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로 다르고, 선정하는 사람마다도 다르지만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것이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만리장성, 피사의 사탑, 페루의 잉카 마추픽추, 영국의 스톤헨지 등이 바로 그들이다. 2대 명소, 7대 불가사의, 10경 등 숫자를 활용하는 '홍보'는 아무래도 대중을 유인하는 데 호소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그런지, 강화도 마니산의 국민관광지 안내판에도 '강화의 명소'로 두 장의 사진이 게시되어 있다. 하나는 '마니산(참성단)'이고, 다른 하나는 동막해수욕장이다. 그러나 강화를 상징하는 두 '대표 상징' 중 하나로 동막해수욕장을 제시한 해설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아무려면 동막해수욕장이 경포대, 해운대, 만리포 또는 백령도의 콩돌해수욕장(천연기념물 392호)보다 낫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내판에 '마니산'이 아니라 '마니산(참성단)'으로 표기되어 있는 까닭을 잠깐 생각해본다. 마니산이라면 그냥 자연물인 산을 뜻하게 된다. 그렇다면 마니산은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은 물론 남한의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에 견줘 뛰어난 명소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 산들과 어깨를 겨룰 만한 명산으로 치켜세우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니산 뒤에 참성단을 덧붙였을 법하다. 마니산은 보통의 산이 아니라 단군의 신화가 깃들어 있는 신성스러운 영산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마니산을 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마니산은 여느 산에 뒤지지 않는 매력적인 등산로를 가진 덕분에 단순 등산객을 모으는 데에도 괴력을 발휘한다. 강화의 대표적 명소로 추천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다는 말이다.
단군 마니산, 양요 돈대, 세계문화유산 고인돌
돈대 또한 강화도를 상징하는 대표급 답사지라 할 만하다. 월곶 돈대, 갑곶 돈대, 좌강 돈대, 초지진, 손돌목 돈대, 화도 돈대 등 돈대라면 단연 강화도를 떠올리게 되어 있다. 해변을 따라 동서남북으로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강화도의 돈대들은 자연스레 조선 말기의 역사를 상기시켜 준다.
특히 용두돈대는 압도적이다.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의총, 포대, 쌍충비, 어재연 장군 전적비, 누각, 조선 시대 우물 등 볼거리가 즐비한 광성보(사적 227호) 안에 있는데다, 바다 안까지 들어간 용머리 모양의 툭 튀어난 돌출지 형세를 하고 있어 답사자들을 경탄시킨다.
고인돌은 그 이름만 들어도 강화도가 연상되는 문화유산이다. 강화도는 북방식 고인돌의 남방 한계선이다.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고조선의 영역이 이곳까지 미쳤다는 가설을 가능하게 해주는 증거물이 바로 북방식 고인돌인 것이다. 게다가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되어 있으니 더 이상 중언부언할 필요도 없다.
청동기 시대가 남긴 고인돌에 견줘 가장 아득하게 시간 차이가 나는 '강화 평화 전망대'도 강화의 자랑거리이다. 북녘의 산과 들, 심지어 집까지 시야에 들어오는 이곳에 서면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에 사는 느낌이 불현듯 살아난다. 특히 길목 중간에서 무장 군인들에게 신분 확인을 받을 때면 그런 감회는 더욱 생생하다.
이곳은 휴전선 이남의 많은 전망대 중 유일하게 바다를 사이에 둔 곳이다. 따라서 통일이 되면 북한땅까지 다리가 놓일 광경을 저절로 상상하게 된다. 분단과 통일에 대한 교육 공간으로도 탁월하다는 말이다.
예전보다 많이 잊혀진 듯한 화문석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강화 화문석 문화관>을 찾아가 보면 답사자도 예상보다 훨씬 적다. 그러나 지명도 높은 지역 대표 상품을 그냥 버려둘 수는 없다. 어떻게든 명성을 되살리고, 찾아오는 관광객들도 크게 증가시켜야 한다.
어렵지 않다. <강화 화문석 문화관>을 한번이라도 찾아보면 인식이 바뀐다. 대단한 기술력과 미적 감각을 자랑하는 화문석 작품들을 눈으로 직접 보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당장 한 점 구입하여 집에 보유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예술품들이 답사자들을 부르고 있다.
강화도는 약 40년 동안 고려의 '서울'이었다
고려는 본래 개성을 근거지로 했고, 또 북진 정책을 줄곧 추구한 나라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한에는 고려 유적이 많지 않다. 하지만 강화도에는 '고려 궁지'가 있다. 물론 고려 시대의 궁궐터가 강화도에 있는 것은 항몽 전쟁 약 40년의 긴 시간 동안 이곳이 고려의 '서울'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에 '(고려 후기에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설화 형식으로 현실를 비판하는 문학도 유행하였다. 민간에 구전되는 이야기를 일부 고쳐 한문으로 기록한 패관 문학이 유행하였는데, 이규보의 백운소설과 이제현의 역옹패설이 대표작이다.
사물을 의인화하여 일대기로 구성한 이규보의 국선생전과 이곡의 죽부인전 등도 현실을 합리적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을 띠었다.'고 소개된 이규보의 무덤도 강화도에 있다. 무신정권 시대의 대표적 문인인 이규보 역시 항몽 전쟁 시기 내내 강화도에 살다가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마니산(참성단), 용두돈대, 고인돌, 평화 전망대, 화문석 문화관, 고려 궁지, 이규보 묘소를 강화도의 7대 명소로 거론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10곳을 지목하고 싶어한다면 어디가 좋을까? 필자는 홍릉, 전등사, 교동 향교를 추가하고자 한다.
홍릉은 고려 고종의 무덤이다. 조선 시대 왕릉들에 비해 남아 있는 숫자 자체가 빈약하기도 하지만, 보존 및 복원 상태마저 훨씬 못 미치는 것이 고려 임금들의 무덤이다. 그러나 남한에 현존하는 고려 왕릉 5기 가운데 4기가 강화도에 있으므로, 그 중 홍릉을 대표 답사지로 꼽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홍릉을 그렇게 고려 왕릉의 대표로 꼽는 것은 무엇보다도 고종 때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또 고종 재위 기간은 내내 항몽 전쟁 시기였다. 그런 점에서 홍릉 답사는 항몽 전쟁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데 적절한 여정이 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홍릉이 다른 임금들의 능보다 좀 더 볼 만하다는 점도 고려할 일이다.
전등사는 고구려 승려 아도가 신라땅인 경북 선산 도리사로 가서 불교를 전파하기 이전에 강화도에 들렀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고찰이다. 단군 설화가 서려 있기도 한 이 사찰은 양요 때 프랑스 군대를 격퇴한 전승지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에는 사고(史庫)를 관리하기도 했다. 지금도 대웅전, 약사전, 쇠종 등 다수의 국가 보물을 소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로 이름 높은 교동향교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교동향교는 강화도 본섬이 아닌, 교동도에 홀로 있다. 향교가 있다고 해서 교동도가 되었으니 교동향교는 그 섬의 두드러진 상징인 셈이다.
하나같이 답사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 명소 10곳단군과 관련 있는 멋진 등산지 마니산(참성단), 양요를 증언하는 강화도 돈대 중 가장 뛰어난 모습의 용두돈대, 세계문화유산 고인돌, 바다 건너 북녘땅을 마주 보고 있는 평화 전망대, 오랜 세월 강화도의 물산을 대표해온 화문석 문화관, 강화도가 고려의 서울이었다는 사실을 웅변하는 고려 궁지, 고려 후기 대표 문인 이규보 묘소, 팔만대장경을 낳고 또 항몽 전쟁기를 온몸으로 겪은 홍릉, 강화도 최고의 고찰 전등사,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 교동향교를 강화도의 10대 명소로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답사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는 역사의 현장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