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많은데 내가 나갈 만한 교회는 없어"이런 말은 어제 오늘만 들은 이야기가 아니다. 벌써 교회에서 벌어지는 교회답지 않은 일들이 매스컴의 단골 메뉴가 된 지 오래다. 그럴 때마다 성도가 아닌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한다. 교회가 정치와 사회를 걱정하는 게 맞다. 사찰과 성당이 사회를 걱정하는 게 맞다. 그런데 어느 새 정치나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고 있다. 그 중심에 개신교회가 있다.
교회는 많은데 교회가 없다?교회는 많은데 교회가 없다. 십자가 탑은 많은데 십자가 정신은 없다. 목사는 많은데 목자가 없다. 교인은 많은데 그리스도인은 없다. 더군다나 이젠 교인이 많다는 말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2005년 개신교 교인수가 862만 명이다. 1200만 명이라고 자랑하던 교인수가 10년 새 급격히 떨어졌다.
1995년 전체 인구의 19.7%이던 교인수가 2005년에는 18.3%로 떨어졌다. 가톨릭은 6.6%에서 10.9%로 껑충 뛰었다. 불교와 개신교의 추락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비종교적인 작태 때문이다. 반면 가톨릭의 성장은 부정적인 면보다 교황 방문 등 긍정적인 면이 매스컴을 탔기 때문이라 분석된다. 개신교 안에서는 이런 통계를 못 믿겠다는 분위기다.
그러나 이런 성도의 교회 이탈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논의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교회를 이탈하는 성도를 이름 하여 '가나안 성도'라는 신조어로 부른다. '안 나가'를 거꾸로 하여 '가나안'으로 대치한 단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복지의 상징으로 삼았듯, 교회를 이탈하는 성도들은 교회 밖(안 나가)을 복지의 이상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청아람 양희송 대표가 쓴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누가 대놓고 교회 밖으로 성도들이 나가고 있다고 털어놓을 수 있을까. 통계청의 통계가 틀렸다고 말하는 용기는 있어도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짚어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양희송 대표가 욕먹을 각오를 한 모양이다.
교회는 진짜 복음인 예수의 낮아짐, 이 땅에서의 천국 실현, 사랑과 베풂을 버렸다. 언제부턴가 '교회성장'이라는 복음에 사로잡혔다, 그 결과 대형교회를 이루는 게 목회 성공이 되어버렸다. 저자는 이를 <적극적 사고방식>(노먼 핀센트 필)을 기조로 하는 <긍정의 힘>(조엘 오스틴)에 이르는 자기개발식 설교의 전형으로 보았다.
이런 적극적 모델은 교회를 급성장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문제가 터졌다. 혹 대형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면 열등감의 발로라고 몰아세운다. 목사들이 빚어내는 물신주의적 설교는 이미 도를 넘었다. 책을 인용해 보면 대강 이렇다.
"헌금에 대한 대형교회 목사들의 최근 언급은 심각한 수준인데, "누가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는 누가 더 헌금을 더 많이 했는가를 비교해 보면 된다"(조용기 목사)거나, "제물로 하나님 관심 끌면 자식 잘돼"(총재철 목사)로 번지더니, "십일조 안 하면 암 걸린다"(김홍도 목사)로 정점을 찍었다.(85쪽)
목사인 나도 이런 설교를 하는 교회는 나가고 싶지 않다. 교회의 교회답지 않은 이런 물신적인 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교회 리더의 도덕적 타락, 성추행을 하고도 버젓이 목회하는 목사, 교인 상호간 이권분쟁, 심지어는 깡패를 동원하여 양측이 싸우는 경우도 허다하다.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2013년 4월 목회사회학연구소가 '가나안 성도'에 대하여 조사하여 발표한 적이 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기독교인이 전체 교인의 약 10%(약 100만 명)에 해당한다. 교회 안 나가는 이유는 '자유로운 신앙을 원해서'가 30.3%로 가장 많고, '목회자에 대한 불만' 24.3%, '교인들에 대한 불만' 19.1%, '신앙에 대한 회의' 13.7% 등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신앙에 대한 회의'가 이유인 불출석 성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가나안 성도'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인 채로 교회 밖에 있는 이가 '가나안 성도'다. 교인들의 삶이 신앙인답지 않거나 헌금을 강조하고 독단적인 목회자의 교회 운영 등이 가나안 성도 양산의 주된 요인이다.
다시 교회로 돌아간다면, 올바른 목회자가 있는 교회, 공동체성이 강조되는 교회, 부정부패가 없는 건강한 교회를 택하겠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가나안 성도 중 21%가 교회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답했다.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는 바로 이들에 대한 논의라고 하겠다.
저자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해묵은 가톨릭의 명제를 들고 나와 '교회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다시 던진다. 즉 '가나안 성도'를 양산한 지금의 교회가 정말 교회인지 묻는다. 저자는 '교회교' '목사교'로 전락한 교회의 민낯을 그대로 까발린다. 레기 맥닐의 말처럼, 이들은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에클레시아(교회)' 본연의 모습을 잃은 교회는 이미 개혁의 대상이다. '가나안 성도'는 나름대로 저항한다. 제도화된 교회와 실패한 설교, 공동체의 영성부재 등과 싸운다. 그러다가 이내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주는 교회'는 없음을 깨닫고 '쇼생크 탈출'을 감행한다. 소위 '하나님의 뜻'을 빙자한 부당함의 방조가 숨 막히게 한다. 교회의 위선도 가나안 성도를 양산하는 주요 요인이다.
저자는 <나는 꼼수다>의 김용민이 2012년 세운 대학로의 벙커원 카페에서 드리는 예배를 대안 중 하나로 소개한다. 조직이 없고, 헌금이 자유로우며, 담임목사가 없다는 점에서 기성교회와 다르다. 그러나 그런 것 때문에 본래적 교회와 닮았다고는 할 수 없다.
저자는 원론적 가르침(유치원생 교육)을 반복하지 말고 성인용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현실 교회가 싸우는 교회인데 대상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시대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교회와 성도의 세속화에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부인하고 싶어도 '가나안 성도'는 현실 교회의 한 단면이다. 외면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끌어안기도 버겁다. 교회가 존재론적 가치를 재정립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가나안 성도'에게 목을 축여 줄 물이 없으면서 다시 돌아오라고 손짓할 순 없다. 먼저 교회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성도>(양희송 지음 / 포이에마 펴냄 / 2014. 11 /297쪽 / 1만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