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1일 새벽 5시, 여명의 빛이 어둠을 뚫고 일어서는 그 시각, 나는 집을 나섰다. 아직 뇌리는 지난밤의 시간 속에 갇힌 듯 꿈결에 머물러 있고 길은 어둡고 적요했지만, 내 몸은 그저 가볍기만 했다. 서울에서 열리는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식과 문화제에 동참하기 위한 발걸음이기 때문이었을까? 저절로 흘러나오는 휘파람을 날리며 나는 참석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버스를 향해 나아갔다.
대구 중구 대신동 서남역 출구에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도착했을 때에도 아직은 먹물을 뿌린 듯 사방이 캄캄했다. 그래서 서로를 알아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들 함박웃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특히 동학 행사에 처음 오는 낯선 얼굴들과는 더욱 반갑게 목례를 교환했다. 오늘의 이 낯선 참석자들은 동학혁명이 전라도 사람들만의 창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지금 이 시대에 재현해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에 항거한 전라도 농민들만의 봉기가 아니다. 동학농민혁명 2차봉기 초기인 1894년 8~9월에는 경상도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경북 성주에서는 진압군이 가옥 1천여 채를 한꺼번에 불 질러 연기가 사흘 동안 100리에 자욱했고, 경남 하동도 읍내가 완전히 전소되었다.
이는 주된 전쟁터에만 한정하여 생각한 결과 동학농민혁명을 특정 지역만의 운동으로 잘못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전봉준 공초>에도 동학농민군에는 전국 각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이 전라도 출신들보다 더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버스는 어느덧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도착했다. 과연 전국 이곳저곳에서 온 사람들로 광장은 붐비고 있었다.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진행 중인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식이 커다란 화면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박남수 교령의 대회사, 김대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의 기념사, 김석태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의 감사 인사, 그리고 박원순 서울시장과 송하진 전북지사 등의 축사는 한결같이 "사람, 다시 하늘이 되다!"라는 대회 구호를 생생하게 실감시켜 주었다.
서울역사박물관 광장 특설무대에서 진행된 문화축제도 감명적이었다. 브라스밴드와 어린이합창대의 가을빛 선율은 음악에 귀 기울인 참석자의 마음을 흠뻑 적셨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회' 개최지인 보은의 극단 꼭두광대가 보여준 '검결'은 동학정신을 참석자들의 마음속에 되새겨주었다.
특설무대 왼쪽 천막 아래에는 다양한 부대행사들도 마련되었다. 사발통문의 전봉준 장군 이름 옆 빈 공간에 자신의 성명 써넣기, 동학혁명 판화 직접 제작해 보기, 동학농민혁명 골든벨 등은 특히 자녀를 대동한 부모들의 동참을 이끌어내었다. 캘리그래피, 페이스페인팅, 포토존, 캐리커처 체험 공간들도 인기몰이를 했다.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여 공모한 포스터 전시회도 눈길을 끌었다. 대학·일반부 대상을 받은 강수현·김소라 공동창작 <고귀한 희생, 그리고 120>은 1을 눈물, 2를 농민, 0을 전봉준 초상으로 형상화하면서 "염원의 눈물, 고귀한 희생,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찬란한 정신문화유산입니다"하고 외쳤다. 또 고등부 대상을 받은 이은서의 작품은 동학농민혁명을 "숭고한 희생으로 일궈낸 평등의 디딤돌"로 정의했다.
행사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일제히 시청에서 경희궁까지 걸었다. 더욱 극심한 탄압을 불러일으킨 단초가 되기도 했지만 민중들을 동학교단으로 결집시키는 역할도 했던 광화문 복합상소와 교조 신원운동을 기리는 걸음이었다. 울긋불긋한 깃발이 창공을 가득 메우자 문득 서울은 단풍이 들었다. 나는 깃발 아래를 뚜벅뚜벅 걸으며 <동학 행진곡>을 조용히 읊조렸다.
정의와 자유 위하여 피 흘린 위대한 역사창생의 힘 우리 광명은 동학뿐이었었네그 깃발 아래 우리는 얼마나 힘차게 싸웠나들어라 개벽의 깃발을 용감한 우리 용사야빛나는 우리 역사를 등에 지고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