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을 따라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즐겁다. 더욱이 왁자지껄 함께 길을 나설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그 기쁨이 배가되는 것 같다. 우리 일행은 넷. 지난달 19일, 백제 시대에 금마저(金馬渚)로 불렸던 전북 익산을 향했다.
오전 8시 10분께 마산합포구 월영동에서 출발하여 익산 미륵사지(사적 제150호,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이른 시간이 오후 12시 10분께. 먼저 유물전시관으로 들어가서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 유물들을 둘러보았다.
백제 무왕 때 창건된 미륵사는 백제 시대 최대의 절집으로 알려져 있다. 무왕이 왕비와 함께 용화산 사자사로 가던 길에 용화산 아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소원해 연못을 메우고 금당, 탑, 회랑 등을 지어 미륵사라 이름했다고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무왕이 누구인가.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의 아버지이면서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아내로 삼기 위해 손수 지었다고 전해지는 서동요의 주인공이다. 이런 연유로 무왕과 선화공주의 서동설화가 미륵사 연기전설로 많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어 왔다.
미륵을 꿈꾸던 백제의 간절한 염원을 보다
우리는 유물전시관에서 나와서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인 당간지주(보물 제236호)를 보러 갔다. 절에서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깃발을 달아 두는 장대가 당간이다.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개의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부른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90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2기가 서 있었다.
미륵사지 서원에 있던 석탑(국보 제11호)은 지난 1998년부터 보수와 정비 작업을 추진하여 지금도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큰 규모로 본디 9층으로 추정되는데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여 반쪽 탑의 형태로 6층까지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한다.
신라 황룡사와 거의 같은 규모로 짐작되는 호국사찰로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지는 미륵사. 그 미륵사의 역사적 가치를 이해하는데 있어 미륵사지 석탑은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2009년 1월에 석탑을 해체하여 조사하던 중 1층 중심기둥에서 사리장엄이 발견되어 미륵사의 창건 배경과 목적, 발원자, 석탑 건립 시기 등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리장엄에는 놀라운 반전이 숨어 있었다. 탑을 조성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의 발원문인 금제사리봉영기를 통해 무왕의 아내가 서동설화에 등장하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에 해당하는 좌평 사탁적덕의 딸이라는 사실이 새로이 밝혀졌다. 국경을 초월한 서동설화의 로맨스에 오랫동안 젖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적잖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게 했던 역사적 현실이었다.
미륵사에는 다른 절집들과 달리 탑이 3기가 있었다. 서원 석탑과 같은 석탑이 동원에 또 하나 있었고, 두 석탑 사이 중원에 목탑이 있었다. 지난 1991년 복원을 시작하여 이듬해 완료된 동원 구층석탑을 들여다보면 서원 석탑의 구조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가 있다. 복원된 동원 구층석탑은 이중 기단이고 1층 탑신의 각 면이 세 칸으로 나뉘어 있는데, 가운데 칸에 문을 내어 사방으로 통하게 해 놓았다.
미륵사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각 탑의 북편에는 금당을 하나씩 두었고, 이들 탑과 금당을 마치 한 단위로 구분하듯 회랑을 둘러 서쪽은 서원, 동쪽은 동원, 중앙은 중원이라는 개념의 특이한 삼원식 가람 형태였다는 게 밝혀졌다.
나는 웅장했던 미륵사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미륵사의 옛터를 걸었다. 무엇보다 늪지 위에 세워진 절집이니만큼 홍수에 대비하고 습기를 최소화하기 위해 물을 한쪽으로 모아 연못으로 흘러가게 했던 백제인들의 지혜를 엿보게 되면서 백제인들의 건축과 수학, 과학, 예술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미륵하생신앙이란 관점에서 볼 때 미륵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 하루 빨리 내려오기를 꿈꾸던 백제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도 느껴졌다.
왕궁리 오층석탑에 반하고 고도리 불상의 애틋함도 가슴을 파고들고
오후 2시 20분쯤 미륵사지 인근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색다른 맛의 두부전골, 들깨가루가 들어간 부추무침과 겉절이 김치 등을 맛보며 미륵사지의 감동을 같이 나누었다. 푸짐한 점심을 끝내고서 우리 일행은 미륵사지와 더불어 최대 규모의 백제 유적으로 꼽히는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에 4시 10분께 도착했다.
마한 시조인 기준의 도읍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과 별도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 등 다양한 견해가 얽혀 있었던 곳이나 백제 무왕 때 왕궁으로 조성한 자리에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사찰이 들어선 것으로 보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이곳의 백미는 단연코 조형미가 뛰어난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이다.
멀리서 내 시야에 들어올 때부터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높이가 9m로 단층 기단, 얇고 넓은 지붕돌과 3단 지붕돌받침이 특징적이다. 그동안 이 탑의 축조 시기를 놓고 백제, 통일신라, 고려 초라는 견해가 엇갈리면서 의견이 분분했지만 백제계 석탑 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하고 있다.
해가 짧아 서둘러 여기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고도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6호,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을 보러 갔다. 높은 관과 그 위에 사각형의 갓을 덧쓰고 있는 2구의 석상이 옥룡천을 사이하여 마주 서 있는 게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사다리꼴의 돌기둥과 네모난 얼굴, 게다가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고 어깨와 얼굴이 거의 붙어 있을 정도로 목이 퍽이나 짧다. 불상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 온 수호신 같은 분위기다.
그런데, 200미터 거리를 두고 두 불상이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 참 애틋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칠월 칠석날밖에 만날 수 없는 견우직녀처럼 섣달 그믐날마다 옥룡천을 건너와 서로 끌어안고 회포를 나누다 새벽닭이 울면 헤어져 각자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어둠이 내려앉기 전에 우리는 마산을 향해 길을 나섰다. 백제는 후기에 들어와 도읍지에서 멀지 않으면서 군사,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춘 지역을 물색하던 중 익산을 선택했던 것 같다. 미륵불은 석가나 아미타여래와 달리 미래불이다.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들에게는 미륵불이 행복한 삶을 만들어 줄 수 있는 메시아로 여겨지던 시대에 어쩌면 백제 무왕은 미륵불이 출현하는 시기에 나타나 온 세상을 정법으로 다스린다는 전륜성왕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