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는 마이스터와 같은 독특한 전통을 제도와 교육으로 유지하려 노력하고, 그 외의 여러 분야에서도 전통을 잘 지키려 한다. 하지만 도통 그 전통을 찾기 힘든 분야가 하나 있다. 바로 음식 문화이다.
독일을 찾는 사람들이 여행 내내 독일 전통 음식만 먹겠다고 단언하더라도, 매일같이 지속되는 슈니첼(독일식 돈까스, Schnitzel), 부어스트(독일식 소시지, Wurst), 슈바인스학세(독일식 족발, Schweinshaxe), 자우어 크라우트 (독일식 신김치, Sauerkraut) 등의 몇 안 되는 전통 음식만 먹다보면, 금세 너무나 많은 양과 느끼함 때문에 질리기 마련이다.
물론 지역마다 전통 음식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독일의 주요 도시에서 오래된 전통 음식을 맛보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 위에 열거된 전통 음식 위주로 맛보고 돌아갈 뿐이다.
게다가 베를린은 독일의 다른 도시와도 사뭇 다르다. JTBC 예능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의 독일 패널(다니엘 린데만)이 "베를린은 큰 홍대"라고 표현할 정도로, 이 도시의 물리적 환경과 사회문화적 환경은 무척 특이하다. 밤 8시 혹은 밤 10시 이후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일반적인 유럽 도시에 대한 선입견과 달리, 베를린은 1년 365일 연중무휴 밤낮으로 쉼 없이 놀고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럽의 도시이다.
거리에서는 자연스럽게 아랍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 터키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중국어, 여러 아프리카어 등 수많은 언어들이 들린다. 인종, 학문 전공, 종교를 구분하려는 시도가 의미 없을 정도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도시가 현재의 베를린이다.
그래서일까. 베를린의 음식 문화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다. 다양성이라는 재료를 바탕으로 자신 있게 음식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다.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에 위치한 마크트할레 9(Markthalle IX)에서는 매주 목요일 저녁(5시~10시) 특별한 행사가 열린다. 바로 전 세계의 길거리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스트리트푸드 서즈데이(Streetfood Thursday)'다.
이웃 공동체, 만남의 장소로 다시 태어난 '마크트할레'
이곳에서는 전 세계의 길거리 음식을 만날 수 있다. 홀 내부를 돌아다니며 전 세계의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부터, 풍기는 냄새만으로 다가서기 어렵게 만드는 음식들까지, 목요일 밤이면 한 장소에서 모두 맛볼 수 있다.
마크트할레(Markthalle)의 Markt는 '시장', Halle는 '홀'을 의미하는 단어로, 홀을 갖추고 있는 시장 건물이란 뜻이다. 베를린에는 19세기 말에 지어진 총 14개의 마크트할레가 존재했는데, 이곳은 그중 9번째(IX) 마크트할레다. 2차세계대전 이후 베를린 건물들의 약 98%가 피해를 입었고, 14곳 마크트할레도 예외는 아니었다. 현재 14곳 중 4곳만이 복원되어 여전히 시장 건물로 활용되고 있다. 아예 파괴되어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 곳도 있고, 복원되어 음식점, 호텔 등의 다른 용도로 활용되는 곳도 있다.
1977년 마크트할레 9를 관리하던 베를린 대형시장 유한회사(Berliner Großmarkt GmbH)는 알디(ALDI)라는 저렴한 슈퍼마켓 체인점에게 마크트할레의 일부 공간을 임대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다른 체인점들이 수많은 소상인들이 일하던 장소를 차지했다. 체인점에게 자리를 대부분 빼앗기고, 얼마 남지 않은 지역 소상인들마저도 유명 체인점 앞에서 설 자리는 없었다. 그렇게 점점 상인들은 사라져갔다.
2003년 즈음, 마크트할레는 몇몇 체인점만이 남은 텅 빈 홀이 되어버렸다. 수년이 흘러 지역주민들은 '소상인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면!'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시끌벅적했던 마크트할레가 그리워진 것이다.
지역 주민들은 텅 빈 마크트할레를 이웃 공동체의 만남의 장소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지역 주민들은 "모두를 위한 홀(Halle für alle)"을 외치며 마크트할레 9를 활성화시키고, 마크트할레를 다른 투자가에 팔아버리려는 것을 반대하기 위한 모임(Projektgruppe Markthalle IX)을 결성했다. 그들은 매주 토요일 마크트할레 9에 모여 마크트할레 9를 살려낼 방법을 강구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프로젝트는 성공했다. 건물이 다른 투자가에게 팔려 헐리고 새 건물로 바뀌지 않게 막았다. 새로운 개발을 무작정 반대만 한 것이 아니라, 건축가와 협업을 통해 문화재 보호법을 준수하는 리모델링 대안을 제시했고, 베를린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2011년 새로운 모습으로 재개장했다.
베를린에 온 사람들이 만든 다양한 음식
재개장 후 기존에 체인점이 남아 있는 장소를 제외한 약 2850제곱미터의 공간에서는 체인점의 대량생산품이 아닌 지역 생산품과 친환경 생산품 등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2년 프로젝트 그룹은 약 110만 유로에 마크트할레 9를 사들였다. 마크트할레 9는 다시 사람들이 북적이는 장소가 되었다. 필요한 물건만 사서 바로 떠나는 대형 슈퍼마켓이 아니라, 멈춰 서서 이웃들과 인사하고 단골가게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만남의 장소가 돌아온 것이다.
물론 우려의 시선도 있다. 단순히 마크트할레 9만의 문제가 아니라 베를린 전반에 걸쳐, 친환경 상품과 지역 상품을 애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상 때문에 '녹색 장벽'이라는 보이지 않는 빈부격차의 갈등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여전히 마크트할레 9 구석에는 ALDI(슈퍼마켓)와 KIK(의류점)이라는 체인점이 남아 있다. 하지만 특히 목요일 저녁이면, 이 두 체인점은 구석에 조용히 숨 죽이고 숨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 누구도 다양한 세계의 음식을 앞에 두고 체인점을 찾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 외의 시간에는 체인점에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사러 가는 사람들도 많다. 모든 사람들이 부담스러울 수 있는 가격의 길거리 음식을 즐기면서 비교적 비싼 친환경 제품과 지역 생산품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주민들은 공생을 한다. 길거리 음식 행사가 인기 있다고 매일 밤 열리지 않는다. 주중 장터를 매일 열며 체인점을 쫓아낸 것도 아니다.
이 장소는 베를린에서 세계 각국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장소 중 고작 한 곳에 불과하다. 또한 대형 슈퍼마켓과 주중 장터가 공존하는 수많은 장소 중 하나이다. 힘들게 이곳을 꼭 찾아올 필요도 없이 지금 걷고 있는 베를린 거리 주변에서도 세계 각국의 음식을 찾을 수 있다. 슈퍼마켓 옆에서 친환경 제품 그리고 지역 농산물 장터가 열리는 것을 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베를린에서는 독일 전통 음식점을 찾기가 더 어렵다. 그렇기에 베를린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찾기 힘든 독일의 전통 음식을 먹는 것도 좋지만, 기회의 도시 베를린에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아닐까 싶다.
* 마크트할레 9는 세계 길거리 음식 행사가 있는 목요일 저녁(5시~10시)에만 열리는 게 아니다. 일반적으로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후(낮 12시~오후 4시)에는 카페 등이 운영되고, 화요일과 금요일(낮 12시~오후 8시) 그리고 토요일(낮 12시~오후 6시)에는 주중 장터가 열린다. 이밖에도 다양한 행사와 음식 축제가 열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