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타 유럽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6~8월의 여름에 아일랜드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항상 시간을 확인해야 한다. 북유럽의 백야처럼 아일랜드도 6월에는 밤 10시 넘어서야 해가 저물기 때문이다.
눈으로 느끼기에는 오후 2~3시 정도의 햇살이지만 시계를 보면 오후 6시가 넘어가고 있다. 여행자들에게는 여행하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지만 레스토랑이나 펍을 제외한 일반 상점들은 6시면 문을 닫는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해가 길다고 마냥 관광지를 많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이언트 코즈웨이에 가던 날
우리가 자이언트 코즈웨이(Giant Causeway)를 간 날도 일년 중 해가 가장 긴 6월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집에서 3시간 반을 달려 북아일랜드에 도착했고, 근처의 해안도로와 다른 곳들을 구경한 후 7시가 다되어서야 코즈웨이에 도착했다.
북아일랜드의 해안가 경치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이유도 있었지만 대낮처럼 밝은 날씨는 우리를 시간의 절대적인 통제 속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 결과 우리는 최종 목적지인 자이언트 코즈웨이에 예상보다 늦게 도착하는 과오를 범했다. 아니나 다를까 코즈웨이 앞 관광 안내소 및 매표소의 문은 이미 닫혀져 있었고 어렵게 이곳까지 온 우리 가족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돌아갈 것인가… 내일 다시 올 것인가…..'보통 이런 경우에 포기가 빠른 나와 달리 남편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편이다. 남편은 차에서 내려 관광 안내소 근처를 기웃거리며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남편의 노력과는 달리 내 마음속은 이미 숙소에 들어가 어디서 저녁을 먹을지, 꼬인 일정은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차 있었다.
"자기, 관광 안내소 옆길로 내려가면 코즈웨이에 갈 수 있대!"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남편은 주변에서 일하던 직원을 찾아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코즈웨이로 내려갈 수 있는 정보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닌가! 이럴 땐 남편이 한없이 사랑스럽고 존경스럽다. 기회가 없다고 생각될 때조차 한 번 더 문을 두드리는 남편의 패기가 멋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코즈웨이는 무료 입장이 가능한 곳이다. 하지만 관광지의 동선은 차를 주차하면 관광 안내소로 자연스럽게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입장료를 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코즈웨이와 관련된 작은 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고 박물관의 출구는 코즈웨이로 내려갈 수 있는 길과 연결되어 있다. 처음 오는 관광객들은 관광 안내소로 들어가서 입장료를 내야 코즈웨이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동선이다.
"늦게 도착해서 입장료를 아끼니까 더 기분이 좋은데?" 그날만큼 관광지에 늦게 도착한 것이 기분 좋은 적도 없었다. 뜻하지 않은 이벤트 당첨 덕분에 아주 멋진 저녁식사를 무료로 한 느낌이랄까. 그렇게 우리 가족의 더 신나는(?) 자이언트 코즈웨이 투어는 시작되었다.
한국말로 번역하면 '거인의 둑길'인 이곳은 지명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하나는 어떤 거인이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그 여인을 이곳으로 데려오기 위해 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두 거인이 서로 자기 힘이 세다고 주장하며 싸움을 하기 위해서 이 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관광안내소에서 코즈웨이까지는 걸어서 20~30분 정도 소요된다. 북아일랜드 대서양 끝자락에 위치한 긴 산책코스를 따라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면 '30분이 이렇게 짧은 시간이었나?'라고 느낄 만큼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은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을 잊게 만든다.
자이언트 코즈웨이는 해안을 따라서 거대한 둑길이 형성되어있는데 가장 처음 보이는 것이 Little causeway, 중간 즈음에 보는것이 Middle causeway, 마지막에 보는 것이grand causeway이다. 특별한 경계가 있기보다는 처음에는 작고 둥근 돌멩이들이 많이 보이고 점점 더 큰 돌멩이들이 보이다가, 마지막에는 아일랜드 달력에 항상 등장하는 크고 선명한 육각형 모양의 돌멩이들을 끊임없이 볼 수 있다.
엄청난 '자연의 숭고함'을 경험한 순간
여름이라 그런지 저녁 시간이었지만 코즈웨이의 경치를 담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옆 호텔에 투숙하며 산책을 나온 것처럼 보이는 노부부도 보였고, 사진작가들의 모습, 우리와 같은 가족의 모습, 해상 안전훈련을 하는 해양경찰들의 모습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가 원하는 것을 보고 담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과거 화산의 급격한 활동으로 만들어진 주상절리를 가까이서 보고 걸어 보고, 만져보는 감격은 생각보다 더 컸다. 제주도 주상절리의 약 10배 규보 정도 될 법한 이곳의 매력은 직접 만지고 걸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자연의 힘으로 이런 곳이 생겼을까? 어떻게 사람이 만들지도 않았는데 수십 만 개의 육각형 모양의 돌들이 만들어졌을까? 아일랜드의 곳곳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자연의 신비와 힘 앞에서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는 것이다. 스스로 더 겸손해진다.
이곳에서 느끼는 감정을 적절한 단어로 표현하기는 힘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수십 개의 미사여구를 다 붙이는 것은 왠지 이곳의 느낌을 왜곡시키고 축소시키는 것 같았다. '숭고하다'고 하면 그나마 적절한 표현일까?
끝없이 펼쳐진 대서양의 파도와 그 경계가 모호한 하늘 아래 짙은 현무암의 돌덩이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촘촘하게 배열되어 있는 모습은, 이제까지 내가 보았던 어떤 자연의 풍경보다 아름다웠고 고귀했다.
그곳에서 나는 한없이 작은 존재로 느껴졌는데, 그 느낌이 결코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도저히 내가 이길 수 없는 존재 앞에 섰을 때는 내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찰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육각형의 현무암 돌멩이들 사이에서 깨달았다. 그렇게 자이언트 코즈웨이에서 나는 또 한번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덧붙이는 글 | 자이언트 코즈웨이(Giant Causeway) 정보 사이트
http://www.nationaltrust.org.uk/giants-causeway/
* 여행자 관광 안내소 입장료: 성이 8.5 파운드, 어린이 4.5파운드
* 관광 안내소는 입장료가 필요하지만 관광 안내소 옆 길로 내려가면 코즈웨이 산책로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