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이후 1960년대 공무원연금, 1963년 산업재해보상보험법과 의료보험법을 도입했다. 공무원연금은 적은 임금으로 공무원의 충성심을 장기간 유도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후불임금적인 성격을 가졌다.
즉, 박정희 정권은 고용주로서 임금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장기 제도인 연금재정의 책임은 미래 정권에게 떠넘겼다. 산재와 의료보험의 경우, 당장 정부 재정에 부담이 되지 않는 사회보험방식을 채택했고, 제도를 이행하지 않는 사업장에 대한 처벌규칙과 같은 강제조항은 입법화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복지국가의 재정책임은 회피하면서 형식적인 입법화로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했다. 이렇게 입법화된 제도는 실제로 국민들의 삶과 무관한 법률적 조항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박정희 정권은 독재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회복지를 활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권에서 국가 복지정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들 부녀 정권은 국가의 재정 책임은 최대한 회피하되, 정책에 대한 독점성은 강화한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국가 재정 책임은 피하고, 정책은 독점하고
한국사회가 사회보험 중심의 소득보장체계를 구축한 가장 큰 이유는 조세를 통한 국가의 재정 책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사회복지를 위한 재원을 조세로 마련할 경우, 조세 수입을 증대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국가 개입은 필수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국가의 이런 사회적 기능이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반면, 사회보험은 가입자들이 우선적으로 재정에 책임을 지기 때문에 국가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88년부터 전체 국민에게 확대 적용되기 시작한 국민연금과 국민의료보험제도가 사회보험제도의 형태를 유지하게 된 건 이때문이다.
국민연금은 부분적립방식을 채택했다. 계속적으로 적립되는 연금기금에 대한 국가와 자본의 경제적 이해가 앞서 1986년 당시 경제기획원은 연금기금을 경제개발기금 또는 사업투자에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 국민연금기금은 '공공자금관리법'에 의해 정부 재량으로 사용하다가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 폐기되었다.
의료보험제도는 시행 초기에 직종, 지역 등 다양한 보험자에 의해 조직되는 조합주의 방식을 적용했다. 이러한 조합주의는 전체 국민을 통일시키지 못하고, 직종이나 지역으로 가입자를 조직함으로써 전체 국민의 수직적인 재분배 기능을 어렵게 했다. 예를 들면 농촌의료보험조합과 A직장의료보험은 각각 재정과 조직을 따로 관리하기 때문에 두 조합 간 재분배 기능은 불가능했다.
김대중 정부 이후 여러 보험자가 아닌 한 보험자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설치되었고, 전 국민은 국민건강보험의 동일한 가입자로 통합되었다. 공적소득보장제도의 대표인 국민연금과 공공의료보장의 대표인 건강보험제도는 명실상부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사회보장제도다.
그러나 이 두 제도의 목적이 충실히 달성되기 위해서는 국가의 사회복지제가 함께 발전되어야 한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우리의 사회복지 현실은 조세에 기반을 둔 게 아니다. 사회복지제도의 빈약한 발전으로 다양한 복지에 대한 욕구가 건강보험제도로 흡수되고 있다.
단적인 예가 노인장기요양제도의 등급을 받기에는 상대적으로 건강한 어르신들이 주거, 식사, 돌봄의 문제를 노인병원 입소로 해결하는 것이다. 즉 노인을 위한 양로시설, 적절한 돌봄서비스 등이 공적 복지로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 존재하는 제도 내로 편입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실제 원하는 욕구와 서비스가 일치되기 어렵고, 건강보험 재정에도 긍정적이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국민연금의 경우 수급개시 연령에 이르기 전까지 급여혜택을 받을 수 없고, 산재나 실업급여의 경우도 조건부 급여조건을 충족할 경우에만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제도적 특징 때문에 국민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복지가 바로 국민건강보험이다.
OECD 헬스 데이터(Health Data) 2014에 따르면, 2012년 한국의 국민의료비는 GDP 대비 7.6%로 OECD 평균인 9.3%보다 1.7%p 낮다. 더욱이 주목할 점은 총 의료비 97.1조 원 중 공공의료비(건강보험재정+국가재정)는 52.9조 원으로 단 54.5%에 그쳤고, 이는 지난 2010년 56.6%로 정점을 찍은 후 계속 감소되고 있다. OECD 공공의료비 평균은 72.3%로 한국의 공공의료비는 무려 17.8%p 낮다.
공공의료비(강보험재정+국가재정=52.9조 원) 중 건강보험료 가입자가 담당하는 부분이 39.1조 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체 국민의료비 중 국가가 책임지는 의료비는 단 13.8조 원으로 국민 총 의료비인 97.1조 원의 단 14.2%에 머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국민들은 건강보험료와 개인과 가구가 부담하는 민간의료비로 전체 국민의료비 중 85.8%를 부담하고 있다.
의료비에 대한 국민 부담이 이렇게 높은 가운데 소득의 수직적인 재분배 기능을 강화하면서 의료보장성을 제고할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공공의료비 재정 확대를 위한 체질 개선과 의료의 탈상품화다. 이번 글에서는 공공의료비 재정 확대에 대한 내용만을 다룰까 한다.
재벌에 누진세율 적용해 조세 확대해야
정부는 건강보험을 중심으로 국가 보건의료정책을 기획한다. 즉 건강보험 가입자의 보험료가 국가 보건의료정책의 중요한 재정으로 작동한다. 조세를 통한 건강보험재정 지원에 국가는 매우 소극적이다.
더욱이 공공부조로 지원되었던 차상위계층에 대한 의료급여가 2008년도 이후 건강보험으로 전환되면서 정부는 해당 계층에 대한 예산을 축소했다. 이는 정부가 의료비용에 대한 책임을 건강보험 가입자에게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다. 2011년 이후 건강보험 누적 흑자가 12조 원에 이르고 있지만, 이 재원이 보장성 강화를 위한 재원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박근혜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세웠던 4대 중증질환 보장 등을 하기 위한 재원으로 12조 원을 유용하고 싶어 한다. 반면 보험자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고령화에 따라 증가될 지출을 대비해 준비금으로 적립하고자 한다. 공단의 추계에 따르면 고령화에 따라 2016년부터 당기적자가 발생하고 이를 위한 준비금 적립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입장 모두 당장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박근혜 대통령은 공약으로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를 약속했다. 비급여의 급여화나 4대 중증질환의 전면적인 보장을 위해서는 당연히 재정 투입이 전제되어야 한다. 국가의 조세 투입을 통해서라도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재정 마련을 위한 방법에 대한 말은 아끼며 굳이 증세하지 않아도 불필요한 지출을 합리화시켜 가능하게 할 것이라 했다.
그러나 드러난 현실은 어떤가. 증세 없는 복지공약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세수 부족으로 서민과 노동자에게 부과되는 각종 세금만 증대되고 있다는 것만 확인했다. 엄밀히 따지면, 건강보험 가입자들의 재원을 정부가 가입자의 동의 없이 유용하는 것은 부당하다.
공단은 증가하는 노인의료비 급증에 따른 준비금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2014년 기준으로 건강보험 진료비 총액 중에서 노인의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35%이고, 2020년이 되면 45.6%로 증가할 것으로 추계되었다. 2020년 이후 초고령사회로 진입함에 따라 노인에 대한 사회적 부양비용 마련이 매우 절실하다.
그런데 이 비용을 건강보험 가입자의 보험료만으로 대비한다는 것은 국가가 미래를 전혀 준비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더욱이 공적연금 구조를 축소하는 정부의 정책 방향을 볼 때, 향후 노인들의 의료비용은 개인과 가구가 전적으로 책임질 공산이 크다.
노인세대의 경우 그들이 임금노동생활을 했던 시기 임금뿐만 아니라 국가 복지 모두에서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기대수명이 연장된 만큼 노인의 사회적 부양을 위해서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국가는 이제까지 재정안정화 논리를 내세워 공적연금은 축소했고,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확대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볼 때, 현재 85.8%에 이르는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은 더욱 증가할 것이다. 현재보다 의료비용에 대한 부담이 증가할 경우 개인이 이를 온전히 책임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건강보험 재정을 확대하는 방안은 재벌을 비롯한 자본에게 보다 적극적인 누진세율을 적용해서 조세를 확대하는 것이다.
확대된 조세로 건강보험재정 지원과 공공부조 및 노인에 대한 사회적 부양비용의 재정기반을 정비해야만 한다. 유일하고 가능한 이 방안을 계속적으로 배제하고 경제성장 논리만을 고집한다면, 결국 현재의 건강보험구조 자체도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의료민영화 찬성주의자 성상철,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임명
지난 1일 정부는 대한병원협회 회장 출신 성상철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으로 임명했지만, 노조의 반대로 공단 임원들끼리 취임식을 치렀다. 성상철은 민간 중심의 공급자를 대변했던 사람으로 민간의료보험, 영리병원, 원격의료를 지지했고 의료민영화를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국민건강보험 공단의 주인은 가입자, 즉 국민이다. 그런데 정부는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의료민영화의 첨병이 될 사람을 공단의 최고 책임자로 낙하산을 태웠다.
국민건강보험제도 강화를 위해 우선 전제되어야 할 것이 건강보험지배구조의 민주화이다. 보험자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가입자의 이해관계를 가장 우선적으로 대변해야 하고, 필요에 따라 정부정책으로부터 가입자를 보호하고 가입자를 대신해 싸우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까지 건강보험공단은 국가권력 아래 지배되어 왔고, 그 결과 건강보험 가입자는 매달 보험료를 지불하는 역할만을 해왔다. 이러한 이유로 건강보험제도가 가입자들의 이해관계보다는 정부나 의료계의 이해관계에 맞춰 작동되어 왔다.
국가는 여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재원을 마련해서 정책을 입안하기보다 재원은 공단의 보험료에 기대면서, 독점적인 건강보험정책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 가입자들은 더 이상 이러한 국가의 '봉'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건강보험제도의 실질적인 강화를 기반으로 공적의료체계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재정 책임을 지고, 건강보험제도의 민주화, 즉 가입자의 정책개입 권리가 확보되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제갈현숙은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위원․무상의료운동본부 정책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