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의 뒤를 이어 우리 사회에 몇 권의 논쟁적인 소설을 쏟아내 구속까지 됐던 장정일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의 소설이 영화화되고 다시 논쟁 대상이 되던 그가 십여 년 전부터 쓰고 있는 독서일기도 읽은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작년 목수정의 또 하나의 독서일기라고 할 수 있는 <월경독서>에서 장정일을 그의 시집, <서울에서 보낸 3주일>과 함께 만나게 된다.
그래서 내 책상에 꽂혀 있던 그의 또 다른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읽어보고 그의 진화된 최근의 독서일기라고 할 수 있는 <장정일의 공부>를 사서 읽을 기회를 갖게 됐다. 목수정이 말 한대로 장정일의 첫인상은 내게도 '만년 재수생 같은 몰골의 젊은 사내'다.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과 머리카락 없는 머리는 중학생 스타일임으로 그의 최종학력이 중졸이라는 사실을 더욱 부각시켜놓았을 뿐 아니라 많은 사연을 내포했다.
지난주 박웅현이 우리가 잊고 있는 창의성과 감성을 일깨우는 독서법을 소개했다면, <장정일의 공부>는 진정한 독서의 목적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실로 우리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자라서는 학교의 선생님으로부터 '항상 중용을 취해라',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마라', '균형을 잡는 게 중요하다'고 배우고 그렇게 살도록 다짐 받는다. 10의 중간은 5의 언저리일 것이지만 100의 중간은 50의 언저리며, 1000의 중간은 500의 언저리다.
이런 식으로 중용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 사안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보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위치에 서 있게 된다. (중략)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마흔 넘어 새삼 공부를 하게 된 이유는 우선 내 무지를 밝히기 위해서다. 극단으로 가기 위해, 확실하게 편들기 위해, 진짜 중용을 찾기 위해!"
권력의 주체'문사철'의 전 영역을 아우르는 그의 독서는 '권력과 사회의 해부와 해체'를 위한 도구로 보인다.. 이덕일의 역사평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는 노론 권력이 득세하게 되는 과정과 왕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하는 권모술수, 그리고 현재에 이르고 있는 그 세력의 잔재를 고발한다.
<당신들의 대한민국>과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라는 책들을 통해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주체여야 할 우리들도 방기하고 있는 부조리들, 이를테면 조교가 교수의 마당쇠나 마찬가지인 우리 대학사회의 봉건성과 양심적 병역거부와 같은 민감한 영역까지 고발한 박노자를 소개고 있기 때문이다.
또 19세기 중국의 학자, 이종오가 쓴 <후흑학(厚黑學)>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맹자의 성선설의 기본이 되고 있는 측은지심을 의심한다. '측은한 마음'으로 번역되는 측은지심은 분명 '출척측은(怵惕測隱)'이라는 말에서 비롯됐고, 출척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이는 '내'가 두려운 마음이 발생함으로써 측은한 마음 또한 생긴다는 것인데 내가 없다면 측은한 마음 또한 없으니 나를 위해 존재하는 두려움이 확대되어 측은한 마음이 파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대의 권력자들은 '출척'은 빼버리고 '측은'만 남겨두어 반쪽 짜리 철학으로 우민화했다는 주장이다.
<후흑학>은 '면후흑심(面厚黑心)' 즉, 얼굴이 두껍고 속은 시꺼먼 권력자들의 속성을 고발하고 있는 책으로 과거의 리더가 취한 처세술을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 이종오는 말한다. 현대의 도자는 면후흑심만으로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시대라고.
역사를 통해 본 미국과 이스라엘엠마뉘엘 토드의 <제국의 몰락>,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을 통해 장정일은 미국의 본질을 파고든다. 1776년 독립 선언 이후 북아메리카를 온전히 접수한 미합중국의 민주주의가 지향하고 있는 가치를 말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철거되고 구소련이 해체되자 군사 강국으로서의 미국은 무용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당연히 '국가적-민주적' 국가로 돌아갔어야 할 미국은 '자신의 부가 생산 활동에서 나온 게 아니라, 외부 세계에 대한 정치적 지배의 결과로 이룩됐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재군사화를 도모한다. 군비확충과 군소국가에 대한 간섭(무력침공)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제국적-과두적'국가를 지향한 것이다.
이러한 미국에게 세계가 바치는 조공의 내역은 첫째, 미국이 참전하는 각종 전쟁에 군비를 각출하기 둘째, 미제 무기 구입하기 셋째, 아랍의 석유 생산 지역을 미국의 통제권에 맡기기 넷째, 달러를 세계의 기축화폐로 인정하기 등이다.
시오니즘이 곧 나치라는 등식을 풀이하는 과정에서 장정일은 랄프 쇤만의 <잔인한 이스라엘>과 테오도르 헤르츨의 <유태인국가>를 참고한다. 제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유럽에 횡행하던 반유태인 정서를 간파한 시오니스트들은 유럽에서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를 묵인 또는 동조하는 한편으로 전쟁자금 지원 등의 물밑접촉을 통해 유태인국가 건설을 위한 강대국들과 모종의 거래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몇 안 되는 시오니스트들이 현재의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다고.
장정일은 한 가지 사안에 대한 시각을 갖기 위해 여러 권의 서적을 탐독한다. 주제에 대한 각 서적들의 관점을 분석하고 팩트의 진위여부를 확인한다. 그래서 사안에 대한 논조가 깊이가 있으면서 분석적인 글이 놓치기 쉬운 읽는 재미를 확보한다.
그가 이덕일의 책에 대한 평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말이다. "무릇 기설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의 글은 어딘지 부자연스럽고 힘겹다. 기설은 문장, 논리, 자료인용, 그 모두가 과잉과 결핍의 조합이다. 때문에 금세 허점이 드러나고, 읽기가 싫어진다. 하지만 이 책에는 어떤 과잉이나 결핍이 드러나지 않는다.'
장정일의 글 또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장정일이 독서를 통해 체득한 공부법은 제도권에서 제대로 된 책 한 권 읽지 못하고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 졸업한 헛똑똑이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내공을 자랑한다. 2006년에 발행된 이 공부법이 5년여동안 12쇄나 발행될 수 있었던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장정일의 공부> 장정일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주), 2006년 11월 13일 초판 발행, 2011년 10월 12쇄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