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티-공산성을 연결하여 사람들과 걷고 싶었다필자는 올해 초에 세웠던 계획 중 하나를 성공적(?)으로 실행했다. '2014년 버킷리스트' 중에 한 가지를 달성한 것이다. 작심삼일로 깨진 계획들을 보며, 항상 뒷맛이 개운치 않은 연말을 맞이했는데 올해는 나름대로 흡족하게 제야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필자는 충남 공주에 있는 우금티와 공산성을 연결하는 도보여행길을 개척하고, 그 길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동학농민군들이 그토록 넘고자 했던 우금티 고개와 그토록 가고자 했던 공주성(공산성)을 하나의 선으로 이어, 사람들과 함께 트레킹을 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제주올레와 지리산둘레길 등, 이미 600개가 넘는 도보여행길이 있음에도 굳이 '우금티-공산성' 구간을 새로 연결하고자 했던 건 사명감 때문이었다. 사실 필자는 도보여행을 하고, 트레킹 코스를 개척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 달리 말하면 도보여행만큼은 남들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 재능을 살려 동학농민혁명의 뜻을 기리고자 했다. 문인들이 시나 소설로, 예술인들이 춤이나 노래로 갑오년의 정신을 계승했듯이 필자는 도보여행길을 만들어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했다. 농민군들이 가고자 했던 길을 트레킹을 통해 직접 걸어보는 것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기리는 나름의 방식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도보여행자들이 역사의 한 장면을 걸을 수 있게, 우금티-공산성 구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 필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명감은 '공주역사둘레길'로 결실을 맺게 됐다.
호사다마? 시작부터 이상 징후가...지난 10월 18일. 역사트레킹 팀은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공주 공산성에 도착했다. 트레킹을 하기에 '딱'인 날씨였다. 가을 햇살이 좀 강한 것 외에는 활동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웃도어에서 날씨가 좋으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하지만 청명한 가을 하늘과 달리 필자의 머릿속은 잿빛이었다. 트레킹 시작부터 좀 이상 징후가 있었기 때문이다. 참가자 중에 한 명은 충남 공주 토박이였고 또 다른 참가자는 시작부터 복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장염에 걸렸던 것이다. 그 참가자는 공주 시내에 있는 병원에까지 다녀왔다.
'호사다마인가? 이번 트레킹 성사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이거 괜히 공주토박이 앞에서 망신당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다고 해도 장염에 걸린 참가자는 어쩌지... 미리 구급차 길이라도 봐둬야 하나?'
'공주역사둘레길'의 시작점은 공산성이다.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으로 요충지였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나라 소정방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 후기 시대에 그 틀이 잡혔다.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인해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고, 그에 따라 공산성은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매표소가 있는 금서루 부근에서 이런 기본적인 설명을 하며 서쪽 성곽을 둘러갔다. 서쪽 성곽에서는 멀리 황새울이라는 천주교 성지가 보이는데 그 지점에 다다랐을 때 공주토박이 참가자가 이런 말을 했다.
"저기 건너편 십자가 표시 보이시죠? 저기가 황새울이라는 곳인데요. 저기서 천주교 신자가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황새울 성지로 불러요.""앗! 그건 제가 설명하려고 했는데..."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시선을 되찾아오기 위해 서둘러 첨언을 했다.
"저 건너편에 공주 감영이 있어서 그랬어요. 사실 천주교 신자가 가장 많이 희생된 곳은 여기 공주라고 하더군요. 감영이 있어 충청지역의 천주교도들이 여기로 다 붙잡혀 온 거예요. 그래서 희생이 컸던 거고요."염려했던 일이 발생했지만 그럭저럭 위기를 모면했다. 식은땀 한 방울을 흘리며 서둘러 쌍수정(雙樹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참 힘드네1624년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을 하는 일)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간절히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통훈대부)를 내린다.
이후 영조 11년, 그 자리에 정자가 세워졌으니 이것이 바로 쌍수정이다. 처음에는 삼가정이라고 불렸으나 이후 쌍수정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이런 '스토리텔링' 때문인지 공산성은 조선시대 '쌍수산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쌍수정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하고 금강이 보이는 성의 북면으로 이동을 하려고 할 때였다. 인조와 관련된 설명을 하나 더 준비를 했는데 기억이 안 났다. 무슨 떡 이름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서 그냥 북면 쪽으로 이동을 하려 했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 하고 선두로 나서는데 뒤쪽에서 그 떡 이름과 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인조가 이곳에 와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인근에 사는 임씨 집안 사람이 떡을 바쳤대요. 인조는 그걸 맛있게 먹었고요. 당연히 그 떡 이름을 물어봤겠죠. 그런데 이름이 없던 거예요. 그래서 이후에 임씨 집안에서 만든 맛있는 떡이라고 해서 인절미가 된 거라고 하더군요."또 그 토박이 분이었다. 이번에는 필자가 못한 설명을 그 분이 직접 대신해주었다. 필자는 멋쩍은 나머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래도 명색이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닌가!
"'ㅁ'이 'ㄴ'변화돼서 결국 인절미가 된 거예요. 그나저나 갑자기 인절미가 땡기네..."괜히 애꿎은 인절미 타령을 하며 그 순간을 벗어났다. 역시 토박이 앞에서 해당 지역을 설명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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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