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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든 동성이든 사람을 좋아하는 데 특별한 이유가 없을 때가 있다. 20대 초반, 대학교 때 만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특별히 예쁘지도, 착하지도 않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아이였다. 너무 솔직한 성격 탓에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에겐 그런 그 친구의 성격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상하게 난 그 아이가 참 좋았다. 남들이 나쁜 소리를 해도 별로 개의치 않았고 그냥 그 친구를 믿었고 좋아했다.

 코크로 가는 길목에 만났던 그림과 같은 아일랜드의 가을 들판, 밀레의 <만종>이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코크로 가는 길목에 만났던 그림과 같은 아일랜드의 가을 들판, 밀레의 <만종>이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 김현지

이유 없이 반해버린 도시, 코크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어떤 사물도, 어떤 공간도 이유 없이 좋아질 때가 있다. 사은품으로 받은 강아지 인형이, 골동품 가게에서 싸게 산 접시들이, 우연히 내린 정류장이 이유 없이 좋아지기도 한다.

나에게 이유 없이 좋아진 도시가 있냐고 물어본다면 주저하지 않고 코크(Cork)라고 말할 것이다. 처음 코크에 도착한 날부터 떠나는 그 순간까지 나는 그곳이 좋았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었다. '오늘부터 코크를 좋아해야지'라고.

 코크시티의 모습
코크시티의 모습 ⓒ 김현지

아일랜드 말로 '습지'를 뜻하는 'corcaigh'에서 유래한 코크는 아일랜드 남서부 리 강(River Lee) 하구에 발달한 남부의 정치, 경제의 중심 도시다. 아일랜드에서 2번째로 큰 도시다. 한국으로 비교하자면 부산 같은 도시지만 부산만큼 크지 않다. 뿐만 아니라 코크 시티를 벗어나면 도시의 분위기는 여타 아일랜드의 분위기와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코크가 아일랜드의 다른 도시와 비슷하다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다른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코크만의 따스함과 여유로움은 직접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어떠한 수식어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곳곳에 보이는 야자수는 비바람과 파도가 심한 아일랜드에서 보기 힘든 풍경이었고 오래된 도로에 빽빽이 늘어선 차들은 '여기가 도시구나'라는 사실을 각인 시켜 준다.

여기도 아일랜드 맞아? 라는 생각도 잠시 여타 아일랜드 도시들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검은 구름들이 해를 가리며 아일랜드 특유의 날씨를 보일 때면 '그래, 여기도 아일랜드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바다를 끼고 있는 다른 도시들보다 코크는 훨씬 느긋하고 여유롭다.

 코크시티의 중심가인 세인트 패트릭 거리는 보행자 중심의 도로로만 설계되어 있어 도심을 걸어다니기 편리하다.
코크시티의 중심가인 세인트 패트릭 거리는 보행자 중심의 도로로만 설계되어 있어 도심을 걸어다니기 편리하다. ⓒ 김현지

아일랜드의 제 2의 도시답게 코크에는 인정 많은 술집과 레스토랑들이 도시 중심가에 즐비하다. 또한 세인트 패트릭 스트릿(St. Patrick's Street)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 중심가 길은 보행자 중심으로 설계되어 걸어다니기 편하다.

그밖에 18세기부터 문을 연 실내 재래시장인 잉글리시 마켓(English Market), 고딕 양식의 세인트 핀 바 성당(St. Fin Barre's Cathedral), 세인트 앤 교회(St. Anne's Church), 블라니성(Blarney Castle), 버터박물관, 지역 흑맥주인 머피와 비미시(Murphy'sand Beamish stouts) 등 곳곳에 가볼 만한 관광지도 많다.

잉글리시 마켓-재래시장, 삶의 이야기가 주는 매력

시골 출신인 나는 어렸을 적 엄마를 따라 재래시장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특별히 내 물건을 사러 가는 것도 아니었다. 시장 구석구석을 다니며 물건을 구경하거나 항상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엄마가 재래시장에서 만큼은 약간의 흥정을 시도하는 모습도 나에겐 신기한 풍경 중 하나였다.

재래시장의 마지막 코스는 언제나 시장의 떡볶이 골목에서 끝이 났다. 유난히 시장 안의 떡볶이를 좋아했던 나는 엄마를 따라 그곳에 갈 때면 항상 목적을 달성하곤 했다. 그때는 그저 엄마를 따라 시장을 구경하는 것이 즐겁고 떡볶이를 먹는 것이 즐거웠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삶을 위해 치열하게 움직이는 사람과의 만났기 때문에 그곳이 더 그립고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정이 있는 재래시장에 대한 추억은 아일랜드에서도 계속되었다. 처음 코크를 여행했을 때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도 코크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인 잉글리시 마켓이었다. 이곳은 19세기 후반 아일랜드가 영국의 지배 하에 있을 때 개신교 단체에 의해 설립됐다.

20세기 초반 아일랜드 정부는 시장을 대폭 리모델링하고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시장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잉글리시 마켓'이 아닌 '아이리시 마켓'으로 이름을 변경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다른 시장에서 '아이리시 마켓'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잉글리시 마켓의 이름을 변경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이곳의 이름은 '잉글리시 마켓'으로 자리매김하여 오늘날까지 코크의 대표 재래시장이 되었다고 한다.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코크의 유명한 재래시장, 잉글리시 마켓(English Market)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코크의 유명한 재래시장, 잉글리시 마켓(English Market) ⓒ 김현지

이곳은 한국처럼 물건의 값을 흥정하고 깎는 일들은 거의 없다. 한국의 재래시장을 생각하고 방문한다면 다소 낯설고 차가운 느낌일 수 있지만 이곳 역시 사람 냄새가 나는 곳임은 틀림없다. 대형 매장에 가지런히 정돈된 물건보다 조금은 거칠고 아무렇게나 정리된 물건들, 방금 들어온 신선한 해산물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어렸을 때 엄마와 함께 다녔던 한국의 재래시장이 생각났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또 2층에 위치한 카페테리아에서 파는 커피와 스콘 빵은 재래시장에서 먹던 떡볶이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성당의 종소리가 아무 때나 울려 펴지는 이유

코크 시티에는 잉글리시 마켓만큼이나 아주 특별한 곳이 있는데 바로 세인트 앤 성당(St. Annes' church)의 종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제껏 보았던 여타의 종탑들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특별히 멋있지도 않은 평범한 종탑이다.

하지만 이 종탑은 다른 교회의 것들과 다른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성당의 종소리가 아무 때나 울려 퍼진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당의 종소리는 정각 1시간마다 한 번씩, 또는 30분에 한 번씩 들린다. 하지만 세인트 앤 성당의 종소리는 특별한 규칙이 없이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때로는 익숙한 소리로 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이상한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또 소리가 클 때도 있고 작을 때도 있다.

 코크시티에 있는 세인트 앤 교회(St. Annes’ Church) 종탑
코크시티에 있는 세인트 앤 교회(St. Annes’ Church) 종탑 ⓒ 김현지
어째서 이 성당의 종은 아무 때나 울려 퍼지는 것일까? 바로 종을 치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여행자들에게 종을 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다. 5유로를 내는 조건으로 여행자들은 줄을 잡아당겨 종을 치고 덤으로 성당의 지붕에 올라가 코크 시내의 전경을 볼 수 있다.

세인트 앤 성당 종탑의 또 다른 비밀은 종탑 사면에 있는 시계의 시각이 제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시계의 목적은 정확한 시간을 전달하는 데 있지만 이 성당 종탑의 시계들은 시계의 본분을 망각한 채 각기 제멋대로 움직인다. 어느 것이 진짜 시간이고 어느 것이 가짜 시간인지 알 수 없다.

어째서 이 성당의 시계들은 제멋대로 시간을 알려주는 것일까? 바로 코크의 거친 바람 때문이다. 코크를 비롯한 아일랜드는 예측할 수 없는 날씨와 바람을 가지고 있다. 겨울 평균 기온은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거의 없지만 바람이 워낙 세기 때문에 겨울 체감 온도는 언제나 영하권을 유지한다. 코크에 있는 종탑들 중에서 이 성당 종탑의 시계만 바람의 영향을 받는 것이 신기하지만 시시때때로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부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종탑은 어쩐지 닮은꼴이다.

세인트 앤 성당의 숨어있는 이야기를 알고 나니 불현듯 우리가 사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것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우리가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들이 우리의 기준이 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코크 시티에서 경험했던 도시의 풍경은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재래시장을 통해 나에게 옛 향수를 상기 시켜 주었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종탑의 시간을 통해 내 삶의 목적과 기준이 올바른 곳을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했다. 여행은 이처럼 잊고 있었던 소중한 기억을 떠올려 주기도 하고 내가 가지고 있던 당연한 논리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소중한 삶의 스승이었다.

덧붙이는 글 |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Dublin)에서 코크(Cork)까지는 승용차로 약 3시간이 소요된다.

잉글리쉬마켓(English Market)
address: Grand Parade, Co. Cork, Ireland
website: http://www.englishmarket.ie/

세인트 앤 교회(St. Anne's Shandon Church)
address: Church St., Cork, Ireland (Shandon)



#아일랜드#코크#잉글리쉬마켓#세인트 앤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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