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그냥' 있는 건 없습니다. 허투루 보이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고 까닭이 있게 마련입니다. 산들바람에도 쉬 휘둘리는 대나무가 그토록 곧고 길게 자랄 수 있는 건 마디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대나무에 마디가 없다면 곧게 자라기도 전에 이미 중간 어딘가가 부러졌을 겁니다. 부러진 대나무는 자라지 못하고, 자라지 못하는 대나무는 사그라지게 마련이니 마디는 대나무가 성장하기 위한 수단이자 생존을 위한 필수라 생각됩니다.
역사에도 분명 마디 역할을 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 또한 이미 부러졌거나 일찌감치 사라진 나라가 됐을 거라 생각됩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가 된 이『삼국사기』50권이 완성된 것은 1145년인데, 김부식은 이 저서를 쓴 동기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우리나라 사대부들은 중국의 경학經學이나 역사에는 상세하나 자기 나라의 역사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으니, 그것을 개탄하여 이 책을 편찬한다.' -<한국사 인물 산책> 1, 69쪽-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쓴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사 인물 산책>의 저자 이은직, 재일교포인 이은직은 어떤 이유로 <한국사 인물 산책>을 썼을지 궁금해집니다.
제일교포가 교포들을 위해 쓴 역사 인물서 <한국사 인물 산책>
<한국사 인물 산책>1, 2 (지은이 이은직, 옮긴이 정홍준, 펴낸곳 도서출판 일빛)의 저자는 재일교포입니다. 조국을 떠나 있다고는 하나 조국 통일을 염원하고 있던 저자는 동포 모두에게 마음의 양식이 되고 민족의 본질을 궁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 책을 집필하였다고 합니다.
책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 흔적이 또렷한 92명의 삶과 가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인물들은 저 멀리 삼국시대부터 근대사에 이르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입니다. 역사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람도 있고, 한 시대의 물꼬가 돼 흐르는 방향을 선도한 이들도 있습니다.
3월 들녘 길을 걷다보면 아지랑이를 보게 되고, 6월 산길을 걷다보면 송홧가루를 쐬게 되듯이 이 책을 읽다보면 아지랑이 같은 역사, 송홧가루 같은 문화들을 만나게 됩니다. 솔거와 왕산악, 백결선생 등을 읽다보면 삼국시대를 꽃피운 예술가들의 삶을 저절로 만나게 됩니다.
한국 불교의 두 기둥이었던 의천과 일연, 고려의 마지막을 장식한 최영과 정몽주, 백성을 사랑한 민족 의학의 대가 허준 등이 산길처럼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회 개혁을 꿈꾸었던 풍운아 허균, 혁명적인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 등 92명의 삶과 가치가 흐르는 물줄기처럼 소개되고 있어 이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역사적 인물들과 나란히 걷고 있는 역사 산책길로 들어섭니다.
삼국시대를 살던 인물들로부터 삼국시대를 읽고, 고려시대를 살던 인물들로부터 고려시대를 지배하던 정치와 문화, 사회적 가치와 시대적 갈등까지도 새길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박제가가 유학하려는 이유, 가슴 뭉클하다청나라에 갈 수만 있다면 마부로 따라가도 관계없습니다. 가서 북경의 문물 제도를 눈으로 확인하고 여러 가지 선진 과학을 배우고 싶군요. 거기서 배운 바를 귀국하여 유용하게 쓸 수만 있다면 평생을 일개 농부로 마친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사 인물 산책> 2, 152쪽- 요즘도 유학을 떠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유학이 출세를 위한 한 방편이던 때도 있었습니다. 출세를 하려면 유학쯤은 다녀와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유학이 출세의 수단이 된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유학을 원하는 사람들,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 대부분이 원하는 첫 번째 목표는 부귀영달이자 입신양면이라는 게 솔직한 고백일 겁니다. 그쯤의 목표를 갖고 유학을 다녀와 부귀영달을 누리고 입신양면에 성공한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유학 목표가 부귀영달과 입신양면이었던 사람들이 이룰 수 있는 건 성공(?)한 개인사로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서얼출신으로 개혁을 주장하였던 박제가가 청나라를 가고자 했던 건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선진 과학을 배워 나라에 유용하게 쓰이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학을 다녀와서 더 힘든 삶을 살게 된다면 대개의 사람들은 유학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피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박제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하고자 각오한 것이 박제가의 삶입니다. 그러한 각오, 그러한 삶이었기에 흐르는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재일교포였기에 더 애틋하고 소중했을 인물들같은 역사, 같은 인물이라 해도 조국을 떠나 있는 저자에게는 훨씬 더 애틋하고 소중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 동포 모두의 마음에 민족의 본질을 이양시키기 위한 모종, 조국애를 심어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선정한 인물들이게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을 더듬어 나가는 산책길은 섬돌만큼이나 또렷합니다.
하나하나의 돌이 놓여 징검다리가 되고, 하나하나의 돌을 내딛다보면 어느새 강물을 건너게 됩니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92명의 인물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 면면을 새기다 보면 삼국시대에서 발원한 역사 속에 스며있는 92명의 인물들과 산책이라도 한 듯이 가까워져 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인물을 통해 만나는 역사, 역사적 인물들과 함께하는 역사 산책을 통해 우리 역사의 흐름에 결정적인 역할을 끼친 인물들이 흔적처럼 남긴 삶의 가치를 숫돌삼아 다시 한 번 삶의 가치를 벼리고 수정할 수 있는 사고의 산책이 될 거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한국사 인물 산책> 1, 2 (지은이 이은직 / 옮긴이 정홍준 / 펴낸곳 도서출판 일빛 / 2014년 11월 10일 / 각 2만 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