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커피 한 잔 찌~인하게 타줘." "네? 어떤 커피 드릴까요?""그냥 알아서 한 잔 줘!"황당한 대화라고? 아니다. 커피전문점에서 일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겪는 일이다. '엔젤 인 어스(Angel in us)', 우리안의 천사라는 뜻을 가진 커피 프랜차이즈 엔제리너스에서 1004데이(10월 4일)를 맞아 1일부터 4일까지 '따뜻한 말 한마디' 이벤트를 연다는 소식이다.
이벤트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따뜻한 말로 커피를 주문하면 커피가 '반값'이라는 소리다. 엔제리너스가 말하는 따뜻한 말 한 마디는 "안녕하세요? 제가 좋아하는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이다.
엔제리너스 매장에서 위에 제시한 '따뜻한 말'이 아닌 다른 공손한 말투로 주문을 하면 20%, "아메리카노 내놔", "아메리카노 한 잔"과 같은 불친절한 멘트로 주문했을 경우엔 할인적용 없이 정가를 받겠단다. 심지어 "아메리카노"라고 커피 종류만 달랑 말하면 50% 할증해서 커피값을 받겠다고 한다(그러면 알바들은 안 해도 될 말이 하나 더 생긴다. "고객님, 50% 할증되는데 괜찮으신가요?"라고. 아흑)
알바노동자에겐 하나도 '따뜻'하지 않은 이벤트
커피전문점에서 알바를 해 본, 그리고 서비스업에서 알바를 해 본 사람이라면 이 상황이 아주 곤혹스러울 듯하다. 이런 이벤트 때문에 평소보다 '더 많은 커피'를 뽑느라 휴게시간도 없이 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커피값 할인을 받으려고 알바에게 건넨 착한 말투가 반갑기는커녕 당황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대체 이런 이벤트는 누구를 위해 만든 것일까. '따뜻한 멘트'를 받는 알바노동자? '따뜻한 멘트'를 써야만 할인을 받을 수 있는 손님?
각종 판매업, 서비스업종에서 일하면서 감정적으로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79%) 일하면서 기분과 상관없이 항상 웃거나 즐거운 표정을 지어야 한다.(85.4%) 청년유니온이 지난 9월 발표한 '아르바이트 청년 감정노동 실태조사 결과보고서' 내용(파란색 인용문 전부)을 보면 전혀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저 수치도 너무 낮다고 생각했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진상손님이 없으면 이상하다고 느낄 만큼 강도 센 감정노동에 수많은 알바들이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손님뿐만이 아니라 같이 일하는 매니저, 점장과의 관계에서 오는 감정노동도 만만치 않다. '한 번씩은 다 겪는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잦다. "그럼 서비스업에서 일을 안 하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서비스업에서 일하면서도 감정노동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혹은 조금 받으면서 일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는 것이다.
- 한 번 이상 고객으로부터 무리한 요구 및 신체적·언어적·성적 폭력을 경험했다(73.3%)- 아르바이트노동자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에 더 자주 노출된다고 느낀다.(68%)당연한 말이지만, 스스로 진상손님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아마도 실수를 한 알바 노동자에게 "여기 직원 없어? 직원이나 책임자 나오라고 해!"라고 윽박지른 경험이 직접 있거나, 목격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한 번쯤은 실수하더라도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는 알바노동자에게 "괜찮아요"라고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런 '따뜻한 말 한마디' 이벤트는 일회성이 아닌 상시적인 캠페인이 되어야 한다. 알바노동자들이 '따뜻한 멘트'로 주문 받을 수 있도록 엔제리너스 뿐만 아니라 다른 프랜차이즈기업에서도 이런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엔제리너스를 비롯한 고용주들부터 '천사'가 되어야 한다.
고객만 따뜻한 말 한마디? 알바 노동 환경부터 따뜻하게- 근무시간 대부분(3/4이상)을 서있는 자세로 일한다.(80.4%)- 근무시간 중 휴게시간 30분 이하(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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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안전보건에관한규칙(고용노동부령) 제80조(의자의 비치) 사업주는 지속적으로 서서 일하는 근로자가 작업 중 때때로 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해당 근로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의자를 갖추어 두어야 한다. ▶근로기준법 제54조 사용자는 근로시간이 4시간인 경우에는 30분 이상, 8시간인 경우에는 1시간 휴게시간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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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11월 고용노동부가 프랜차이즈별로 근로감독한 결과, 근로기준법을 미준수하는 엔제리너스 지점은 80.4%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 말은 곧 100개 점포의 엔제리너스 가운데 근로기준법(최저임금 미준수, 근로계약서 미작성, 휴게시간 미준수 등)을 지키지 않는 지점이 80곳이나 된다는 것이다.
근로기준법을 따르지 않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하는 알바노동자들이 만드는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손님들은 앉아서 커피를 마시지만, 알바들은 대부분은 서서 일한다. 의자 하나 없어 쉬지 못해 다리가 퉁퉁 부어도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대하며 커피를 뽑는다.
손님이 적은 시간에는 테이블도 정리해야 한다. 휴게시간과 의자를 배치해야 한다는 법 조항이 있음에도 법을 지키지 않는 고용주들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알바들은 손님들이 '따뜻한 멘트'를 쓰든 말든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게 될 게 뻔하다.
엔제리너스를 비롯한 많은 커피전문점에는 손님뿐만 아니라 알바노동자도 있다. 엔제리너스가 80.4%의 근로기준법 미준수율을 낮추기 위해 스스로 근로감독을 강화해야 '웃는 모습이 천사같은' 알바 노동자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근로기준법이 잘 지켜지는 곳에서 일하는 알바노동자들이어야 고객들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제대로 들릴 테니까. 이것이야말로 '따뜻한 말 한마디' 이벤트가 진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이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는 알바노조 조합원으로 프랜차이츠 커피 매장에서 7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왔습니다. 알바노조(02-3144-0936, www.alb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