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 급진주의는 모든 전제에 대한 의문을 던지며 설사 비웃음을 살지라도 통찰과 대안을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리치 박사가 쓴 저서의 가장 위대한 가치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러한 인간적 급진주의를 표방했다. 그는 전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해방시키는 효과를 준다. 틀에 박히고, 생기 없고, 고정관념에 가득 찬 관념의 감옥 문을 활짝 열고 생명 가득한 세상으로 나올 수 있게 해준다.(본문 135~136쪽 중에서)에리히 프롬(1900~1980)이 이반 일리치(1926~2002)가 쓴 <의식의 축제>(1970년) 서문에서 한 말이다. '인간적 급진주의', 참으로 일리치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일리치의 책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느린걸음 펴냄)는 짧은 에세이이지만 그의 이런 '인간적 급진주의'를 잘 드러내 준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성장 추구 시대에 분배를 말하는 것 자체가 불순할 수 있다.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을 통하여 소득 불평등을 지적하고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분배방법으로 누진적인 부유세를 들고 나오자 전 세계가 열광하는 것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쓸모없는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미 이반 일리치 같은 선각자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그는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서 우리나라의 박근혜 정부를 비롯하여 경제성장을 모토로 한 세계의 정부나 기득권층이 참 불편할 수 있는 표현들을 마구 쏟아낸다. 그는 현대사회의 성장추구주의는 인간을 쓸모없게 만드는 사회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람이 사람답게 되려면, 즉 사람이 쓸모 있게 되려면, 산업체계로부터 해방되어야 하고, 전문가로부터 탈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초고속 교통이 오히려 시간을 잡아먹고, 고도화된 의료체계는 더욱 병을 만들고, 선진화된 교육은 더욱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시골은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양식은 집 곁의 논이나 밭에서 가져왔다. 빠른 산업화는 도시화를 앞당겼고 더욱이 심어서 먹는 것보다 사서 먹는 시대가 되었다. 심으며 거둬야 하는 노동은 직장생활을 함으로 얻은 소득이 대체했다.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다양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현대사회를 편리하다고 생각한다. 실은 그 반대다. 몇몇 사람들에 의해 조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순전히 내 생각이다), 농사를 지어 먹고 살던 농부가 싼 값에 들어오는 수입 농산물을 사먹게 되었다. 농산물은 일부 기업화된 부농들에 의해 재배되고 그들은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농산물을 재배한다.
농산물이 소비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개선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맛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다 값을 서서히 올린다. 어쩔 수 없이 대다수의 소비자는 부농들(전문가)의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다. 편리한 게 아니라 소비자는 쓸모없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다시 농토로 가서 농사를 짓는다 해도 가격경쟁력에서 이미 전문가가 된 농사전문기업을 따라갈 수 없다. 대부분은 농사짓는 법을 이미 잊었다. 저자는 특별히 의사, 건축가, 기업가, 정치가, 교육자, 군인, 판사, 경찰관, 다국적 마트 등을 신종전문가로 말한다. 그렇게 자신을 쓸모없게 내버려둔 소비자는 몇몇 사람들(정치권력과 전문가그룹)에 의해 조종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떻게 '가난하게 만드는 부'로 가는가우리는 풍요의 시대를 살지만 노동의 신성함이 사라진 거짓 풍요를 즐기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반 일리치가 말하듯, '가난하게 만드는 부'를 기꺼이 즐기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부는 일부 기득권층만 누리는 부로 힘없는 사람에게서 자유와 해방을 빼앗는다.
사람들은 지금은 '위기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어제의 경제성장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고사는 이들에게는 기회라고 말한다. 그 예로, 사회적 소외를 먹고사는 교사, 건강을 해치는 노동과 여가 위에서 번창하는 의사,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서 걷은 돈으로 복지를 분배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인들이 그들이라고 말한다.
무더기로 쏟아지는 상품은 사용가치의 자율적 창조가치를 상실하게 하고, 시장 의존 사회에서 필요를 만들어내어 전문가들이 하라는 대로 움직이게 만든다. 시장을 움직이는 전문가 그룹에 대항하는 것만이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누리는 길이다.
전문가 그룹이 만들어 놓은 규범 속에서 인간은 더욱 고립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만든 거짓 필요를 채우기 위해 직장생활을 한다. 그렇게 되면 직장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필요를 채우고자 기하급수적으로 상품이 증가할 때 사람은 무기력해진다. 농사를 지을 수도, 노래를 부를 수도, 집을 지을 수도 없다.
현대사회는 집을 짓고자 해도 정치가와 건축가 그룹이 만든 규범에 맞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어렸을 때는 건축허가란 걸 몰랐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건축허가를 받고 건축전문가에게 맡겨야 집을 지을 수 있다. 이는 인간이 더 평등하고 자유롭게 발전한 게 아니고 더 속박하는 방향으로 된 것이다.
현대사회는 '필요'가 곧 '상품'이 되었다. 상품은 전문가가 쥐고 있다. 전문가를 따라가다 보면 정치신념과 만나게 된다. 억지로 그 신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인간은 '가난하게 만드는 부'로 점점 더 빠져간다. 저자는 이런 현대를 아래와 같이 규정한다.
모든 세대가 삶을 빈곤하게 만드는 풍요를 광적으로 쫓느라 자유를 모두 양도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정치를 역사상 최초로 복지수령자의 불만을 조직하는 것으로 바꾼 다음에는 전문가 전체주의로 덮어버린 시대(본문 57쪽 중에서)산업사회의 환상은 구원받기 위해 종교에 귀의했던 것처럼 전문적 서비스의 최고 관리자인 국가에 거는 기대로 바뀌었다. 병원, 학교, 복지시설은 현대의 대성당이 되었고, 부자들은 상품 속에 든 필요에 중독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필요가 만든 환상에 마비된다. 저자는 "현대인은 어디서나 감옥에 갇힌 수인"이라고 규정한다.
노동의 신성성을 상실한 시대에 "사회적 관계로써의 직업이라면 차라리 실업을 택하라"는 말에는 의연한 각오마저 들어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귀농하여 행복한 이들, 산속에 사는 자연인들이 생각난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이제라도 성장을 놔두고 분배로, 이제라도 고도성장의 망령에서 깨어나 자연으로 돌아갈 여유를 정치가와 전문가 그룹이 갖기를 소망한다.
덧붙이는 글 |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이반 일리치 지음 / 느린걸음 펴냄 / 2014. 9. / 145쪽 / 1만20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