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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백두산의 '들꽃'들
백두산의 '들꽃'들 ⓒ 박도

늑대의 울음

크르륵, 크르륵, … 여우의 울음이었다. 어우우, 어우우 … 늑대의 울음이었다. 북만의 깊은 산속 여름밤은 온통 산짐승의 세상이었다. 여우, 늑대 등 산짐승들이 사람냄새를 맡고 헤이룽장성 경성현 청봉령 개울 곁 허형식과 왕조경, 진운상 두 경위원의 숙영지에 어슬렁거렸다. 허형식은 그 울음소리와 자기들을 향해 산에서 뛰어내려 오는 짐승소리에 잠이 번쩍 깼다. 옆에 서 잠든 두 경위원도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허형식은 곁에 있는 기관단총을 단발에 놓고 산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피응"

기관단총의 단발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트렸다. 산짐승들의 소리가 멎었다. 곧 산짐승들은 사라졌다. 허형식이 두 경위원에게 말했다.

"저 놈들도 총소리는 기가 막히게 잘 알고 도망가지."
"그럼요, 저 놈들도 사람을 가장 두려워하고, 총소리를 가장 겁내지요."

산 숯막에 사는 왕조경이 말했다. 여우와 늑대들은 사라진 듯했지만 곧 다른 산짐승들이 그제야 자기들 세상이라고 울부짖었다. '우오오 우오오' 하는 올빼미, '휘익 휘익…' 하는 노루, '찌익 찌익 삑삑 삐삐…' 울부짖는 올빼미 … 북만 청봉령 일대는 산짐승, 날짐승들의 낙원이었다.

 북만주 벌판의 지평선
북만주 벌판의 지평선 ⓒ 박도

우둥불

왕조경이 숙영지 옆에다 우둥불(모닥불의 옛말)을 피우며 말했다.

"밤이슬에 젖은 눅눅하고 촉촉한 기운도 말리고, 산짐승들을 쫓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게 없지요."

왕조경은 오랫동안 산에서 산 사나이답게 아주 익숙한 솜씨로 우둥불을 피웠다. 허형식과 진운상은 겉옷을 입고 우둥불 곁으로 갔다. 곧 우둥불 불길에 눅눅한 기운이 사라졌다. 세 사람은 우둥불 곁에서 몸을 돌면서 불을 쬈다. 왕조경이 우둥불에 나무를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허 군장님! 참 대단한 조상을 뒀습니다."
"자네, 다 들었는가?"
"그럼요. 왕산 허위 혁명렬사가 '나는 이 옥중에서 썩어도 좋으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고 옥리에게 야단치는 대목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면 다 들었군."

"군장님이 말씀하셨지요.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그랬지. 왕 동지와는 초면인데 밥까지 먹고 하룻밤 잠까지 자는 건 대단한 인연이라고."
"저도 그렇게 대단한 인연으로 생각합니다. 날이 새면 우리는 헤어져야 하니까 이 밤 아주 군장님의 남은 얘기를 마저 들려주시지요?"
"뭐, 그렇게 자랑할 만한 얘기는 못돼."

"아닙니다. 동북항일연군 군장은 아무나 되는 건 아닙니다. 더욱이 조선인이…. 허 군장님 얘기 잘 들어뒀다 다른 동지들에게 자랑하려고 그럽니다."
"하긴 나도 이 전장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니까…."

"왜,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하십니까?"
"불길하다니. 빨치산은 산에서 적군의 총에 맞아 죽는 건 가장 영광스런 죽음이야. 그래야 비온 뒤 죽순처럼 어린 전사들이 무럭무럭 돋아나거든…."

 연변열사능원에 전시된 여성 빨치산 전사 모형
연변열사능원에 전시된 여성 빨치산 전사 모형 ⓒ 박도
빨치산의 자긍심

허형식은 항일 빨치산에 발을 들여 놓는 날부터 자기 생명에 대한 미련을 아예 버렸다. 빨치산 동지들은 일제의 총칼에 맞아 죽고, 만주의 겨울 추위에 얼어서 죽고, 만주 벌판을 헤매다가 굶어서 죽고, 때로는 일제 감옥에서 고문으로 죽어도, 그들은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일제의 사냥개가 된 자들을 인간 망종으로 경멸했다. 그게 빨치산들의 자존심이었고, 자긍심이었다.

"그 말씀은 맞지만…. 우리 중국과 조선이 힘을 합하여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쳐부순 것 보셔야지요."
"꼭 그런 날은 봐야지. 그러기 위해 우리 세 사람 가운데 누군가는 살아남아 우리의 투쟁 이야기도 남겨야 돼."

허형식은 그 말을 하고 두 동지를 번갈아 봤다. 서로 국적과 조상은 달라도 믿음직한 두 동지들이었다. 허형식은 하늘을 바라봤다. 청봉령 산봉우리에 은하수가 걸친 채 북녘하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6월 21일 하현달이 스멀스멀 하늘 한가운데로 옮아갔다. 그 밤 따라 하늘에는 가족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독립운동가이며 한의사였던 아버지 허필(許苾), 어머니 벽진 이씨 성후(星厚) …, 그는 어머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기의 이명(異名)을 어머니 성을 따라 '이희산(李熙山)'으로 지었다. 한때 동지였던 든든한 아내 김점순(본명, 金占曾), 이제 열한 살 된 아들 창룡이,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덟 살 난 딸 하주 … 그리고 또 한 사람 춘옥이란 한때 조선에서 자기 집 종이었던 여인….

허형식은 초저녁에 이어 왕산 허위의 순국과 자기 집안이 만주로 망명하게 된 사연을 얘기했다. 그새 우둥불에 그들의 얼굴은 벌겋게 익었고, 중천에 뜬 하현달은 스멀스멀 서녁하늘로 멀어져 갔다. 아울러 허형식의 얘기가 도란도란 북만의 청봉령 숲으로 잦아들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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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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