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7번방의 선물>은 1972년 강원도 춘천시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파출소장의 10살 딸을 성폭행한 뒤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1987년 출소한 정원섭(80) 목사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검찰 수사 때부터 무죄라고 주장했지만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후에야 재심을 거쳐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관련 기사 :
"무죄판결문 들고 아들 묘에 갈 겁니다").
여느 과거사 사건 피해자들처럼 정 목사도 재심 판결 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금을 청구했다.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 33부·재판장 박평균)는 2013년 7월 15일, '피고 대한민국'은 정 목사와 그 가족들에게 국가배상금 원금 약 24억 원과 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무죄 확정 판결에 이어 국가배상금 지급 판결로 억울한 과거를 위로받는 길이 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원섭 목사는 항소심(서울고등법원 민사8부·재판장 배기열)과 상고심(대법원 2부·주심 신영철 대법관)에서 '국가배상금을 청구할 수 있는 시효기간이 끝났다(소멸시효 완성)'며 기각 당했다. 재심 무죄판결 확정으로 국가배상금을 청구하려면 형사보상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2013년 12월 12일 판결 때문이었다.
그런데 9월 17일 헌법재판소는 대법원 판결로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했다는 정 목사의 주장을 살펴보기로 했다. 의외의 결정이었다.
헌법재판소법 68조는 기본적으로 법원 재판은 헌법소원심판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는데다 청구 요건도 까다롭게 두고 있다. 그럼에도 헌재가 정 목사의 청구를 정식 심판에 회부한 것은 대법원 판결의 위헌성 여부를 살펴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다는 뜻이다.
과거사 피해자 울린 대법원 판결, 헌재 심판대로
이 문제의식은 대법원의 12·12 판결과 연결해서 봐야 한다. 이번에 헌재 심판대에 오른 것은 정원섭 목사의 국가배상금 소송이지만, 그 원인은 지난해 12월 12일 국가배상금 소멸시효를 형사보상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로 대폭 줄인 대법원이 제공했다. 이 판결은 정 목사 같은 과거사 사건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린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과거사 사건 특성상 재심으로 누명을 벗고, 국가폭력 피해를 정당하게 보상받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 때문에 한쪽에선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는 시효가 없어야 한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헌재 역시 국가가 신체의 자유라는 중요한 기본권을 침해한 경우 소멸시효를 짧게 할 합리적 이유 없이 형사보상청구 기간을 무죄확정 후 1년 내로 제한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2010년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2013년 12월 12일 대법원은 갑작스레 '6개월'이란 소멸시효 기준을 정했다. 뚜렷한 근거조차 없었다. 이전까지 법원은 민법을 근거로 재심 무죄판결 확정일로부터 3년 내에 국가배상금 청구소송을 제기한 경우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곤 했다. 대법원의 12·12 판결은 이 흐름을 하루아침에 뒤집어버렸다.
이후 과거사 피해자들은 국가배상금 청구소송에서 줄줄이 기각 당했다. 형사보상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하고 열흘 정도 뒤에 소송을 제기한 정 목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뚜껑은 열어봐야 알겠지만... "헌재도 중대성 인식"그들은 마지막으로 헌재 문을 두드렸다. 정 목사의 헌법소원심판을 맡고 있는 윤천우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13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다른 사건 피해자들도 국가배상금 소멸시효 문제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거나 위헌법률심판제청 신청을 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법원 판결은 대개 헌재 심판대에 오르지 못했다. 윤 변호사 역시 "90%이상의 확률로 각하될 것이라 예상했다"고 말했다. 뚜껑은 열어봐야 알겠지만, 헌재의 이번 심판 회부 자체가 의미 있는 이유다. 헌재는 헌법소원심판이 청구되면 재판관 3명으로 꾸려진 지정재판부의 사전심사를 거쳐 만장일치로 각하를 결정한다. 정원섭 목사의 경우 안창호·김이수·조용호 재판관이 있는 제3지정재판부 가운데 누군가 '각하는 안 된다'며 이의를 제기한 셈이다.
윤 변호사는 "헌재도 사안의 중대성을 인식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헌법소원심판은 대법원과 정면충돌할 수도 있기에 헌재에게는 어려운 사안"이지만 "그래도 대법원 판결은 법리적으로 문제가 많다"고 강조했다. 윤 변호사는 헌재에 낸 청구서에서 무려 16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대법원 판결은 정 목사의 기본권을 침해했고, 법적 근거가 없는 부당한 판결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정 목사는 올해로 만80세다. 그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런데 헌재 결정은 보통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나온다. 1년을 넘기는 경우도 있다. 정 목사는 과연 헌재 결정을 볼 수 있을까. 마지막 선물을 바라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