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가져다놓은 것일까? 영회원 표지석 옆에는 꽃다발 두 개가 바싹 마른 채 놓여 있었다.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여인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바싹 마른 꽃이 애처롭게 보였다.
지난 6일, 광명시 노온사동에 자리 잡고 있는 '영회원'을 찾았다. 영회원은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무덤이다. 민회빈 강씨는 강빈으로 불리기도 한다.
햇볕은 뜨거웠으나 바람은 서늘한 기운을 잔뜩 품은 계절에 찾아간 영회원은 고즈넉하기만 했다. 애기능 저수지를 지나 영회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구불거리는 오솔길이었다. 그 길에는 나이가 400살이 넘는 느티나무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느티나무는 나뭇잎이 조금씩 붉은 기운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나무, 영회원의 영욕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400년 이상을 한 자리에 붙박여 있었으니 강빈이 이곳에 묻히던 날의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곳에 가거든 잊지 말고 느티나무를 한 번쯤 쓰다듬어 보기를 권한다. 나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영회원은 일반 사람들이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게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무덤 주변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영회원에서는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어야 했던 젊은 청상의 한은 느껴지지 않았다.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른 탓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가을 볕이 너무 따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강빈은 아주 총명한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학식이 풍부하고 지성을 겸비했으며, 곧은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강빈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영회원을 찾는 의미가 없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소현세자가 죽지 않았다면 강빈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소현세자가 조선의 임금이 되었다면 왕비가 되었을 것이나, 그이는 왕비가 될 운명이 아니었다. 오히려 푸르디 푸른 나이에 한을 품고 죽을 운명이었다.
임금의 음식에 독을 탔다는 누명... 서른다섯 나이에 사약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면서 강빈의 운명은 바뀌었다. 청나라에서 강빈은 자신의 빼어난 경영수완을 발휘할 수 있었다. 국제무역과 농사로 재산을 축적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소현세자와 강빈은 청나라 고관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와 강빈을 기다린 것은 가혹한 운명이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겨 독살했다는 이야기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뒤 고작 두 달 뒤에 소현세자가 갑작스레 죽었다. 인조는 강빈 역시 죽인다. 인조가 먹는 음식에 독을 탔고 후궁인 소용 조씨를 모함했다는 혐의였다. 그뿐인가. 소현세자와 강빈의 어린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을 보낸다.
첫째아들 경선군은 열아홉 살, 둘째 아들 경완군 열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제주도에서 죽었다. 셋째 아들 경안군은 나중에 유배에서 풀려나나 그 역시 스물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모의 비극적인 운명이 자식들에게도 이어진 것일까?
경안군이 제주도로 귀양을 떠날 때 나이가 고작 네 살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제주도로 귀양을 떠나야 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경안군은 드라마 <추노>에서 오지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왕손이다.
자신이 죽은 뒤, 어린 세 아들이 제주도로 귀양을 가고 친정마저 풍비박산이 난 것을 강빈은 알았을까? 소현세자가 죽은 뒤 인조는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고, 훗날 효종이 된다. 효종은 강빈의 무고함을 밝혀주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소현세자의 후손이 대를 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현실은 잔혹하다.
강빈의 무덤은 처음에는 아주 초라한 봉분에 지나지 않았다. 임금의 음식에 독을 탄 죄인의 신분으로 사약을 받았으니, 장례조차 변변히 치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남편의 곁이 아닌 친정의 선산에 묻혔을 터. 그래서 영회원은 애기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친정집에서는 어린 나이에 시집간 강빈을 '애기씨'라 불렀고, 그이가 묻힌 무덤이 안쓰럽고 안타까워 '애기능'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양철원 광명시청 학예연구사의 설명이다. 소현세자는 서삼릉에 잠들어 있다.
강빈이 죄가 없음은 그이가 죽은 지 70여 년이 지난 뒤에 밝혀진다. 숙종 때였다. 숙종 때 혐의가 벗겨진 강빈을 소현세자와 합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끝내 강빈은 남편의 곁으로 가지 못한 채 광명시에 남았다. 대신 무덤은 민회원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리고 고종 때 영회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편 곁으로 가지 못한 초라한 무덤... 새로 조명받는 강빈의 삶
강빈은 비록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아주 높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지만 실의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무역 등을 통해서 재산을 불릴 줄 아는 실용성을 갖춘 현명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강빈은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으며, 그에 대한 평가는 점점 더 깊이를 더하고 있다.
소현세자와 강빈의 슬픈 삶은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있다. 드라마틱한 요소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JTBC에서 방영한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은 강빈의 삶을 조명한 드라마였다. 요즘도 강빈은 드라마에 등장하고 있다. tvN에서 방영하고 있는 <삼총사>에 소현세자와 강빈이 나온다. 드라마마다 강빈은 조금씩 다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역사 속의 강빈과 드라마의 강빈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면서 드라마를 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양기대 광명시장은 "강빈을 제대로 조명해서 광명의 인물로 널리 알려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강빈은 청백리의 표상인 오리 이원익 대감과 더불어 광명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무덤은 초라하고 소박하지만 강빈은 결코 초라한 인물이 아니다. 소현세자와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오래도록 기억되면서 존경받아야 하는 존재다. 가을이 가기 전에 한 번쯤 영회원에 들러 강빈의 삶을 돌이켜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