관에서 가장 잘 표현되고 구현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예술은 빵을 만들어낼 수 없고, 무기를 만들어낼 수도 없다. 그렇지만 예술작품을 본 후에 자신이나 세상이 무언가 조금 변화한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나의 장소를 열고 미술관을 만들어 보고, 그 가능성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 가능성을 또 다시 구현해보고 싶은 걸까? 안도 다다오와 이우환은 대구에 새로운 이우환 미술관을 지으려 계획하고 있다. '만남의 미술관-이우환과 그 친구들'이라는 이름을 붙일 계획이다. 이름에서도 역시 만남과 교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대구 미술인 모임은 이우환 미술관 건립을 반대하고 있다. 이우환이 식민사관에 젖은 비한국적 화가라는 이유다. 그리고 안도 다다오의 건축이 일본정신을 담았다고 비판한다. 정말 그런가? 우리 이제 예술을 이데올로기와 국적으로부터 좀 벗어나게 해주자. 예술은 예술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나오시마 르네상스 이야기]를 5회에 걸쳐 연재한다. 나오시마가 현대예술의 성지로 재탄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재 내용은 1. 예술의 섬 나오시마, 2. 이우환 미술관, 3. 지중미술관, 4. 베넷세 하우스, 5. 야외 전시물이다. 이를 통해 예술의 섬 나오시마의 진정한 모습을 자세히 조명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