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7일(토) 오전 10시~오후 5시.
부산평통사는 전쟁과 분단의 현장을 찾아 평화와 통일의 희망을 심기 위해 올해 가을부터 2017년까지 '평화발자국'을 매 달 진행한다. 이 '평화발자국'은 부산 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평통사 조직이 진행하여 코스를 개발한 후 2017년에는 한반도 평화지도를 완성하는 프로젝트다.
부산평통사는 2014년에는 임진왜란을, 2015년에는 일제시기를, 2016년에는 6·25시기를, 그리고 2017년에는 민주화운동 시기를 주요 테마로 잡고, 각 시기별로 분단과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장소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 곳에서 평화와 통일의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특히 각 시기마다 한반도 평화통일에 관한 현안을 결합하여 과거를 과거로만이 아니라, 현재적 과제로 인식하기 위한 노력을 펼친다.
부산 평화발자국 해설사는 전문 여행가인 최광섭 목사(부산 NCC 회장)가 맡는다.
첫 번째 부산 평화발자국은 9월 27일(토)에 열렸다.
첫 발자국의 제목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읍성에서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왓장을 아래로 던지며 싸웠던 여성들을 기리고자 '부산가시내, 지붕위에서 무슨 일을?'로 정했다. 이들은 이름도 없이,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의녀가 된 이들이다.
부산 평통사 평화발자국은 이 의녀들을 포함하여, 임진왜란 당시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다해 왜구와 싸웠던 부산 사람들을 찾아갔다.
참가자들은 일본 집단자위권 행사가 추진되어 한반도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상기하며, 첫 번 발자국에 참가한 사람들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부산 사람들의 저항정신을 되새겼다.
45인승 좌석을 꽉채운 리무진 버스는 오전 10시 7분, 부산시청을 출발하여 첫 방문지 윤공단으로 향했다. 참가자들은 모두 기대감으로 상기되었고 어떤 분은 동학혁명가를 부르며 한껏 분위기를 돋우었다.
윤공단은 신사처럼 높은 곳에 세워져 있었다. 이 곳은 원래 다대객관 동쪽에 있었으나 1970년에 옮겨졌다. 왜구와 싸운 분의 기림처를 신사처럼 만들어놓은 당국... 역사적 유물을 모시는 데서 원칙도 기준도 없는 처사가 다시 한 번 한심할 뿐이다.
윤공단은 윤흥신 첨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으로, 윤흥신 첨사는 을사사화에서 화를 입은 윤임의 아들로 관노로 고생하다가 복권되었고 벼슬을 얻어 겨우 자리를 잡았을 즈음, 임진왜란이 터졌다. 그는 잠시 승리를 거두긴 하였으나 재차 공격해온 왜구들에게 동생과 함께 장열히 전사한다.
그의 죽음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다가 영조 대에 조엄이 자료를 찾아내어 충절이 드러났다고 한다. 참가자들은 윤공단을 돌아본 후 건너편 마을로 들어가 일부 성벽 터만 남아있는 다대진성을 돌아보았다. 사하구가 이 유적들의 의미를 새겨 보존하기를 바란다.
이 날 해설사로 나선 최광섭 목사는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이순신 장군을 영웅을 만든 정운 장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시간이 없어 가보지는 못하나 영남 지역에서 왜구들과 싸우도록 이끌고,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구와의 싸움에서 승전할 수 있도록 도운 정운 장군의 비가 다대포 몰운대에 있다는 이야기. 정운 장군이 전사한 부산포 전투에서 왜구는 100척의 배를 잃었고, 수세에 몰려 보급로 확보에만 주력했다고 한다. 역사에서 제대로 기록하지 않아도 반드시 알아야 할 사람들이 있는데 정운 장군이 그 중 한 분이리.
최 목사의 해설에 부산 살면서도 부산을 잘모르고 살았다는 개탄이 여기저기서 새어나왔다. 부산 뿐이랴?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정부, 역사에서 배우지 않는 정권 아래서 국민들은 그저 넘쳐나는 연예오락물만 접하니 당연한 일이다.
다음은 정공단을 방문했다. 흑의장군이라 부르는 정발 장군의 공덕을 기억하기 위한 장소. 좌천역 부근, 일신 병원 뒤쪽에, 역시 높은 계단 위에 자리하고 있다. 정발 장군은 부산진성을 지키기 위해 천민이라 알려진 부곡민들과 함께 죽기까지 항거하였다. 애석하게 부산진성을 빼앗겼지만 흑의장군 정발은 왜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고 애첩 애향이 함께 자결한 일도 왜장을 감동시켰다 한다. 흑의장군이 무너지고 부산진성이 함락되면서 왜구들은 파죽지세로 동래성을 공격하게 된다.
동래고 옆 부광반점 바로 앞에는 동래읍성 동문터라고 새긴 표지석이 서있다. 이 중국집 자장면이 어찌나 맛있는지 동래고 학생들이 이 자장면을 먹어서 모두 잘 생기고 건강하다는 소문이 났을 정도다. 참가자들은 이곳에서 늦은 점심으로 자장면을 사먹었고 수안역으로 이동했다.
수안역(壽安驛)은 부산 도시철도 4호선의 역이다. 지난 2005년, 수안역 공사 중에 동래읍성 석축이 발굴되었는데 이 때 해자도 발굴되었다. 발굴 당시 해자 안에는 왜구에게 무참히 학살당한 조선 민중들의 유골 수백 기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수안역 대합실 안에는 당시 유골을 재현한 해자를 비롯하여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 박물관이 조성되어 있다. 참가자들은 박물관을 둘러보고 동래읍성 전투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부산진 전투에 이어 일어난 두 번째 전투가 전개된 동래읍성 전투는, 동래 부사 송상현이 2시간을 버티며 왜군을 막아내려 사투를 벌였으나 결국 전사하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 동래성 주변에 나무를 최대한 많이 심어서 외부에서는 동래성을 관측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1592년 5월 25일(음력 4월 15일) 왜구가 동래성 앞으로 몰려들었다. 경상좌병사 이각, 경상좌수사 박홍이 지원을 왔으나 왜구의 수를 보고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도망쳤다. 양산군수 조영규 역시 성 남쪽 4km까지 진출했으나 결국 후퇴했다. 이에 송상현 홀로 울산군수 이언성 등과 함께 전투를 치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새벽에 부산진성을 출발하여 오전 10시 동래성에 도착해 전투를 피하기 위해 조선군과 협상했는데, "싸우겠다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고 패목을 세웠다. 이에 송상현은 "거기에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회답하였다.
조선군의 활은 왜군의 총포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송상현 부사와 함께, 동래읍성으로 도망쳤던 민중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나 함락되었다. 동래성 함락 후 왜구는 경상도 및 충청도로 진격해 각지의 성들을 함락시키고 충주까지 진격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의 조선군을 궤멸시킨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익힌 후에 동래읍성이 있던 동래시장으로 향했다. 참가자들은 군데군데 동래읍성 표지석들을 찾아 사진에 담으며 바로 이웃에 살아도 알지 못했던 역사적 유물들에 애정을 실었다. 동헌에 이어 송공단에 들어온 참가자들에게 최광섭 목사는 '의녀비'라 새겨진 여성들의 비석과 '철수'라는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각별히 소개했다. '철수'는 그 당시 노비들이나 천한 백성들이 가졌던 흔한 이름이란다.
그 이름의 비석을 굳이 한 곳에 세운 뜻은 부사나 첨사 같은 벼슬아치 뿐 아니라 철수와 의녀와 같이 이름없는 백성들이야말로 왜구에 맞서 더욱 열렬히 싸웠음을 후대에 알리려 한 것이라는 해설이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이라는 이야기는 참가자들 모두의 깊은 공감을 샀다.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참가자들은 일본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문제점을 소개받고 아베 일본 총리에게 항의엽서쓰기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 코스인 동래읍성 북문에 올라 오늘 하루 일과를 정리하며 소감을 기록했다. 벌써 시간은 오후 5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주제, 내용, 해설, 코스에 만족했다. 특히 해설사 부분에는 '대만족'으로 평가하였다. 부산역사를 생생하게 알게되어 좋았다, 평화에 대한 새로운 경험, 평화를 지키고 조국을 사랑해야겠다는 새삼스러운 다짐, 평화통일을 위해 애쓰는 평통사에 대한 감사 등의 소감이 이어졌다.
덧붙이는 글 | 2차 평화발자국은 10월 18일(토)에 진행된다. 참가신청은 070-7809-4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