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며칠 전 나는 책을 읽다가 책에 줄을 그을 작은 자를 사고 싶어졌다. 공부를 막 시작할 때 공부보다 문구류에 더 집중하게 될 때가 있다. 그렇게 공부는 뒷전이 되고 내게 필요한 온갖 문구류의 리스트를 적어 보았다.

지난 23일(일), 친구에게 자를 사러 친구 집 근처에 갈 테니, 그 근처에서 만나자고 했다. 친구는 알겠다고 하고는 나타났다. 몇 분 뒤, 난데없이 전시를 보러 가자고 하면서. 전시가 어디에서 열리는지 알지도 못한 채 경복궁역에서 내려 친구를 따라 걸었다. 친구가 최종 목적지라고 도달한 곳은 허름하고 어두컴컴한 여관이었다. 여관입구에는 귀곡산장에나 나올 법한 희미한 형광 불빛으로 비친 간판이 눈에 띄었다. <보안여관>.

보안여관 간판 갤러리로 활용되고 있는, 역사적인 공간 보안여관
▲ 보안여관 간판 갤러리로 활용되고 있는, 역사적인 공간 보안여관
ⓒ 박재현

관련사진보기


"보안을 위한 여관이야?"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여관을 개조해서 갤러리로 쓰고 있는 곳이래."

친구가 답했다.

현실과 비현실

빛과 그림자의 선분 빛과 컴퓨터의 신호로 이루어지는 스크린의 선분들
▲ 빛과 그림자의 선분 빛과 컴퓨터의 신호로 이루어지는 스크린의 선분들
ⓒ 박재현

관련사진보기


어둑한 저녁에 당도한 여관. 전시 공간 자체도 어두웠다. 천장엔 줄지어 늘어선 작은 백열등이 껌뻑이고 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스산한 감정이 밀려들어온다.

2층에선 관람객들이 "꺄악 꺄악"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놀이공원의 유령의 집 같은 인상이었다. 우리는 2층부터 먼저 올라갔다.

목조로 된 계단과 난간을 지나 올라간 곳. 굵은 곡선으로 구부러진 길고 흰 스크린이 곳곳에 나타났다. 그 위에는 컴퓨터에서 투사하는 신호가 굵은 선분으로 형상화되고 있었다. 선분은 중간중간 단절된 채 이어지고 있었다. 이 선분들의 그림자는 깜박이는 백열등 불빛에 반사되어 벽과 창에 어룽거렸다. 선분들이 이어지다 끊긴 곳엔 창이 있었다.

창 밖에는 도로 건너편에 나란히 늘어선 나무들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선분들이 이어졌다. 창에는 어렴풋하게 비친 그 선분들이 나무들의 이미지에 중첩되어 보였다. '뚜 뚜 뚜' 하는 컴퓨터 신호와 함께 내 눈앞에 이어지는 검은 선분과 창밖으로 보이는 바깥의 나무들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비현실인지 몽롱한 기분에 잠겨들게 했다.

사실,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것은 실상은 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의 환상이 구축한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현실은 환상을 지탱해 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의 환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현실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객관적인 현실'이라 믿는 것은 어쩌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시 공간이라는 이질적인 세계와 창밖의 익숙한 세계를 넘나들며 나는 이런 상념에 젖어들었다.

안과 밖의 경계에 선 사람들

안과 밖의 경계 누가 안에 있는지, 누가 밖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경계.
▲ 안과 밖의 경계 누가 안에 있는지, 누가 밖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경계.
ⓒ 박재현

관련사진보기


본디는 여관방이었을 각 방들을 들어가 보았다. 컴퓨터 신호를 투영하는 스크린들은 안쪽으로 휘어져 있기도 하고 바깥쪽으로 휘어져 있기도 했다. 내가 어느 방에 들어서느냐에 따라 나는 그 스크린의 안쪽에 서 있기도 하고 바깥쪽에 서 있기도 했다. 또는 내가 서 있는 지점에 따라서 나는 어느 스크린의 안쪽에 들어선 동시에 또 다른 스크린의 바깥쪽에 들어선 것이기도 했다.

스크린이라는 것을 경계로 삼으면 맞은편에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바깥쪽에 있는 것이기도 했고, 내 편에서 보면 그가 바깥쪽에 있는 것이기도 했다. 누가 안쪽에 있는 사람이고, 누가 바깥쪽에 있는 사람일까. 그리고... 나는 스스로 어떤 세계의 안쪽에 위치시키고 있으며 어떤 세계의 바깥쪽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일까. 끊임없이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경계를 드나드는 개개인의 정체성, 그 어느 누구도 인사이더만일 수 없고 아웃사이더만일 수도 없는 '인간'이라는 부류의 정체성을 잘 보여 준다고 생각되었다.

동양화에서 미디어로

허름한 여관방과 미디어 허물어져 갈 것 같은 낡고 오래된 여관방에서 이루어지는 미디어 전시
▲ 허름한 여관방과 미디어 허물어져 갈 것 같은 낡고 오래된 여관방에서 이루어지는 미디어 전시
ⓒ 박재현

관련사진보기


사실 이 전시회를 연 이예승 작가는 동양화가였다. 가장 현대적인 기법의 미디어 전시 작가가 원래는 동양화가였다니 언뜻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았다. 하지만 작가는 오히려 동양화적 기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미디어 작품 기법을 진화시켜 나가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미디어라는 매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동양화에서 먹이 번지는 표현 기법들을 연구했었는데, 미디어적인 스크린에서 빛과 그림자를 통해, 화선지에서의 수묵의 번짐을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빛이 투과되고, 어딘가에서 빛이 사라지고, 그림자가 비치고...이렇게 동양화와 미디어 사이에는 어떤 접점이 있어요. 투시가 모아지는 것이랄까요. 동양화적인 특징을 미디어에서 이 각도, 저 각도로 활용할 수 있더라고요."

서양화는 한 공간을 바라보는 위치가 정지되어 있다면, 동양화는 다양한 위치에서 공간을 바라본다. 즉, 서양화가 하나의 투시법으로 장면을 표시한다면, 동양화는 다양한 투시로 장면을 표현한다.

먼 거리에 있는 것을 더 크게 표현할 수도 있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을 더 작게 등장시키도 하며, 봄에 피는 꽃과 겨울에 피는 꽃을 한꺼번에 묘사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시간성과 공간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동양화다. 하나의 현상을 다양한 각도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스크린에 비치는 그림자를 위해서라면 빛을 어느 정도 차단시켜야 할 텐데, 작가는 빛이 비치는 창문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있는 그대로 그 빛을 활용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낮에는 스크린에 투영된 이미지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조차 하나의 작품이었다. 마치 나에게 아무 도움도, 쓸모도 되지 않는, 내가 떠밀어내고 싶은 나의 모습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되게 하듯이…. 그 빛은, 이미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한데 섞여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

인생이라는 하부구조

위층에서는 거대담론의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는 반면, 아래층에서는 작가 개인의 어린 시절이 펼쳐지고 있었다. 작가의 무의식이라는 하부구조가 세상이라는 상부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모양새다. 입구 맞은편 정면에 투영된 영상에서는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꽃이 바람에 스산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각 방에서는 각기 다른 14개의 음향이 튕겨져 나오고 있었는데, 한편으론 조화로운 음색을, 한편으론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그 음향의 조류 가운데 흔들리는 길쭉한 꽃은 각자 숨겨 두고 싶은 마음의 비밀 공간으로 안내한다.

"저는 식물 공포증이 있어요. 그게 언제부터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이 공간은, 저의 기억으로 관객들이 초대되어 들어오는 것이에요. 트라우마이기도 하고 무의식이기도 한 공간이지요. 이곳은 아날로그적인 공간이에요. 이런 기억을 갖고 2층에 올라갔을 때 무의식에서 발현되는 현상들을 관객들은 경험하게 될 거예요."

프로이트의 개념 중에는 '덮개기억'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중요한 기억을 덮기 위한 사소한 기억'이라는 뜻이다. 사소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이 유난히 생생하게 기억난다면, 그것은 정작 중요하고 본질적인 기억을 감추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 많은 잡다한 기억들이 나의 머리와 가슴에 가득하여 정작 내 안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파고들어가지 못할 수 있다. 어쩌면 이 하부구조는 덮개기억을 걷어낸 '중요하고 본질적인 기억' 자체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실제적 공간은 개개인 안에 잠재되어 있던 무의식이 발현된 공간인지도 모른다. 이성적, 논리적으로 운영되는 듯 보이는 공간에서조차도 사람들 안에 축적된 무의식이나 상처가 조합되어 그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 아닐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인생을, 세상을 좌우하고 있다는 것을 점점 더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 그리고... 이 하부구조는 자기 자신을 대면해 본 자만이 또렷이 의식할 수 있는 구조인지도 모른다. 이 하부구조를 의식한 때에야, 상부구조에서 왜 내가 이렇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는지, 왜 내가 세상의 이 지점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랜 역사성을 지닌 여관에서의 전시. 공간의 기운이 강한 곳에서의 전시인 만큼 전시는 공간에 묻혀 버릴 위험도 크지만, 이예승 작가의 전시는 폐허적인 공간을 오히려 뛰어넘는다. 공간에 종속되지 않고 공간을 주도적으로 이끌고야 만다.

공간 안으로 관객이 직접 뛰어들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을 음험하고도 진중하게 스스로 묻도록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잔잔한 마음의 호수에 질문의 돌을 던져, 크고도 오랜 파장을 남겨 준 전시였다.

이진경씨는 출판기획편집자 및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희망의 속도 15km/h>(민음인)와 <EBS 다큐프라임 생사탐구 대기획 '죽음'>(책담)이 있다.


#보안여관 전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