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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곤의 쉐다곤 파야. 양곤:(2005년까지 수도였으나 현재는 네삐더Naypyidaw로 옮김) 미얀마의 얼굴이라는 쉐다곤 파야
양곤의 쉐다곤 파야. 양곤:(2005년까지 수도였으나 현재는 네삐더Naypyidaw로 옮김) 미얀마의 얼굴이라는 쉐다곤 파야 ⓒ 전병호

나는 한때 잘나가는 영업 관리자였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부실조직에서 명품조직으로>라는 책도 펴냈다. 1년 전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접고 평생을 글쟁이로 살겠다며 용감하게 거리로 나왔다. 그 뒤로 공식 백수가 되어 몇 권의 책을 출간했다.

하지만 초보 작가의 한계였는지, 아직 글이 덜 익어서인지 기대만큼 많이 팔리진 않았다. 자폭하는 게 아니라 실제 출판 시장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달랐다. 그럼에도 2쇄 정도는 찍었다는 것에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물론 나는 아직도 내 책에 대한 자부심은 여전하다. 이 시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게 나는 지난 1년 동안 잘나가던 영업 본부장에서 백수로, 무명작가로 살아왔다. 그리고 다시 맞은 가을. 지금 나는 여기 한 명의 여행자로 서 있다.

미지의 나라 미얀마가 내게로 왔다

지난 7일 저녁 나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인천국제공항에 서 있었다. 미얀마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얀마! 너 어디 가냐?"
"미얀마!"
"미안할 거까진 없구 어디 가냐구?"
"미얀마 간다구."
"미얀마??"
"아웅산 수찌(현지 사람들의 발음을 따랐다-기자주), 미얀마 몰라?"
"아, 버마! 아웅산 수찌!"

 인천공항 출국장 서점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졸저 <퇴직을 디자인하라>
인천공항 출국장 서점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졸저 <퇴직을 디자인하라> ⓒ 전병호
미얀마로 떠나기 전 친구와 나눈 짧은 메신저 대화다. 이렇듯 미얀마는 아직 많은 사람에게 생소한 나라다. 미얀마라는 낯선 이름보다는 버마나 아웅산 수찌로 더 알려져 있다. 또 다른 이에게는 버마 아웅산 폭탄 테러 정도로 기억되는 나라다.

뜨겁고 지루한 지난 여름 밤새 모니터와 싸우던 중 미얀마라는 낯선 나라가 내게로 왔다. 평생 글쟁이로 살아가겠다던 패기 넘친 다짐이 흔들리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어디서 보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메일함을 정리하다가 스치듯 미얀마, 국내 교육, 해외 연수, 지원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중소기업청에서 주최하고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서 주관하는 해외 창업 지원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다른 단어보다 미얀마라는 말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인터넷을 검색했다. 버마, 폭탄테러, 아웅산 장군, 아웅산 수찌 등의 단어들이 튀어나온다. 은근 마음이 동했다. 바로 등록했다. 그 뒤로 한 달 가까이(국내 교육 120시간) 미얀마 전문가들에게 미얀마에 관해 배워가면서 미얀마에 빠져들게 되었다. 미얀마는 그렇게 운명처럼 내 가슴 들어와 깊이 박혔다. 어찌 보면 이런 운명 같은 인연은 그동안 몇 권의 책을 쓰면서 스스로 미궁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나에게 글쓰기에 더 정진하라는 하늘이 던져준 생명의 밧줄인지도 모른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 인천국제공항 면세점 사이 작은 서점에서 나의 졸저 <퇴직을 디자인하라>를 발견했을 때 가슴 한켠에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쳤다. 준비 없이 거리로 내몰리는 수많은 장년 실직자들, 아무 준비 없이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얼마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 하는 수많은 소상공인들. 책을 쓸 때의 기억이 다시 눈앞에 튀어나왔다. 글쟁이라고는 하지만 밥벌이로는 아직 시원찮은 나도 그 속에 보였다. 미얀마를 통해 스스로 내 삶을 다시 들여다보고, 주체적 삶을 디자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조용히 미얀마에 스며들다

초저녁 저녁노을이 사라질 즈음 비행기는 미지의 나라에 대한 동경이 가득한 사람들을 태우고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인 은둔의 나라 미얀마를 향해 날아올랐다. 지난 여름 처음 만난 이 미지의 나라에 나는 첫눈에 반해 그동안 일방적 애정 공세를 퍼부었다. 국내 교육기간 동안 역량 있는 미얀마 전문가들에게 수많은 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강의실 교육으로는 충족할 수 없는 갈증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교육을 받을수록 현지로 빨리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깊어졌다. 여름을 지나 추석이 지나갔다. 하루하루가 미얀마 연수 날에 맞춰 일상이 재편됐다. 그렇게 흥분되고, 기대되는 마음으로 짝사랑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사랑의 결말을 위해 미얀마로 내 몸을 내밀고 있었다.

비행기는 반나절을 소리 없이 날았다. 양곤 국제공항 상공을 선회할 즈음 기장의 안내방송이 비로소 미얀마에 도착했음을 알려준다. 재빨리 창 덮개를 올리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띄엄띄엄 꽃잎처럼 흩어진 불빛들이 5백만이 거주하는 거대 도시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수수하다. 그렇게 사람들이 잠든 밤, 현지 시간 오후 11시 즈음(미얀마는 한국과 2시간 30분 시차가 있다) 우리 일행은 소리 없이 미얀마에 스며들었다.

미얀마에서의 첫날 아침은 시차 때문인지, 기대감 때문인지 새벽녘 알람 없이도 눈이 떠졌다. 창가로 가서 시내를 바라본다. 멀리 반짝이는 황금색 탑이 보인다. 이곳이 미얀마라는 사실이 실감 난다. 밤에 봤던 적막한 양곤의 모습은 낮에 보니 이제 막 잠을 깬 코끼리와 같다. 양곤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이곳 도시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것 같았다. 미얀마의 얼굴이라는 쉐다곤 파야 외에도 도시 곳곳에 숨어 있는 수많은 파야(파고다)들을 보면서 미얀마라는 생소한 나라에 대한 경외감이 생겼다. 미얀마의 속살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철저히 이방인의 입장에서 미얀마를 보기로 했다. 그들을 이해하며 보다 보면 이해의 정도에 따라 감상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방인의 입장에 서야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미얀마 문화에 존중의 마음은 깔고 봐야 한다는 기본 원칙 아래였다.

미얀마가 소리 없이 내 가슴속에 들어왔다

 밤 11시 소리 없이 스며든 양곤의 밤거리는 적막하기 그지없다.
밤 11시 소리 없이 스며든 양곤의 밤거리는 적막하기 그지없다. ⓒ 전병호

미얀마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나라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토를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한반도 국토 면적의 세 배에 달한다. 짧은 기간에 미얀마를 다 볼 수 없고, 본다 해도 미얀마의 전부를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본 것은 미얀마의 3분 1 아니, 10분의 1도 안 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방인의 눈에 비친 낯선 땅 미얀마는 보름 동안(공식일정은 10일이었지만 양해를 구하고, 현지에서 남아 5일간 더 머물렀다)이었지만 나에게 충분한 매력을 발산했다.

국내 교육에서 느끼지 못했던 미얀마의 속살을 조금씩 알아 가면서 잃어 버린 우리들의 모습을 보았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순박한 미소가 아름다운 나라 미얀마는 그렇게 내 가슴 속에 아름다운 추억을 남겼다. 미얀마는 아직 속을 다 보여주지 않은 보석 같은 나라였다. 그동안 개방되지 않아 여행자들에게는 접근성이 떨어져 인접 국가인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가기 전 미얀마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버마 아웅산 폭탄 테러, 군부 독재, 아웅산 수찌가 있는 나라 정도였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미얀마는 지친 여행자들에게 영적 자양분을 주는 신비한 나라임을 깨달았다. 특히 우리나라 정서와 닮은 것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땅예친(미얀마 말로 친구)' 같은 나라다. 짧은 기간 보고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를 알면 얼마나 알았을까마는 호기심으로 바라본 미얀마 속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자존심, 그리고 아직도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가득한 묘한 매력을 풍기는 나라였다.

머무는 동안 그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가 지금 가진 것에 대한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다.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하는데 행복의 가치는 결코 물질의 풍요 속에 있지 않음을 새삼 느꼈다. 물질의 풍요는 육체적 편리함을 제공해 주지만 풍요를 갈망하는 인간의 탐욕이 정신을 더 피폐하게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간혹 몇몇 개발론자들은 우리나라 1970년대 경제 수준보다 못한 후진국이라고 미얀마를 폄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겉모습만 그렇지 그들 삶 속에는 엄연히 21세기를 공존하는 생각과 더불어 자본의 논리에 때 묻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간직하며 살고 있었다. 그들 속에는 미얀마라는 이름처럼 변화에 빠르고, 영적으로 강한 나라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미얀마라는 이름은 '미얀+마=미얀(빠르다)+마(튼튼하다/건강하다)=빠르고 튼튼하다'라는 의미다. 미얀마 사람들은 느릿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삶에 쫓기지 않고 인생을 관조하며 살고 있었다. 지나친 과장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어느 시골 장터 구석진 곳에 좌판을 편 소수 민족 여인의 모습에서는 나는 성자의 모습을 보았다. 미얀마는 그런 곳이었다.

 따웅지(Taunggyi) 재래시장에서 만난 Pa.oh(빠오)족 여인. 그들의 삶은 팍팍할지 모르나 내 눈에는 성자처럼 보였다.
따웅지(Taunggyi) 재래시장에서 만난 Pa.oh(빠오)족 여인. 그들의 삶은 팍팍할지 모르나 내 눈에는 성자처럼 보였다. ⓒ 전병호

한국으로 돌아온 후 며칠간 앓아누웠다. 일부 일정은 짜인 일정대로 쫓아다니느라 힘들었고, 뒤에 일정은 자유롭게 떠돌다 보니 육체적 피로감이 쌓였다. 여독일 수도 있지만 미얀마에서 치유 중이던 마음의 위안이 현실에 다시 노출돼 재발하는 듯했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여행은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 인생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갖게 해준 뜻깊은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을 씨앗 삼아 다시 한 번 미얀마를 가볼 날이 곧 오리라 스스로 암시해 본다. 여건이 된다면 새로운 출발지로 미얀마를 선택하고픈 생각도 든다. 그보다 우선 수많은 느낌과 깨달음을 잊기 전에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모두 잠든 깊은 가을밤 노트북을 편다. 뭔가를 써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생겼다. 하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를 담아 와서인지 잘 정리가 안 된다. 정리되는 대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볼까 한다. 깊어가는 가을 미얀마의 순수함이 병든 우리 사회를 위해 작은 치유의 촉매제가 되길 바란다.


#미얀마#양곤#은둔의 나라#쉐다곤 파야#불교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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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공작소장, 에세이스트, 춤꾼,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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