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마을에 밤새 하얀 눈이 내렸단다. 장흥에 사는 친구의 말이다. 선학동 마을에 메밀꽃이 활짝 피었는데, 하얀 눈이 내린 것 같다고 했다. 지난 4일 그 풍경을 그리며 남녘으로 간다. 전남 장흥의 끝자락에 붙어있는 회진이다.
선학동은 이청준(1939∼2008)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의 배경이 된 마을이다. 그는 남도사람들의 웅숭깊은 한과 소리를 소설로 풀어냈다. <당신들의 천국>, <서편제>, <눈길>, <축제>, <이어도>, <선학동 나그네> 등이 대표 작품이다.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한 영화 <천년학>의 배경도 선학동이다. 한국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이 100번째 메가폰을 잡은 영화였다. 선학동은 공지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고 '산저(山底)'마을이었다. <천년학>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마을 이름을 아예 '선학동'으로 바꿨다. 2011년이었다.
선학동으로 가는 길목에서 영화 세트로 쓰였던 선술집을 만난다. 바닷가에서 소나무와 어우러져 고즈넉하다. 바다에서 주민들이 갯것을 채취하고 있다. 그 너머로 노력항을 잇는 다리가 보인다. 금당도, 거금도 등 크고 작은 섬도 가깝다.
시나브로 영화 속 장면들이 떠오른다. 선술집 앞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내가 영화 속의 동호(조재현 분) 같다. 풍경도 애틋하게 다가선다.
선술집 뒤편으로는 논이다. 이청준이 어렸을 때는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벌이었다. '선학동 나그네'에 잘 묘사돼 있다. '밀물이 들어 포구에 바닷물이 가득 차면 수면에 드리워진 산줄기 그림자가 한 마리 학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이었다'고.
영화 <천년학>은 의붓 남매인 동호와 송화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소리꾼 양아버지 밑에서 소리와 장단을 맞추며 자란 두 사람은 애틋한 마음을 갖는다.
하지만 마음속의 연인을 누나라 불러야 했던 동호는 괴로움에 집을 나간다. 몇 년 뒤 양아버지가 죽고 송화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제 송화를 여자로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동호. 그러나 엇갈린 운명으로 두 사람은 잠깐의 만남과 긴 이별로 자꾸만 비껴간다.
메밀꽃밭은 선학동 뒤편으로 펼쳐져 있다. 면적이 20㏊나 된다. 산자락에서 이어지는 구릉에 메밀꽃이 활짝 피어 바닷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하얀 꽃물결이 흡사 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다. 겨울에 피는 눈꽃 같기도 하다. 하얀 꽃이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과 어우러져 이국적이기까지 하다. 마을의 여러 색깔 지붕과도 만나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낸다. 황홀경이다.
메밀밭에 담긴 뒷이야기도 아리땁다. 외지인을 배려하는 마을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선학동을 찾는 외지인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생긴 일이다.
<천년학> 촬영 뒤부터 마을을 보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하지만 선술집 세트 외엔 별다른 볼거리가 없었다. 마을사람들은 괜히 미안해 했다. 먼 길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마땅히 보여줄 게 없어서였다.
주민들끼리 머리를 맞댄 끝에 경관작물을 심기로 했다. 외지인들에게 볼거리를 주면서 마을까지 아름답게 가꿀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마을 주변 밭에 유채 씨앗을 뿌렸다. 지난 2006년이었다. 그 해 봄 노랗게 물든 마을을 본 사람들이 탄성을 토해냈다. 주민들도 뿌듯했다. 더불어 행복했다. 유채밭 사이에 원두막도 설치했다. 노랗게 물든 바닷가 마을을 영상에 담으려는 방송팀도 무시로 찾아왔다.
인적 드물던 마을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마을도 활기에 넘쳤다. 마을사람들은 내친 김에 가을농사마저 포기하고 메밀 씨앗을 뿌렸다. 2008년이었다. 봄에는 유채의 노란 꽃물결로, 가을엔 메밀의 하얀 색으로 물들인 것이다.
선학동의 메밀 꽃밭이 더 매혹적인 이유다. 방문객을 배려하는 마을사람들의 예쁜 마음이 스며 있어서다. 재작년에는 농림수산식품부가 주관한 '경관 우수마을 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올해는 메밀 파종이 좀 늦었어요. 8월 말에 씨앗을 뿌리려는데, 늦장마가 찾아왔거든요. 그래서 꽃이 다른 데보다 조금 늦게 피었어요. 축제 때는 만개할 겁니다. 이달 말까지 절정을 이룰 것이고요. 그때 또 한 번 오쇼."한승길 선학동 마을 이장의 말이다.
선학동 메밀꽃 축제는 10일부터 사흘 동안 열린다. 마을에 무대를 설치하고 난타, 7080공연 등 소소한 볼거리를 마련한다. 주민들의 노래 솜씨도 뽐낸다. 간단한 체험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이 정성껏 준비하는 작은 축제다.
이청준 소설의 흔적을 따라가는 문학길은 선학동에서 진목마을로 이어진다. 메밀꽃밭을 품은 뒷산을 넘어간다. 숲길을 뉘엿뉘엿 걸으며 소설의 배경무대를 떠올릴 수 있다. 한창 무르익어가는 가을도 만난다.
선학동에서 이회진마을이나 삭금마을 쪽으로 돌아가도 된다. 진목마을은 이청준이 나고 자란 곳이다. 전형적인 바닷가 산골마을이다. 소설 속에 그려진 배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소설 속의 인물로도 가끔 등장하는 마을사람들도 만난다. 마을 한가운데에 생가가 있다.
소설문학길은 여기서 포구를 낀 삭금, 안삭금, 선자마을로 이어진다. 포구에는 고만고만한 고깃배들이 어깨를 서로 맞댄 채 쉬고 있다. 어부들은 출어를 위한 준비로 분주하다. 포구에서 만나는 해지는 풍경도 가슴 저리게 한다.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서해안고속국도 목포요금소를 지나 죽림나들목으로 나가 순천방면 남해고속국도를 탄다. 남해고속국도 장흥나들목에서 대덕 방면으로 23번국도 타고 관산읍을 지나 관흥삼거리에서 회진항으로 간다. 회진초등학교를 지나서 만나는 바닷가에 선학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