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박근혜 정부가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을 사실상 무기한 연기한 것을 놓고, 군사주권 포기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전작권을 둘러싼 한반도 안보 문제가 주요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군사전문가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의 '군사주권을 빼앗긴 나라의 비극' 연재 글을 게재합니다. 이 연재 글은 김종대 편집장의 페이스북에도 실렸습니다. [편집자말] |
영혼이 지치는 연말입니다. 1차 대전 당시인 1914년, 벨기에 플랑드르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영국군과 독일군은 상부 지시와 무관하게 참호를 떠나 완충지대에서 함께 성탄을 축하했습니다. 양 측 군인들은 먹을 것과 담배를 나누고 축구 경기도 벌였습니다. 지친 전쟁터에서 벌어진 이 유명한 일화는 지금 기념비도 세우고 영화로도 알려졌습니다.
2차 대전 이후 미 육군의 마샬 준장은 미군 지도부를 충격에 빠뜨리는 연구 결과를 발표합니다. 1·2차 세계대전에서 일선 전투원들의 실제 사격률은 50%에 미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자신이 살해당하는 걸 두려워하지만, 그보다도 누군가를 살해해야 한다는 걸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제대로 겨누지 않았다는 겁니다.
모든 전쟁이 그랬습니다. 살육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 누군가 이를 명시적으로 표방하지는 않았더라도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일 것입니다. 총을 버리고 꽃을 들자는 호소에 인간의 영혼은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병사의 총구는 흔들립니다. 모든 지휘관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병사들이 제대로 사격을 하게 할 것인가"에 모아집니다.
교전권을 포기하고 평화권을 밝혔던 그 때
삶이 팍팍하고 영혼이 지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지 내가 겪어야 할 어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어쩌면 남을 어렵게 만들어야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상황의 압력, 구조의 압력 때문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작은 이익을 포기하지 못하는 갇힌 영혼은 마치 전쟁터에서 사격을 망설이는 병사의 신세로 전락하지 않았습니까?
약속한 주제를 다 연재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내년에 마저 이어가겠습니다. 당분간 이 주제로는 연재를 쉬고자 합니다. 연말에 밀린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 대신 세상의 다양한 잡설은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그 대신 여러분들과 망년회를 하고 싶군요. 혹시 저를 만나고 싶으신 분들은 오는 18일 오후 7시,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리는 저와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의 북 콘서트에 오시기 바랍니다. 원하신다면 행사 종료 후 밤새도록 자리를 함께 할 용의가 있습니다.
바로 100년 전 영국군과 독일군이 즐기던 은밀한 축제 같은 분위기, 교전권을 포기하고 평화권을 행사하던 밝은 영혼들의 축제... 그런 자리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다음 번에 계속, 이 글은 김종대 편집장의 페이스북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