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눈이 내렸나 보다. 좁은 창살 사이로 눈이 소복이 쌓였다. 두툼이 쌓인 눈이 먹음직스럽다. 산장의 밤은 아늑했다. 나무로 지은 집. 담요 몇 개. 눈 내리는 밤, 나를 따뜻하게 지켜준 건 소박하고 가난한 것들이다.
회색 봉투를 뒤집어쓴 듯 흐리던 하늘도 이젠 투명하다. 어제 느껴지던 두통도 말끔히 가신 듯하다. 고산병 예방 원칙인 Climb-high, sleep low(높이 오르고 낮게 자라)를 따른 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마낭까지는 고도가 더 높은 곳이 없으니, 고산병 걱정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겠다.
어제는 구름 사이에 숨어 있던 안나푸르나 2봉. 허름한 산장의 창문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니 너무나 잘 어울리게, 웅장하게 고개를 들고 서 있다. 하얀 새벽 풍경에 짐을 꾸리는 내내 마음이 설렌다.
오늘은 나왈까지 간다. 가루에서 나왈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 중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이라고 들은 터. 어제 걷지 않고 아껴두기를 잘했다. 나왈까지는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두 시간은 너무 짧아. 길고 가늘게 즐겨야지. 우리의 목적은, 앞으로 빨리 가는 게 아니니까.
안나푸르나 2·3·4봉, 강가푸르나, 틸리초 정상까지
밤새 내린 눈에 길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온 사방이 하얗다. 가루에서 나왈로 이어지는 하얗고 좁은 산길을 걸었다. 어퍼 피상에서부터 보이던 안나푸르나 2봉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모퉁이를 돌아나가니, 안나푸르나 2봉 뒤로 서 있던 설산들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안나푸르나 3봉과 4봉. 강가푸르나와 틸리초 정상. 그리고 이름 모를 봉우리들. 이 풍경. 지금 이걸, 현세라고 믿어도 되는 건가.
다섯 개의 웅장한 봉우리를 마주한 그 자리에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졌다. 잠시 물러갔던 구름이 나타나 설산의 여기저기를 가리고 섰다. 구름이 조금이라도 비켜주길 기다리며 길 중간에 걸터앉았다.
뒤따라 오던 트레커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감탄을 자아내다 아쉬운 듯 사진을 찍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설산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던 나도, 문득 생각난 듯 일어나 사진을 찍었다. 사진 몇 장에는 잘 담기지 않는다. 그래도 아쉬우니까. 셔터를 누르고 또 눌렀다.
느지막이 도착한 프랑스 커플이 우리 옆에 앉았다. 여자친구가 박사 학위를 끝낸 기념으로 남자도 회사를 그만두고 같이 6개월간의 장기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네팔에 오기 전에는 모스크바에서 출발해 중국으로 가는 시베리아 열차를 탔다. 시베리아 열차.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의 9288km를 연결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직통열차다. 장기 여행 계획을 짤 때 우리도 고려해 본 옵션이다.
"기차라서 저렴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프랑스에서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보다 비쌌어요. 그래도 이곳저곳을 기차를 타고 여행한다는 데에 뭔가 아련한 매력이 있죠. 제일 좋았던 곳은…. 몽골. 몽골이었던 것 같아요." 몽골을 횡단했다면 시베리아 스텝 지대인 타이가와 몽골의 사막 지대를 가로질렀을 것이다. 그리고 하얼빈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몽골, 가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눈앞에 두고 몽골에 가고 싶다니. 여행은 가도 가도 욕심이 채워지지 않는, 가면 갈수록 더 멀리 가고 싶어지는, 끝없는 욕망이다.
설산의 절경에 빠져 서성대느라 2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를 7시간에 걸쳐 걸었다. 5시간을 지체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아직 남아 있다. 꿈같은 설산의 풍경이 눈에 어른댄다. 아무래도 내일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이른 새벽이라면 구름도 말끔히 걷혀 있겠지.
세상에 이런 광경이 있다니...나왈은 거대한 봉우리 안에 포근히 녹아든 마을이다. 마을이 들어선 평야 지대 아래로 거대한 바위들이 쭈뼛쭈뼛 솟아있다. 먼저 도착한 프랑스 커플이 있는 곳으로 숙소를 정했다. 저녁 식사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럼 경치를 더 즐겨야지.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 나왈 뷰포인트(View Point)까지 가벼운 산책이다.
얼마 가지 않아 나타난 또 다른 숙소. 2층 테라스로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다나큐에서 만났던 체코 트레커들이다. 나중에 도착한 친구 한 명을 만나기 위해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간다던 커플.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기 위해 산을 천천히 오른다던 다른 한 쌍의 커플. 이제는 다섯인 그들. 결국엔 만났구나. 우리도 이렇게 반가운데, 서로 다시 만났을 땐 얼마나 반가웠을까. 기다려주고 배려해주면, 조금 느려도 함께할 수 있다.
뷰 포인트로 이어지는 길. 돌무더기로 이어진 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나왈을 감싼 안나푸르나와 그 뒤에 선 강가푸르나의 모습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에 자리한 돌탑 옆에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여기까지가 너희 영역이야. 산이 우리에게 경고라도 하는 듯, 바람에 세차게 불었다.
"나는 저기까지 올라갔다 올게. 같이 가려면 가고, 아니면 여기서 기다려."더스틴이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도 않는 산 위의 점을 가리켰다.
"에? 여기도 4000m 가까이 되는데 저기까지 가면 좀 위험하지 않아?"
"괜찮아. 난 가봐야겠어. 갈 거야, 말 거야?"
"안 가."
어울리지 않게 웬 정복자 흉내? 더스틴은 가지고 있던 짐을 내 옆에 풀어놓고, 돌무더기 길을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고도와 경사가 높은 길.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 더스틴의 뒤꽁무니를 시선으로 따라 올랐다. 갈 걸 그랬나. 저 위로 올라가면 뭐가 보이려나. 호기심에 발이 근질근질하다. 에이. 저기까지 또 언제 올라가. 얌전히 바람이나 맞고 있어야지. 바람이 쌩하다. 더스틴은 어느새 산 중턱에 올라 있다.
바람에 휘날리는 짧은 머리가 보일 듯하다 금세 다시 사라졌다. 도대체 어디까지 갈 생각이지. 더스틴은 자꾸 어딘가에 오르려 한다. 나와는 다른 사람. 한순간에 확 타오르는 성격. 몇 날 며칠이고 한 가지에 꽂혀 있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거들떠 보지도 않는 성격. 나는 산 중턱에 걸터앉아, 가늘고 길게 즐길 테다. 정상이 조금 궁금하긴 하지만.
육안으로 확인이 안 될 정도로 높이 오른 더스틴. 한 시간 넘어서야 다시 내 시야로 들어왔다.
"어때, 반드시 올라가야 할 만큼 멋져?"
"음…. 아니 굳이 안 가도 돼."
"그럼 괜히 다녀왔네?"
"아니. 굳이 경치를 보러 간 건 아니라서."이 남자 뭐지? 매일 함께하지만 가끔 이런 낯선 모습들과 불쑥 마주한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더 지나야 이해하게 될까. 아마 완벽히 이해한다는 건 환상일지도. 순간을 따라 나도 변하고, 너도 변하니. 완벽한 이해가 이루어지는 순간은, 없을지도 모른다.
다음날 새벽, 가루-나왈 구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에 없이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 히말라야는 아무런 기척 없이 미명에 조금식 반짝인다. 오전 6시다. 아직 다 뜨지 않은 해가, 히말라야의 하얀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 숙소 문을 열자 핑크빛으로 물든 커다란 설산이 눈앞에 섰다. 나도 모르게 "와~" 탄성이 새어나온다. 차갑고 고요한 공기 속으로 내 목소리가 잔잔히 퍼져 나갔다.
촉촉이 젖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30여 분을 걸었다. 어제 한참을 앉아 있던 그 길. 설산을 가리고 섰던 구름도 밤 공기에 모두 물러섰다. 하늘은 아직 차가운 밤빛을 머금고 있다. 그 아래로 선 하얀 설산. 탐스럽다. 요즘 매일 중얼거리는 말이지만, 세상에서 본 풍경 중 가장 아름답다. 매일 설산을 마중 나온다고 한들, 질리는 날이 있을까.
안나푸르나 2, 3, 4봉과 강가푸르나, 틸리초.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설산들의 파노라마가 펼쳐진 명장면이다. 세상에 이런 광경이 있다고 말하면, 누가 믿어줄까. 일렁이는 마음 사이에 미안한 감정이 끼어든다. 엄마와 아빠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오빠도, 친구들도 보면 좋을 텐데. 아쉽고 미안하고 설레는 마음.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녹이려는지, 따끈하게 해가 떠올랐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11시 즈음 길을 나섰다. 부지런히 걷는다면 마낭까지 가는데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마낭은 트레커들이 며칠간 머물며 고도에 적응하는 마을이다. 마낭에서 얼마 가지 않아,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에서 가장 높은 쏘롱라의 고비를 넘겨야 하기 때문이다. 안나푸르나를 오른 지 8일째. 포카라를 벗어나기도 힘들었던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
오늘 걷는 이 길도 눈부시게 아름답다. 바보 같은 우리는 이런 풍경을 눈앞에 두고도 다툼을 멈추지 못한다. 아름다운 길 위를 걷는 멋진 날로 기억할 수 있을 오늘 하루. 아무리 웅장한 풍경이 눈앞에 있어도, 마음이 따르지 않으니 눈에 담기지 않는다. 다투고 헐뜯고 비난하기를 반복하다, 홧김에 다른 길로 들어섰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전화도 없는데.... 다음 마을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곧 찾을 수 있겠지. 더스틴은 반대 길로 돌아간 것 같다. 같이 걸었던 길을 홀로 되돌아갔다. 모두가 마낭 방향으로 걷고 있다. 청명한 날씨 아래 눈이 시린 설산을 즐기는 트레커들. 미소 띤 얼굴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울상이 된 얼굴을 하고 걷고 또 걸었다. 이쯤이면 좀 나타나야 하는 거 아니야? 한참을 가도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지. 브라가에 가서 기다리자.
브라가 마을 초입. 더스틴이 계단에 걸터앉아 있다. 이 자식. 머리끄덩이를 잡고 소리라도 쳐주려는데 헨드릭과 로레나가 옆에 앉아 있다. 남은 걱정돼서 한참을 걸었건만, 여기 한가하게 앉아서 노닥거리고 있다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여기 있으면 놓칠 일은 없잖아."
머리는 좋네. 헨드릭과 로레나가 자리를 뜰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남 앞에서 싸울 순 없으니. 이어지는 비난과 변명과 언쟁과 사과. 결국, 다시 화해다.
처음 만났을 때보단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많이 다투고, 고치려 들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다툼을 멈출 때가 있을까? 그런 기대를 한 적도 있지만, 이젠 아니다. 다툼이 끝나는 순간은, 포기한 순간이 아닐까. '이제는 지쳤어...' 그런 순간이 아닐까. 이해하고 싶기에 다툼도 있겠지. 기대를 조금 줄이자. 다툼은 대화로 바꿔나가자. 이해하고, 인정하자. 언제나 다짐해도 화창한 어느 날, 우린 다시 싸우고 있겠지. 그게 서로를 배워 나가는 길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걸까.
뜨거워진 속을 가라앉히려 찻집으로 갔다. 마낭으로 가면 밥값이 비싸진다는 찻집 주인장 말에 꼬여 비스킷도 하나 샀다. 브라탕에서 만난 이스라엘에서 온 아멧이 숨을 고르며 올라왔다.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은 두 번째라는 아멧. 처음 왔을 땐 단체로 왔던 터라 너무 빨리 오른 바람에 풍경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고. 그래서 다시 왔다고 했지. 그때는 히말라야 등반이었다면 지금은 '휴가'를 즐기기 위해 왔단다. 우리보다 더 느리게, 한 마을에서 며칠간 머물며 풍경을 즐기겠다고 하더니. 숨까지 헐떡대며 올라오고 있는 건 뭐지.
"아! 좀 쉬다 가야겠네. 내일모레 마낭에서 이스라엘 명절 축제가 있다는 거야. 거기는 가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이렇게 단숨에 왔지 뭐야." 여유를 즐기러 왔다는 아멧까지 엄청난 거리를 단숨에 몰아 오게 하다니. 대단한 명절 축제이긴 한가보다.
"휴가는 잘 즐기고 있어? 처음 왔을 땐 가을이었다고 했지? 그때와 경치가 많이 달라?"
내 질문에, 아멧이 눈앞에 선 설산을 스윽 훑으며 대답했다.
"비교가 안 되지. 물론 지금이 훨씬 여유롭긴 하지만. 우기가 지나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경치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이런. 태어나 가장 멋진 절경을 경험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니. 히말라야는 대체,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 건가.
브라가 마을이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커피의 고소한 향기가 풍겨온다. 브라가는 커피로 유명하다고 했지. 산장 여기저기 먹음직스럽게 구워낸 빵이 진열되어 있다. 갓 구운 빵에 커피라…. 마낭까지 고작 30분 거리밖에 남지 않았지만, 쉬었다 가자. 마낭이야 뭐, 내일가면 되지.
테라스에 앉아 커피와 시나몬 롤을 주문했다. 산에 올라와 처음으로 마시는 제대로 된 커피다. 히말라야 설산이 한눈에 보이는 테라스에서 즐기는 커피 한 잔이 50루피(한화 약 700원). 훌륭하다. 산장 벽에는 태국 어디쯤 되어 보이는 에메랄드빛 바다 사진이 걸려 있었다. 히말라야 절경을 눈앞에 두고 바다 사진이라니. 어떤 귀한 것을 가지든, 다른 무언가를 꿈꾸는 게 인간의 비극인 건가.
우리 테이블 앞에 독일 여자가 한 명 앉아 있다. 성숙해 보이는 외모와 말투. 알고 보니 열아홉 살이다. 고등학교 3학년. 학교 친구들 20여명과 같이 여행 중이란다.
"방학이 2주인데, 학교에서 1주를 더 허락받았어요. 2주 동안 트레킹을 하는 건 무리잖아요. 여행 오려고 방학 전에 일도 많이 했어요."2주간의 방학에 여행을 이유로 1주를 더 허락하는 학교.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교 3학년생들의 단체 여행. 그것도 장기간의 히말라야 트레킹이라니. 고3임에도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닌 그들의 현실.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그들의 교육 시스템. 부럽다. 까짓 수학 문제 몇 개 더 푸는 게 뭐 대수라고. 지금도 새벽 6시면 눈을 떠, 자정 넘게까지 책상에 눌러앉아 교과서와 문제집을 파야 하는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슬프다. 내가 지나온 그 시절도 덩달아 슬프다.
그나저나 열아홉 살이라니. 커피로 향긋해진 뱃속에서 질투가 올라온다. 십대에 히말라야를 만난다면 이십대의 삶은 얼마나 더 풍요로울까. 부러워도 어쩔 수 없지. 지나간 십대는 그 나름의 시간. 지난 시간이 후회스러운 건, 뜨겁게 살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답은 하나다. 지금부터라도 뜨겁게 살 수밖에. 더 많이 걷고, 보고, 질문하고, 사랑해야지. 뜨겁게 살아야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뜨거움은 삶에 대한 예의니까.
언제나 기억해야 할 질문이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