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검단산은 영산(靈山)이다. 비록 높이가 657m밖에 되지 않지만, 그리고 종주해도 고작 4~5시간이면 충분할 만큼 그 산세가 크지 않지만, 한 번이라도 산을 타 본 사람이라면 그 신령한 기운에 또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산이다.
검단산의 맑은 기운을 받는 이가 어디 현재를 사는 우리뿐이겠는가. 옛 기록들을 뒤적이다 보면 검단산에 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발견된다.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검단산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험한 산이었던 것이다.
백제 한성(漢城) 시대의 진산
우선 검단산이란 명칭의 유래부터 살펴보자. 이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설화가 전해지는데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백제 위덕왕(재위기간 : 554-598) 때 검단선사가 은거하여 검단산이 되었다는 설이다. 전북 고창 선운사를 창건하기까지 했던 백제의 유명한 승려 검단선사가 이곳에 있었으니 당연히 산의 이름도 그 이름을 따르게 되었다는 것.
설화의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이를 통해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이 지역이 예로부터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이다. 백제 위덕왕은 이 지역을 고구려부터 수복한 뒤 신라에게 다시 빼앗긴 백제 성왕의 아들이다. 그의 재위 기간에 활약했던 검단선사가 하필 이곳에 기거했었다는 설화는 그만큼 오랫동안 백제의 힘이 이곳에까지 미쳤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많은 사학자들은 하남시와 경기 광주시를 백제의 하남위례성, 즉 한성(漢城)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비록 고구려나 신라에게 복속되어 과거의 영화는 잃어 버렸지만, 어쨌든 내가 사는 고장이 한때 한 나라의 수도였다는 사실은 꽤 오랫동안 그 지역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현대의 '서울사람'처럼 '한성사람'이라는 자부심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각인되어 문화적으로 유전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맥락에서 검단산은 소위 '진산'이라고 표현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을 것이다. 서울시민들에게 남산이나 삼각산이 그러한 것처럼 검단산은 그 지역을 사는 사람들에게 '한성' 그 자체와도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향토 사학자들이 검단산에서 발견한 백제 시대 때의 석축 제단은 눈여겨 볼 만하다. 학자들은 이를 백제왕이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으로 추측하며, '검'은 '신성하다, 크다', '단'은 '제단'을 의미하는 바, 검단산이란 명칭이 '신성한 제단이 있는 큰 산'이란 뜻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결국 앞서 말한 검단산의 유래와도 관련이 깊다. 그만큼 검단산은 삼국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에게 백제와 관련하여 특별한 산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검단산은 고대 백제 '한성시대'서부터 그 지역의 진산으로서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준거가 되어 왔다. 조선 성종 때 만들어진 <동국여지승람>이 검단산을 '광주목의 진산'이라고 기록한 것은 이와 같은 유구한 역사의 반영이다.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검단산검단산 명칭의 또 다른 유래는 그 위치와 관련이 있다. 검단산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하류 쪽으로 조금 내려와 강북의 예봉산을 마주 보고 서 있는데, 이곳은 현대에도 팔당댐이 들어설 만큼 한강 하류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이다. 따라서 검단산 부근에서는 예로부터 각처에서 한강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산을 검사하고 단속하였는데, 이로부터 검단산이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것.
물론 앞선 검단선사 설화와 마찬가지로 이 유래 역시 진위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산들은 이곳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검사와 단속을 하였을 텐데 왜 하필 이곳만 그 이름이 검단산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한양으로 물산들이 들어오기 이전 시대에는 검단산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를 통해서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검단산이 그 위치상 지리적으로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곳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이다. 검단산에는 백제 초기 위례성의 외성이, 조선 시대에는 정상에 봉수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는 그만큼 검단산이 전략적으로 중요했음을 의미한다. 백제 시대 때에는 수도를 지키는 최후방어선으로서, 조선 시대 때에는 변경에서 올리는 봉수를 목멱산으로 전하는 중요한 고지로서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태조 이방원이 내시별감을 보내어 검단산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고, 상왕 태조와 함께 검단산에서 사냥을 즐겼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역시 당시 검단산의 위상을 추측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왕이 직접 군사를 대동하고 나가 사냥하는 데 있어서 장소 선택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록은 이후 시대에도 가뭄이 들 때 검단산에서 기우제를 지냈음을 기록하고 있다.
아름다운 검단산의 풍경
지역의 진산이자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검단산. 그러나 그것만으로 사람들이 검단산을 영험하다고 생각했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검단산을 신령스럽게 생각한 것은 풍수 지리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검단산이 풍수적으로 좋다는 것은 그곳에 산재해 있는 묘들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검단산을 오르다 보면 주위에 많은 묘들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유명하기에는 구한말 <서유견문>을 썼던 유길준의 묘가 있으며 현대에 와서는 한국일보의 창업주 장기영, 현대그룹의 정주영과 정몽헌이 이곳에 묻혀 있다.
심지어 조선 시대 때 세종의 능을 이곳에 쓰려다가 여주로 옮기게 되어 닦아 놓은 능터가 남아 있다고 하니 그만큼 이곳의 풍수가 심상치 않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풍수가 좋다는 건 무슨 뜻일까? 물론 전문가도 아닌 내가 그것까지 알 수는 없으나, 단 하나 분명한 것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은 그만큼 풍광도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보통 풍수지리에서는 명당으로 배산임수를 이야기하는데 앞으로 시선이 탁 트여 있고, 뒤편으로 큰 산이 자리잡고 있다면, 그 큰 산에 올라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검단산은 북쪽으로 큰 강이 굽이치며 절경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검단산에 올라보라. 만약 날씨가 좋다면 저 멀리 불암산부터 시작해서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 아차산, 용마산, 남산, 관악산까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스카이라인을 모두 볼 수 있으며, 반대쪽으로는 용문산, 유명산, 청계산이 다 보인다.
게다가 새벽에 운까지 좋다면 바로 앞에 위치한 두물머리의 물안개까지 볼 수 있다. 그 장관을 보고 있노라면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검단산을 신령스럽다고 이야기하는지, 왜 그 지체 높은 양반들이 이곳에 묘를 쓰려 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다.
비록 높이는 657m밖에 되지 않는 산이지만 그곳에서 바라본 풍경은 지리산에서 바라보는 첩첩의 산들과 견줄 수 있으며 또한 춘천 호반에서 느낄 수 있는 물안개의 아련함을 떠올리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많은 이들이 이 검단산을 영험하게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하명산 검단산. 난 오늘도 그곳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