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에 다시 한 번 '규제 완화 바람'이 거세다. 박근혜 대통령이 '금융권 보신주의'를 강도 높게 질타한 이후다. 금융당국은 금융회사의 유동성 규제를 풀어주고 제재 규정을 손보는 등 박 대통령의 지적을 일사분란하게 받들고 있다.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금융연구기관에서도 금융권 보신주의를 혁파하기 위해 금융회사 건전성 규제의 빗장을 풀어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하며 보조를 맞추고 있다. 가계부채의 우려 속에서 최경환 기획재정부 부총리의 령(令)에 따라 부동산 관련 금융규제를 전격적으로 완화한 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이다.
가계부채 심각한데 돈 더 빌려주라는 정부실제 금융위원회는 지난 8월 26일 예대율(총 예금에 때한 총 대출비율)을 산정할 때 온렌딩대출과 농림정책자금대출, 새희망홀씨대출 등 정책자금대출을 제외하는 내용으로 은행업 감독규정을 개정한다고 밝혔다. 늘어난 대출 한도만큼 돈을 더 시중에 풀라는 의미다. 금융권에서는 이같은 조치로 은행권의 대출 여력이 21조 원 가량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재 은행권을 통해 시중에 풀린 온렌딩대출 규모는 10조 원, 농림정책자금대출은 8조 원, 새희망홀씨 대출 규모는 3조 원으로 추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회사에 대한 제재 강도도 사실상 낮췄다. 금융기관 직원에 대한 감독당국의 제재를 원칙적으로 없애기로 한 것이다. 부실 대출이 발생해 제재를 받을지 모른다는 우려감을 버리고 마음껏 돈을 빌려주라는 일종의 '시그널'이다.
정부 산하 연구기관은 한발 더 나가고 있다. 금융회사 부실의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는 자산건전성 관련 규제를 완해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금융당국이 건전성 규제를 강화하면서 은행들이 대출포트폴리오를 안전자산 위주로 구성, 돈이 필요한 곳에 대출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마디로 대손충당금 적립비율 등과 같은 건전성 규제를 느슨히 운영해 더욱 적극적인 대출이 이뤄지게 해야 한다는 얘기다.
서병호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8월 31일 '국내 은행의 보수적 자금운용 관행과 개선과제' 보고서에서 "국내 은행의 보수적 자금운용은 대출 구성이 안전자산 위주로 재편되면서 발생했다"며 "은행들의 위험자산 취급 확대를 유도하기 위한 방안으로 호황기에는 대손충당금 적립률을 높이고 불황기에는 낮추는 동태적 대손충당금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1년 저축은행 사태?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금융권의 이같은 '규제 완화 바람'은 과거에도 있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금융감독원장을 지낸 권혁세 서울대 경영학과 초빙교수가 쓴 <성공하는 경제>에는 지난 2011년 대규모 금융 피해자를 양산한 저축은행 사태의 본질을 금융당국의 규제 완화로 지목하고 있다.
"저축은행이 대주주의 비리 등 각종 스캔들로 신뢰가 떨어질 때마다 오히려 저축은행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규제를 완화한 것은 잘못을 저지른 학생에게 상을 내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저축은행의 취약한 자본력, 지배구조, 이용 고객의 낮은 신용도를 감안하면 각종 건전성 감독 기준을 은행보다 더 엄격히 적용했어야 함에도 오히려 규제의 고삐를 늦춤에 따라 저축은행들이 방만한 경영으로 리스크 관리를 실패하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권 전 원장은 책에서 저축은행 사태의 교훈이 금방 잊혀질 거라는 우려감도 친절히(?) 남겼다.
"매번 대형 사고가 터질 때마다 정부와 정치권, 업계는 재발방지책을 낸다며 요란을 떨었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용두사미로 끝나는 사례가 허다했다. 이런 식으로는 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치지 못한다."최근의 규제 완화는 과거 저축은행 사태 때와 비교할수 없는 규모를 대상으로 두고 있다. 과거 규제 완화가 제2금융권으로 제한됐다면 지금은 전 금융권을 대상으로 이뤄지고 있다. 피해가 우려되는 대상도 단순히 저축은행 이용자를 넘어 전 국민으로 확대됐다. 1000조 원을 넘어선 가계부채에 '빨간불'이 켜진 지 오래지만 정부는 빚은 더 내도록 독려하고 있는 셈이다.
박 대통령은 대선 후보 당시 가계부채의 심각성에 강한 우려감을 표한 바 있다.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우선적으로 가계부채 문제를 손보겠다고 약속했지만, 어느새 가계부채 문제는 뒷전으로 밀렸다. 경기 활성화를 위해 '금융권 보신주의'를 정면으로 겨냥하면서다. 박 대통령의 정책방향 수정은 곧바로 시장에 영향을 주고 있다.
국민·우리·신한·하나·농협·기업·외환 등 7개 주요 은행의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지난달 말 297조7천억 원에서 8월 28일 301조5천억 원으로 한 달 만에 4조 원 가까이 늘었다. 주요 은행의 주택대출 잔액은 올해 초부터 매달 평균 1조6천억 원 가량 증가세를 보이다가 이달 들어 2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가계신용대출 급증... 경제성장 발목잡는 '최대' 복병
가계 신용대출도 이달 들어 급증했다. 7개 은행의 개인 신용대출 잔액은 7월말 79조9천억 원에서 이달 28일 81조1천억 원으로 한 달 새 1조2천억 원 늘었다. 개인신용대출은 작년말(79조6천억 원)부터 7월까지 잔액에 큰 변동이 없었다.
가계부채의 질 문제도 심각하다. 가계소득 증가가 부채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벌어들이는 돈보다 빚지는 돈이 늘어나면서 가계의 부채부담이 커지고 있는 셈이다.
한국은행이 집계하는 가계부채(가계신용) 통계를 보면, 지난 2008년 말 723조5천억 원인 가계부채 잔액은 지난해 말 1천21조4천억 원으로 연평균 8.2% 증가했다. 반면 통계청 가계수지를 보면 가구당 월평균 가계소득은 같은 기간에 337만 원에서 416만원으로 연평균 4.7% 증가하는 데 그쳤다.
권 원장은 책을 통해 가계부채가 한국경제의 발목이 잡고 있다고 진단했다. 가계부채 문제가 경제 성장과 금융시스템을 위협하는 '최대 복병'이라고까지 경고했다.
"가계부채 문제는 십수년간 누적적으로 발생한 사안이며 내수경기, 부동산, 금융회사의 건전성 등 제반 문제와 연계되어 있어 해결이 쉽지 않다. (중략)금융당국은 금융회사에 대한 리스크 관리감독을 한층 강화할 필요가 있다. LTV, DTI, 연체율, 주택가격 등 가계부채 위험 수준에 대한 체계적 분석과 모니터링 강화, 개인신용평가시스템(CSS)을 통한 대출 부실화 방지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