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큼성큼 산길을 걷고 있는 한 남자, 그 뒤를 여인이 총총 따른다. 여인은 애걸복걸했지만 남자는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남자를 찾아 지리산까지 왔건만 남자는 이미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후였다. 그래도 미련이 남은 여자는 매달렸다. 그러나 승려가 된 남자는 끝내 여자를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인은 결국 바위에 엎드려 통곡을 하고 만다. 훗날 사람들은 이 바위를 '곡성암'이라고 불렀다."벽송사를 창건한 벽송 지엄(1464~1534)대사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와는 달리 벽송 지엄대사가 지리산에 들어온 건 57세이던 1520년 3월경이다.
지엄대사는 혜안을 가져 지리에도 통달했다. 수도할 명당을 찾다가 이곳보다 더 나은 곳이 없다고 생각해 이곳에 절터를 잡았다. 초암을 짓고 수도했는데 이것이 벽송사의 시작이다. 뒷날 어느 사람이 암자를 증축하여 큰 절을 지은 뒤 '벽송암'이라 이름 붙였다.
남의 소를 세지 마라지엄대사는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를 좋아하여 무과에 뽑혔다. 1491년(성종 22) 북방에 여진족이 침입하자 도원수 허종의 휘하에서 공을 세웠으나, '마음을 닦지 않고 싸움터에만 쫓아다니는 것은 헛된 이름뿐이다'라는 것을 깨닫고는 계룡산 조징선사의 제자가 되어 28세 때 출가했다.
벽계 정심에게서 법맥을 이어받아 지리산에 있으면서 불도를 닦아 불교계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70세가 되던 어느 날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강론하다가 '제법(諸法)의 적멸상(寂滅相)은 말로써 선설(宣說)할 수 없다'는 구절까지 설명한 뒤, 제자들에게 밖에서 구하지 말고 노력하여 진중할 것을 당부하고 입적했다.
붓다 또한 일찍이 경전의 글귀를 외는 사람을 비판하여 '남의 소를 세는 것 같다'고 했다. 자기 자신이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붓다도, 지엄대사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년의 붓다는 '너희는 자기를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삼되,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며, 또 법(진리)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되,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자주 설했다. 자기 자신과 법에 의지하는 것, <법구경>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자기의 의지처는 자기뿐이니 / 저 밖에 또 무엇을 의지하리오 / 자기가 잘 조어되는 때 / 얻기 힘든 의지처를 얻으리라"
"아침에 울력 있습니다."여섯 시 아침 공양을 마치자 원돈 스님이 일곱 시경 울력이 있음을 알렸다. 절 아래에 있는 서암정사까지 비질을 할 요량이란다. 일곱 시가 되자 하안거를 하고 있던 10여 명의 스님들이 요사를 나와 저마다 손에 빗자루를 하나씩 들고 마당에 모였다.
절에는 '삼사(三事)'라는 말이 있다. 수행에 가장 기초가 되는 일상적인 행위인 예불, 공양, 울력 세 가지를 이르는 말이다. 수행하는 이라면 누구든 함께해야 하는 일이다. 예불은 부처님에 대한 인사, 공양은 하루 세 끼 끼니를 잇는 일, 울력은 공동노동을 말한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것이 예불이고 생리적 욕구를 채워 생명을 지속시키는 것이 공양이라면 늘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꼭 필요한 것이 울력이다.
스님들의 비질이 경쾌하다. 새벽 공기를 가르는 비질은 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아스팔트가 아닌 흙길이었다면 대지는 부드러운 비질에 잠이 깨어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을 것이다.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있는 나무장승에 이르렀을 때도 스님들은 허리를 펴지 않았다. 서암정사까지 내처 비질은 계속되었다.
서암정사에 이르렀을 때 홀로 의중마을 산길로 접어들었다. 서암정사에서 이어지는 의중마을 가는 산길은 옛날 마을에서 벽송사를 오가던 마을길이었다. 아스팔트길이 놓이고 한동안 버려졌던 이 산길은 둘레길이 열리면서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숲길의 청량함도 좋거니와 번잡한 차량을 피해 계곡 물소리를 멀찌감치 들으며 걷는 이 길은 보물 같은 길이다. 의중마을까지는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선생님, 스님 오셨습니다." 주지 스님이 문밖에서 불렀다. 주섬주섬 옷을 챙기고 나왔더니 원응 큰스님 일행이 전각을 둘러보고 있었다. 지척에 있으면서도 스님이 벽송사를 방문한 건 5년 만이었다. 원응 스님이 방문할 거라며 어제 주지 스님이 사진 촬영을 부탁했었다. 원응 스님은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벽송사를 다시 지었고, 서암정사를 불사했다. 한국전쟁에서 숨져간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스님은 감회에 젖은 듯 벽송사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벽송사에는 단청이 없다. 전각들엔 화려한 단청 대신 하나같이 무채색이다. 또한 법당이 가운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방인 벽송선원이 절의 가운데에 있어 여느 절과는 다른 가람 배치를 이루고 있다.
이는 벽송사가 조선 최고의 선풍을 일으킨 종가라는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예부터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벽송사에선 도인이 많이 나왔다. 그야말로 선풍이 넘치고 넘친 절이었다. 선방 사방으론 대나무 울타리를 쳐 세인의 발길을 막고 있다.
원응 스님이 선방에서 법문을 시작했다. 전국의 사찰에서 하안거를 위해 모인 십여 명의 스님들이 큰스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사방은 말 그대로 절간이었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간월루의 깊은 고요가 기둥에 기댄 큰스님의 주장자에 비스듬히 스며들었다. 원응 스님은 먼저 벽송사에 대한 이야기로 운을 띄웠다.
"벽송사는 벽송 지엄대사가…."
누가 상수일까벽송 지엄에서 시작되어 부용 영관, 청허 휴정, 회암 정혜를 거친 벽송사의 선통은 경암 응윤 스님(1743~1804)에게로 이어진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던 것 같다. 5세 때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9세에는 이미 경서와 사기에 능통했을 정도로 뛰어났다.
9세 때 지은 시를 보고 스님의 아버지가 "이 아이는 일찍 죽지 않으면 출가하여 승려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15세에 출가하여 한암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38세에 법당을 열어 거의 20여 년 동안 대중들을 교화했다. 스님은 1783년경부터 벽송사에 기거하며 후학을 지도하여 절을 크게 번창시켰다. 저술로 <경암집>이 있는데 '벽송암기'가 수록되어 있어 절의 내력을 알 수 있다.
1803년 8월 응윤 스님은 벽송사에서 옥천(지금의 순창) 군수를 맞이한다. 옥천 군수는 "스님에 대해서는 들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직접 만나 보니 한 그루 마른 산사나무 같고, 돌로 만든 나한 같습니다"라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스님이 솔잎차와 산과일을 내어 놓으니 옥천 군수가 맛보고서는 "담박한 맛이 좋습니다. 고목사회(枯木死灰) 같은 스님의 살림살이로서는 제격입니다"라고 시를 한 수 지어 주었다.
여위고 마른모습 목석처럼 무덤덤,이 산에 머문 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흰 구름과 오래 살며 한 가지 일도 없고,한 잔의 솔잎차와 상 위에 놓인 책 한 권뿐.이에 응윤 스님이 화답했다.
마음의 기미 고요하여 불 꺼진 재 같고,매일 같이 염불하는데 무슨 잡념 있으랴.선가에는 본래 하나의 물상도 없으니,오히려 우습구나 상 위에 쌓인 책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이 시들을 읽노라면 담박한 시구에 마음이 절로 맑아진다. 그러면서도 누가 더 상수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는 건 속인으로선 어쩔 수 없는 노릇.
두 사람이 하룻밤을 같이 보내면서 십수 편의 시를 주고받을 정도로 돈독해진 걸로 보아 둘을 놓고 상수와 하수를 따지는 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겠다. 다만, 옥천 군수가 '한 가지 일도 없고 한 잔의 솔잎차와 상 위에 놓인 책 한 권뿐'이라고 했지만 응윤 스님은 '본래 하나의 물상도 없으니 상 위의 책조차 우습다'고 했으니 알음알이의 불미한 나로서는 스님의 손을 치켜들 수밖에 없다.
구름 위 하늘에 머문 별유천지법문이 끝나자 선방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스님들은 선방 뒤 원통전을 올랐다. 원통전은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겪을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을 듣고 큰 자비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해서 관음전으로도 불린다. 마침 사시마지를 올릴 때라 예불이 시작되었다. 그 옛날 벽송 지엄대사도 원통 법문의 시 한 수를 남겼다.
"꽃은 섬돌 앞 내리는 비에 웃고(花笑階前雨) / 솔은 난간 밖 바람에 운다(松鳴檻外風) / 오묘한 선지(禪旨) 왜 찾으려 하는가(何須窮妙旨) / 이것이 바로 원통 법문이라네(這箇是圓通)" - <벽송당야로송>
원통전 뒤 도인송을 지나 삼층석탑이 있는 언덕을 오른다. 두 그루의 푸른 소나무. 꼿꼿한 도인송과 그를 향해 비스듬히 누운 미인송. 마치 벽송 지엄의 이야기처럼 애틋한 사랑의 욕망을 넘어선 그윽한 선기가 이곳을 채운다. 소나무에 기대어 절을 내려다 보니 그 옛날 응윤 스님의 벽송암에 대한 묘사가 절묘함을 깨닫는다.
"이곳은 평평하고 반듯하고 아늑하고 깊숙하며, 토질은 황토가 쌓인 언덕이다. 이 절터 밖은 모두 날카로운 바위가 험준하다. 이 절에 사는 승려의 마음은 자연히 담박하여, 탐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도량은 물 뿌리고 비질하지 않아도 먼지가 일어나지 않는다. 혹 수행이 어긋난 자는 반드시 재앙을 만난다. 그러므로 재물을 탐하는 무리는 들어가지 못한다. 표주박을 들고 찾아온 운수납자들이 아침에 들어왔다 저녁에 나가며 이 암자에 머물지 못한다. 그래서 때론 잡초가 무성하다는 탄식이 나올 때도 있다." - 석응윤의 <경암집-벽송암기>
벽송사는 겹겹 산봉우리들이 마치 활짝 핀 연꽃처럼 두른 곳의 한가운데에 있다. 암자가 앉은 모양새는 어찌 보면 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이곳을 일러 '부용만개(芙蓉滿開)' 혹은 '청학포란(靑鶴抱卵)'의 형국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또한 옛 사람은 '구름 위 하늘에 머물고 / 인간 세상밖에 따로 있는 / 연꽃이 활짝 핀 극락정토에 / 조사의 깨달음이 만대에 이어지는' 곳이라고 벽송사의 수려한 풍광을 말했다.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 벽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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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지리산에서 맑고 깨끗함으로 금대암과 더불어 손꼽혔던 벽송사는 벽송 지엄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층 석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절의 창건 시기를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로 보기도 하고, 다만 조선시대에 통일신라 양식으로 석탑을 만들었을 뿐 실제 절은 벽송 지엄대사 때인 1520년에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아무튼 벽송사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禪脈)에서 보면 벽계 정심, 벽송 지엄, 부용 영관, 휴옹 일선, 청허 휴정(서산), 부휴 선수, 송운 유정(사명), 청매 인오, 환성 지안, 호암 체정, 회암 정혜, 경암 응윤, 서룡 상민 등 기라성 같은 정통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아울러 선교겸수한 대 종장들을 108분이나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벽송사는 한국전쟁 때 빨치산의 야전병원(일종의 환자 비트로 보기도 한다)으로 이용되어 국군에 의해 모조리 불타버렸다. 이후 절이 제 모습을 찾은 건 1960년대. 쇠락해질 대로 쇠락해진 사찰을 중창한 이는 지금의 서암정사에 계신 원응 큰스님이었다. 벽송사에는 신라 양식을 계승한 보물 제474호인 3층 석탑과 경남유형문화재인 벽송선사진영, 경암집 책판, 묘법연화경 책판과 경남민속자료 제2호인 목장승의 문화재가 보존되고 있다.
벽송사는 지리산둘레길이 지나는 곳이다. 이 길은 스님들의 포행 길을 내어준 것이다. 여행자도 이날 금계-동강 구간을 걸었다. 벽송사에서 산길을 출발하여 용유담을 구경한 후, 둘레길 버스를 타고 추성동에서 내려 1km 정도의 비탈이 심한 아스팔트길을 걸어올라 다시 벽송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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