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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국에서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이다. 나는 그 길에서 고향 출신의 한 순결한 파르티잔을 만났고, 그분이 위만군의 총탄에 불꽃처럼 산화한 북만주 깊은 산골짜기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제 철을 맞은 산국, 약용으로도 쓰이며 꽃말은 '순수한 사랑'이다.
제 철을 맞은 산국, 약용으로도 쓰이며 꽃말은 '순수한 사랑'이다. ⓒ 박도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절정>

 

(이육사와 이 소설의 주인공 허형식은 인척간이다. 곧 육사의 어머니 허길(許佶)은 허형식의 사촌누이다.)

 

빗질 토벌

 

1940년부터 일제는 만주(중국 동북삼성)에서 관동군을 40만 명에서 76만 명으로 대폭 늘렸다. 그리고는 '후방 치안을 확보한다'고, 그때까지 만주에 남아 있는 항일 세력을 대대적으로 토벌했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후 일제는 언젠가 다시 한 번 소련과 맞붙을 일전을 대비했다. 그래서 그들의 판도 내 항일무장 세력을 더욱 빗질하듯이 토벌했다. 이로써 동북에 남은 항일세력 특히 *동북항일연군 활동은 심한 곤경에 처했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주에서 만들어진 항일투쟁을 주도한 군사조직으로, 중국인과 한국인 등의 민족통일전선 성격을 띠었다. 곧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과 중국인의 유격부대를 공산당의 주도로 통합한 군사조직이다.)

 

그러자 동북항일연군 간부들 가운데 조선인 최용건(崔庸健)·김일성(金日成)·안길(安吉) 등과 중국인 주보중(周保中)·왕명귀(王明貴)·풍중운(馮㑖云) 등은 중국공산당 방침에 따라, 1940년 12월 중순부터 중소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넘어갔다. 이들은 연해주 보로실로프 근처에 있는 남(B)야영에 제1로군과 제2로군 일부가 주둔했으며, 제3로군과 제2로군 다수는 하바로브스크 근처 북(A)야영에 주둔했다.

 

 연해주 옛 보로실로프 항으로, 지금의 슬라비얀카다. 1909년 10월 중순 갑자기 안중근 의사가 이곳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를 탄 곳이기에 꼭 100년이 지난 2009년 10월 27일 필자는 안 의사의 행적을 뒤쫓아 이곳에 들렀다. 이 항구는 우리 근현대사와 매우 밀접하다.
연해주 옛 보로실로프 항으로, 지금의 슬라비얀카다. 1909년 10월 중순 갑자기 안중근 의사가 이곳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를 탄 곳이기에 꼭 100년이 지난 2009년 10월 27일 필자는 안 의사의 행적을 뒤쫓아 이곳에 들렀다. 이 항구는 우리 근현대사와 매우 밀접하다. ⓒ 박도

다만 동북항일연군 제3군장 허형식(許亨植, 조선인), 정치부주임 김책(金策, 조선인), 조직부장 장수전(張壽錢, 중국인으로 본명 李兆麟) 등이 활동하고 있는 제3로군 일부만은 북만(北滿)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김책과 장수전은 소련 경내로 넘어갔다가 다시 북만에 돌아와 활동하는 등, 중공당 방침에 따라 중소 국경을 수시로 넘나들었다. 하지만 유독 허형식 만은 단 한 번도 소련 경내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북만에서 동북의 인민들을 보살피며, 소부대 활동으로 항일, 반제, 반봉건투쟁을 가열하게 펼쳤다.

 

소부대 활동

 

1941년 10월, 허형식 군장은 제3로군 총지휘부의 지시에 따라 자기가 거느렸던 제6, 제12 지대의 150여 명의 동지들을 소련으로 보냈다. 그런 뒤 자기 부대 병력 극히 일부으로 국내(북만)에서 항일활동을 줄곧 벌였다. 허 군장은 잔류병력을 다시 둘로 나눠, 한 갈래는 제12지대장 박길송(朴吉松, 조선인)이 지휘하는 소부대와 연계시키고, 다른 한 갈래는 장서린(張瑞麟, 중국인)이 지휘하는 소부대와 연계하여 파언, 목란, 동흥 일대를 관장했다.

 

소부대 활동은 일제 관동군 및 만주군에 대한 정보수집과 그들의 거점을 기습 공격하며 인민들을 보호했다. 그러면서 인민 속에 파고들어가 유격전으로 비밀 항일운동을 벌이며, 소부대 활동에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마련하고, 적정을 정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허형식이 관장하는 이들 소부대는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에 경안, 철력, 파언, 목란, 동흥 등 광대한 지구에 항일구국회를 조직하고, 회원 200여 명을 모집하는 등, 큰 업적을 세웠다. 허형식은 위험을 무릅쓰고, 관동군과 위만군 토벌대들의 첩첩한 봉쇄를 우회하거나 흥안밀림을 꿰뚫고 다니면서 이들 소부대 활동사업을 지도 격려했다.

 

1942년 7월 하순, 허형식은 경호원 진운상(陳雲祥, 중국인)만 데리고 헤이룽장성 파언·목란·동흥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부대의 사업을 지도코자 순시했다. 그는 장서린 소부대장의 활동으로 동흥의 두도하자, 이도하자, 삼도하자 등 산기슭의 숯구이노동자들을 항일회원으로 끌어들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허 군장은 장서린 소부대의 빛나는 업적을 극구 치하하며, 그 업적을 문건으로 작성하여 중국공산당에 보고케 했다. 장서린은 허 군장에게 하룻밤이라도 그곳에서 묵고 가라고 간청했지만, 허형식은 일언지하 거절했다. 갈 길도 멀거니와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중국 헤이룽장성 경성현 청봉령 들머리 북만 벌판으로, 허형식 장군이 유격전을 펼친 곳이다(2000. 8. 현지답사 때 촬영).
중국 헤이룽장성 경성현 청봉령 들머리 북만 벌판으로, 허형식 장군이 유격전을 펼친 곳이다(2000. 8. 현지답사 때 촬영). ⓒ 박도

"나야 이미 목숨을 내놓은 사람이지만, 내가 여기 머물다가 이곳 소부대원들이 화를 입을지도 모로오."

"하지만…."

"일 없소. 일본이 패망하고 조중(朝中) 두 나라가 해방되는 날, 내 이곳에 가장 먼저 와서 그대들에게 잔치를 베풀겠소. 장 동지, 겨울이 깊으면 봄은 멀지 않는 게요. 그럼, 일제의 패망 그날까지 수고하시오."

"허 군장 동지, 가시는 길에 일제의 사냥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이즈음 놈들은 곳곳에 사냥개를 풀어놓았답니다."

"알겠소."

 

장서린은 그래도 불안하여 굳이 그곳 지리에 밝은 왕조경 부대원을 길안내자로 붙여주었다.

 

"일 없어요."

"아닙니다. 제 관할인 이곳 동흥령을 벗어날 때까지 만이라도."

 

왕조경은 권총과 장서린이 준 멧돼지고기를 배낭에 챙긴 뒤 따라나섰다. 1941년 8월 2일 하오 허형식은 경호원 진운상과 함께 왕조경의 길 안내를 받으며 경성현 청봉령(靑峰嶺) 쪽으로 나섰다. 그들은 그 일대를 수색하는 위만군 토벌대를 피하고자 일부러 사람의 발길이 닫지 않은 깊은 산속 밀림을 헤쳐 나갔다.

 

세 사람이 장서린 소부대를 떠나 20여 리를 걷자 그새 날이 어두웠다. 그날은 음력 6월 21일 하현이라 달도 뜨지 않았다. 길이 험하여 더 이상 산길을 걸을 수 없었다.


청봉령 소릉하 계곡

 

그들은 날이 저물녘에야 청봉령 소릉하(邵凌河) 계곡에 이르렀다. 그곳 지리에 밝은 왕조경은 밥을 짓고, 세수하기 좋은 산기슭 개울 곁에다가 야영지를 잡은 뒤 땅을 다졌다.

 

"그만 됐소."

"아닙니다. 군장님! 잠자리 바닥이 평평해야 편히 주무실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일 먼 길을 갈 수 있지요."

 

그런 뒤 왕조경과 진운상 두 사람은 언저리 계곡에서 풀과 나뭇잎을 구해와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자리를 펴 숙영지를 만들었다. 그런 뒤 싸리나무와 마른 삭정이를 한 아름 구해 왔다.   

 

"웬 걸 그렇게 많이?"

"저녁밥도 짓고, 한밤중에 우둥불(모닥불)이라도 켜면 심심치 않을뿐더러 산 짐승도 쫓습니다."

"좋은 발상이오."

 

허 군장은 위만군 토벌대가 조금은 염려스러웠지만, 이 산중에까지 그들이 뒤쫓겠는가. 허 군장은 방심했다. 북위 47도 위도를 넘은 북만 헤이룽장성 산속 날씨는 8월에도 해만 지면 조선의 가을보다 더 찼다. 게다가 북만의 깊은 산중에는 늑대나 여우, 승냥이 등 사람에게 덤비는 사나운 짐승들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항일연군 전사, 곧 항일빨치산들은 일제에게, 마적에게 쫓기고, 때로는 산짐승에게도 목숨을 잃곤 했다. 그들은 일제의 총칼에 맞아 죽고, 북만주의 영하 40~50도 강추위에 얼어 죽고, 황량한 벌판을 헤매다 굶어 죽었다. 그래도 그들은 일제에 투항치 않고, 묵묵히 고난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자신의 안락한 삶보다 조국 해방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에 스스로를 던졌기 때문이다.

 

 헤이룽장성 경성현 청봉령 들머리마을 풍림촌 인민들로, 필자가 2000년 8월 현지답사를 갔을 때 그들이 필자 일행을 환송하고 있다.
헤이룽장성 경성현 청봉령 들머리마을 풍림촌 인민들로, 필자가 2000년 8월 현지답사를 갔을 때 그들이 필자 일행을 환송하고 있다. ⓒ 박도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이 '들꽃'은 주 2회 연재로 매주 월, 목요일에 송고할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작품은 동북아역사재단 장세윤 연구위원의 <허형식 연구> 및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 연세대 신주백 교수의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 허은 여사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중국동포사학자 서명훈, 김우종 선생의 저서 및 증언, 기타 동북에서 발간된 여러 문헌과 임은 허씨 문중의 허벽, 허호 선생 등 여러분의 도움으로 집필하고 있음을 밝힌다.


#들꽃#박도 실록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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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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