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적이건 우발적이건,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 사회는 그 사람에게 어떤 벌을 내리는 것이 옳을까.
구약성서에 나오는 것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처벌한다면 사형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사형제도는 세계적으로 점점 사라지는 추세다.
살해당한 희생자의 유족은 입장이 다를 수 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자신의 자식이나 부모가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 그럼 그 살인자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살인자가 사형당한다고 해서 죽은 가족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죽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형은 복수가 될 수 없다.
대신 한번 상상해보자. 만일 자식이 살해당했다면 그 부모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극복하기까지,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마나 큰 고통을 견뎌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가슴에 쌓인 그 응어리를 풀 수 있을지 말이다.
살인범에게 아내와 딸을 잃은 남자
유족들이 사형을 원하는 이유는, 그 외엔 마음을 풀 길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식을 죽인 사람이 교도소에 앉아서 세끼 밥을 먹고 다른 죄수들과 수다를 떨고, 나름의 취미 생활까지 한다면? 피가 거꾸로 솟을지도 모른다. 사형을 폐지한다면, 그 대신 유족에게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히가시노 게이고는 자신의 2014년 작품 <공허한 십자가>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작품 속에서 사형 제도에 대한 논쟁이나 담론을 펼치기 보다는 가족을 잃은 유족의 입장에서 사형 제도를 바라보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은 반려동물 장례 업체 사장인 나카하라. 중년의 나카하라는 11년 전 자신의 딸을 잃었다. 자신의 집에 들어온 강도에게 8살된 딸이 살해당한 것이다. 그 살인범은 검거 후 1심 재판에서 무기 징역을 선고받고 항소심에서 사형을 판결받았다.
나카하라의 비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딸이 살해되고 11년 뒤 자신의 아내가 거리에서 노숙자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또 살해당한 것이다. 10년 간격으로 자신의 딸과 아내를 모두 잃었다. 사고도 아니고 병에 걸린 것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살인범을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 자신이 직접 죽이지 못한다면 국가가 대신해 주기를 바랄 만도 하다.
유족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형 제도사형폐지론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는, 억울한 오심 때문에 사람을 죽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사형은 한번 집행하면 되돌릴 수 없다. <공허한 십자가>에서는 살인범의 변호인을 통해 사형 제도에 반대하는 이야기도 들려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주로 유족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형을 그리고 있다. 사형 판결이 나온다고 해서 그것은 유족의 승리가 아니다. 사형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겼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사형이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유족들은 "살인자가 아직 살아있지?"라는 질문으로 자신의 마음을 갉아 먹는다. 흔히 '죽음으로 사죄한다'고 말하는데, 유족의 입장에서 봤을 때 살인범의 죽음은 '속죄'도 아니고 '보상'도 아니다. 그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그 과정마저 없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형 제도에 관한 여러 가지 담론이 있지만,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들은 모두 공허하기만 하다. 사형이 집행되면 그 살인범은 이제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못한다. 대신 갱생의 길도 없어진다. 개인이건 국가건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되지만, <공허한 십자가>를 읽다 보면 피해자 가족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형을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 <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이선희 옮김 / 1만 3800원 / 446쪽 / 자음과모음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