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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 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금낭화로, 꽃말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한다.
금낭화로, 꽃말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한다. ⓒ 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환위이민정책

조선 백성들은 망국 후, 일제가 싫어 중국 동삼성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또한 일제는 환위이민정책(換位移民政策 :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이래 일본인을 조선으로, 조선인을 중국 동북으로 이주를 보낸 정책)으로 조선 백성들을 국외로 내쫓기도 했다. 그래야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건너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고국을 등진 조선 백성들은 대부분 단봇짐에 짚신 몇 켤레, 바가지 하나 대롱대롱 차고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왔다.

이주자들이 만주 봉천, 개원, 삼성자 등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면 부민단에서는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들이 현지에 도착하면 누구네 몇 가구, 또 누구네 몇 가구씩 배당해 주었다. 그들을 배당받은 집은 이주민들이 정착할 때까지 먹여주고 보살펴 주었다. 그들은 한 해가 지나면 대체로 정착하기 마련인데, 그러면 다시 고향의 가난한 친지들을 불러들였다.

그러자 만주의 허허벌판은 흰옷 입은 조선 백성들로 허옇게 덮여갔다. 이렇게 차차 이주자가 늘어나자 부민단에서는 자치 규율도 새로 만들고, 학교도 새로 세웠다.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을 때까지 만주 땅에다 작은 정부를 만들어 운영케 된 셈이었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옛 터(2004. 5. 촬영)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옛 터(2004. 5. 촬영) ⓒ 박도

이시영, 이상룡 등 독립 지도자들이 나라를 빼앗긴 근본 원인을 조선 백성들의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역설한 탓인지 이주자들의 교육열은 눈물겨웠다.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우고, 중학교는 드문드문 세웠다. 집이 멀거나 다른 지방에서 온 학생들은 학교 부근 동포들이 나누어 맡아 하숙시켰다. 그 무렵 서간도만 해도 이백여 학교가 들어섰고, 북간도에도 그 이상으로 학교들이 세워졌다.

부민단에서는 이렇게 많은 학교를 세워 운영하다 보니 많은 돈이 필요했다. 초기에는 독립지사들이 떠나올 때 집과 전답을 팔아 온 돈으로 충당했으나, 그 돈이 떨어지자 각 가구마다 세금을 거둬들였다. 해마다 학교가 늘어나자 그 세금도 점차 올랐다. 그러자 이주민 가운데 특히 부녀자들은 불평이 많았다. '고산자 장터는 범 아가리'라는 말도 나왔다.

이주자들이 가을 추수 후 장터에 가서 벼를 팔아 돈을 만지면 무슨 단체, 모슨 모임에서 즉석 가두모금을 했기 때문이다. 좀 심한 아낙네들은 대놓고 퍼붓기도 했다.

"일본 놈 보기 싫어 만주에 왔더니, 농사지어 놓으면 군자금 한다고 다 뺏어간다."

그러면 남자들이 그런 부녀자들을 나무랐다. 나라 위해 하는 일인데 다 같이 협조해야 한다고.

대한광복회

아무튼 학교를 새로 세우고, 기존의 학교를 운영하고, 대일 항전 무기 구입 등에 쓴다고 늘 독립군자금이 부족했다. 이런 독립군자금을 모으는 일은 부민단 성산 당숙이 맡고 있었다. 그 무렵 왕산의 제자 박상진은 국내에서 영주의 채기중(蔡基中)과 함께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독립군자금 모금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 군자금 운반책은 큰집 허규(許珪) 형이 주로 맡았다.

 대한광복회 박상진 총사령
대한광복회 박상진 총사령 ⓒ 자료사진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부호들의 의연금으로 충당했다. 박상진은 사전에 부호들을 조사해 그들에게 독립군자금 갹출 배당금 통고문을 보내고,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대한광복회원이 찾아가 받아오는 형식이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은 부호들이 말을 듣지 않자 그 시범으로 칠곡 장승원을 제1호로 지목 처단했다. 장승원은 허위의 도움으로 경상도관찰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왕산에게 분명히 벼슬 대가로 후일 20만 원을 독립군자금으로 헌납하기로 약속했다(관련기사 : 왕산 허위의 죽음... 웃고 있는 한 사람).

왕산 순국 이후 박상진은 몇 차례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장승원은 끝내 그런 약속을 한 일이 없다고 식언을 할 뿐더러 일제 경찰에게 심부름꾼을 밀고하겠다고 협박해 박상진은 일찍부터 잔뜩 벼르고 있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채기중은 강순필·유창순 동지와 함께 실행에 옮겼다. 1917년 동짓달 어느 초저녁, 이들은 경북 칠곡군 북삼면 오태동(현, 구미시 오태동) 장승원 집의 담을 훌쩍 뛰어넘어 내실로 가서 육혈포로 장승원을 처단한 뒤 대문에다가 포고문을 붙이고 유유히 사라졌다.

"조국 광복에 협조치 않는 자는 처단한다. -대한광복회"

 장승원 저택의 안채(1999년 촬영)
장승원 저택의 안채(1999년 촬영) ⓒ 박도

독립전사의 산실

1913년 5월 조국 광복을 염원하는 독립지사들의 정성으로 신흥학교가 개교했다. 신흥학교에는 본과와 특별과를 두었는데 본과는 4년제의 중학 과정이었으며, 특별과는 3개월 또는 6개월 기간의 무관 양성을 위한 속성과였다. 본과에서는 일반 중학 과정에, 무관 교육을 겸하는 신교육을 실시했다.

신흥학교는 설립 당시 원대한 포부와는 달리 큰 흉작으로 곧 재정난에 봉착해 어렵게 운영되었다. 그래서 둔전제(屯田制 : 군사를 주둔·정착시켜 평시에는 농사를 짓게 하며 군사를 훈련함)를 도입해 생도들은 농사나 땔나무는 직접 충당했다. 이런 가운데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만세의 함성이 일제의 무력 앞에 처참하게 꺾이게 되자, 항일무장 투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이 무렵, 일본 육사 출신의 이청천과 김광서가 최신 병서와 군용 지도를 지니고 신흥학교를 찾아왔다. 이들의 가담은 독립운동 진영에 백만 원군으로 큰 감명을 주었으며 신흥학교 지원자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마침내 신흥학교는 1919년 5월 3일(음력)에 정식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해 새로이 개교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전성기 때는 1기 학생 수가 600여 명에 이르렀다. 국내의 수많은 애국 청년들이 소문을 듣고 압록강·두만강을 건너오는 목표가 대부분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고자 함이었다.

신흥학교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면서, 유하현 고산자에는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어 고급 간부를 양성했고, 통화현 합니하, 칠도구, 괘대모자 등에는 신흥무관학교 분교를 두어 초등군사반을 편성해서 3개월 간의 일반 훈련과 6개월 간의 후보 훈련을 담당케 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던 이범석 장군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던 이범석 장군 ⓒ 자료사진
당시 고등군사반의 초대 학장에는 이시영, 교장 이세영, 부교장 양규열, 학감 윤기섭, 훈련감 김창환, 교성대장 이청천, 교관 오광선·신팔균·이범석·김광서·성준용·원병상·박장섭·김성로·계용보, 의무감 안사영 등이 있었다.

합니하 초등군사반의 교장에는 이장녕, 학도대장 성준용, 교관 박두희·오광선·이범석·홍종락·홍종린 등이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수많은 지원자로 활기에 찼지만 일제는 중국 당국과 함께 재만 독립운동 단체를 초멸하기 위한 작전으로 독립운동자들을 체포하거나 살해했다.

이에 서로군정서(1919년 만주에서 이상룡·이시영·김창환 등이 조직한 독립군 정부)에서는 교성대를 편성해 1920년 8월 학생들을 안도현 삼림으로 이동, 사실상 신흥무관학교는 폐교되었다.

하지만 짧은 기간에 배출된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이후 항일 독립전사로 줄기차게 투쟁했다. 1920년의 청산리 전투 주역도 이들이요, 임시정부 광복군과 의혈단까지 이들이 주역이었다. 또한 이들은 국내에 잠입하여 구국대열에 몸을 던졌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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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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