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한 모금 마실 수 있겠소?"목마른 나그네가 우물가에 달려가 물 긷는 처자에게 부탁을 한다. 처자는 말없이 한 바가지의 물을 뜬 다음 버드나무 잎을 띄워 건넨다. 나그네는 사려 깊은 처자에게 마음을 뺏기고 둘은 천생연분으로 만나 백년해로 한다.
언젠가 한번쯤은 들어봤을 얘기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자취방 모여 현실감 떨어지는 뻥이라며 시시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물 길러 온 것으로 봐서는 양반집 규수가 아닐 것이라는 친구, 남녀가 유별한 시절에 모르는 처자를 희롱한 성희롱 사건이라는 친구, 목마르면 직접 떠서 마실 일이지 누굴 시키려 드는 거냐며 인간평등을 주장하는 친구도 있었다.
저 이야기가 만약 현실이라면, 물은 고사하고 물바가지로 얻어맞지나 않으면 다행이라며 우리는 너스레를 떨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이렇게 삐딱하게 비틀어 분석했던 우리는 참 엉뚱한, 사상이 의심스러운 불량학생이었다.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미얀마의 '예오'
미얀마라면 이런 이야기는 현실감을 떠나서 아예 만들어질 수 없다. 집집마다 이미 나그네를 위한 물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얀마에서는 집 앞이나 거리에 작은 재단처럼 생긴 곳을 쉽게 볼 수 있다. 거기에는 항상 항아리와 컵이 놓여 있다. 바로 목마른 나그네를 위한 자비의 항아리 '예오'다.
'예오'는 마치 또 하나의 보석과도 같은 미얀마만의 문화다. 미얀마 말로 '예'는 물이고 '오'는 항아리라는 뜻이니 우리말로 해석하면 '물항아리' 정도 되겠다.
예오는 고대 인도 마우리아 왕조 때 강력한 통치자였던 아쇼카왕(인도 마우리아 왕조 제3대 , B.C. 268? ~ B.C. 232?)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풍습이라고 한다. 오랜 기간 변하지 않고 전해져 내려와 지금도 미얀마 어디를 가든 예오를 볼 수 있다. 소승불교를 믿는 태국이나 스리랑카에도 일부 남아 있다고 하지만, 미얀마처럼 나라 전체가 여전히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것은 독특한 경우다.
예오를 처음 봤을 때는 무척 낯설었다. 작은 항아리가 움막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이 어떤 사이비 종교의 상징물 같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예오라는 것을 알고 나서 보니 한없이 귀여워 보이고 친근감마저 들었다. 선입견은 좋지 않다는 사실과 '진실을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함을 새삼 깨닫는다.
배려와 자비심 그리고 생명존중의 항아리
이런 물항아리를 집안이 아니고 집밖에 놓아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미얀마 사람들의 배려와 자비심 그리고 생명존중의 마음에서 찾을 수 있다.
미얀마의 날씨는 대체로 햇빛이 따가워 목마름을 부른다. 국토가 길어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지역이 열대 몬순 기후다. 미얀마 거리를 걸어 보면 '목마름'이 왜 찾아오는지 금방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날씨에 '예오'는 생명수가 된다.
인간은 밥을 며칠 굶을 수 있어도, 물 없이는 살 수 없다. 물은 곧 생명이다. 따라서 '목마름'은 인간의 생존욕구 중 가장 근원적인 욕구다. 15년 된 우리 집 강아지는 물 달라고 할 때 주지 않으면 도자기로 된 무거운 물그릇을 발로 뒤집어 버린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목마름은 이처럼 절실함과도 같다.
군대 갔다 온 사람이라면 이런 '목마름'의 절실함을 온몸으로 느껴봤을 것이다. 바로 행군 할 때다. 한여름 뙤약볕 행군의 가장 큰 고통 중에 하나는 바로 타는 목마름이다. 목이 타 들어 갈 때 제대로 수분 보충을 못하면 낙오하거나 실신하는 병사도 종종 생긴다.
목마름의 절실함을 소재로 한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도 있다. 1970~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의 청년들은, 민주주의 절실함을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노래를 부르며 표현했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갈구하던 젊은 청춘들이 그 노래 속에 있었다. 지금 우리를 있게 한 것은 '타는 목마름으로' 목숨 걸고 싸웠던 선배들의 피와 땀이었음을 항상 잊지 말아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자니 그저 헛웃음만 나오고 선배들에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예오, 그 물을 마셔보고 싶었지만...
현대문명 속에서도 전통을 자존심으로 여기며 지켜 가는 것은 참 멋지고 좋은 일이다. 목마른 나그네를 위한 배려와 자비심 그리고 생명존중의 정신까지 보여주는 미얀마의 예오 또한 훌륭하고 멋진 전통이다. 현지문화를 존중하고, 직접 체험하고, 몸으로 느끼는 것이 진정한 여행자의 길이다. 미얀마에 가는 여행자들에게도 이처럼 멋진 전통을 체험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그러나 솔직히 당당하게 권장할 수는 없다. '현지문화 온몸 체험주의'를 주장하는 나도 아직까지 예오 물맛을 알지 못한다. 예오는 예외였다. 마셔 볼 기회가 있었지만 나이 탓인지 몸 상태 때문이었는지 길거리 항아리 물을 벌컥벌컥 마실 수 있는 배짱이 생기지 않았다. 가이드의 만류도 있었고, 솔직히 뒷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남의 나라 문화에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하는 것이 옳지 않다. 하지만 앞으로 예오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거의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지켜오고 있는 예오의 위생 문제에 대해 한 번쯤 고려해봐야 한다. 지하수 오염은 물론 대기오염이 점점 심각해져 최신 정수기 물도 가려 마시는 시대에 도시화된 공간 속의 예오는 오염에 노출되어 있다.
목마른 나그네가 그 오염된 물을 마시면 당장 목마름은 해결될지 모르나 그 뒷감당은 온전히 나그네의 몫이다. 복통과 설사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면 말리지 않겠다. 사실 나도 예오 물맛이 무척 궁금하긴 하다. 바간 파고다 순례 길에서 1달러짜리 기념엽서를 사달라고 쫓아다니던 어린 소녀가 생각났다. 뙤약볕에 지쳤는지 길 옆 예오로 달려가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것을 보았다. 가이드 말이 늘 마시던 물이라 상관없다고 하지만 청결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아 꺼림직 했다.
그때 문득 예오에 이동식 간편 정수 장치를 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유능한 발명가가 있다면 간단한 필터를 부착하여 정수할 수 있는 장치를 발명해(이미 있다면 더 좋은 일이다) 기부하는 건 어떨까. 미얀마 정부에서 훈장이라도 수여할지 모른다. 우주평화를 위해 한 번 시도해 보시라. 머지않아 양곤 거리에서 휴대용 정수장치가 달린 예오 항아리가 등장하길 기대해 본다.
늦은 밤 거실에서 진도 안 나가는 글과 씨름하고 있는데 안방에서 마누라가 부른다.
"물~ 도~"토박이 인천 사람이면서, 부산에 3년쯤 산 뒤로 가끔 자기가 부산 사람인 줄 아는지 부산 억양을 쓴다. 올 겨울 안방에 '예오' 세트를 놔드려야 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미얀마말 표기는 현지어 기준으로 표기했으며 일부는 통상적인 표기법을 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