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교실과 달랐다. 교실 앞 자리에는 학생들이 빼곡히 앉아 있고, 수업 내내 웅성거렸다. 옆 사람과 잡담은 기본이고 핸드폰이 여기저기서 울리기도 했다. 수업이 끝났는데도 집에 갈 생각은 않고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갑자기 박점영(69)씨가 학생들을 향해 외쳤다.
"전체 차렷. 선생님께 경례!"선생님과 학생들이 서로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짝꿍들과 문제 푸는 정다운 한글배움터부평도서관에서는 지난 9월부터 '하반기 열우물 한글배움터'를 진행하고 있다. 노인들에게 한글과 기초적인 수학, 영어를 가르치는 교실이다. 지난 9일, 도서관을 찾아가 노인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엄마, 여그 도서관이여. 핵교 왔어. 너 시방 일어났냐? 밥 먹었냐? 그냥 해봤어? 그래 인자 끊자."박진숙(53) 교사가 묻는 질문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던 한 할머니가 집에서 온 전화인지, 큰 소리로 통화한다. 그래도 빨리 끊으려 애쓴다.
이번에는 덧셈을 공부하는 시간이다. 만 단위와 천 단위 숫자를 더하는 문제인데, 두 숫자의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해 헤매는 모습이 여기저기 보인다. 박 교사는 교실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의 문제풀이 과정을 돕는다.
박 교사의 지적에 한 학생은 교과서에 쓴 숫자를 지우려 필통을 열었으나, 지우개가 없다. 그때 옆자리 할아버지가 지우개를 던져준다. 학생들은 문제를 못 풀고 있는 옆자리 짝꿍에게 선생님을 대신해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또래교육'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문제를 못 풀던 학생은 짝꿍의 친절한 설명에 연신 고개를 끄덕거린다.
"어깨너머 배운 한글, 제대로 배우고 싶어요""부평도서관에 하모니카를 배우는 반이 있었는데, 그거 배우다 여기에 한글배움터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오늘 결석한 반장을 대신해 인사를 한 박씨이다. 박씨는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40년간 살았다. 3년 전 인천으로 와 지금까지 동인천에서 살고 있다.
"여기 말고 집 근처 도서관에서도 한글배움터가 있는데, 여기 선생님이 참 잘 가르쳐줘요. 그래서 전철 타고 멀리서도 오지요."그러나 그것만이 이유의 다가 아니라고 박 교사는 말했다.
"우리가 2011년부터 이 교실을 열었는데, 처음에는 부평구 반상회 소식지에도 실리고 지역 유선방송에서도 취재해갔어요. 동네에 얼굴이 알려지고 나서 더 이상 안 나오는 분들이 생기는 거예요. 지금까지 주변에서 한글 모르는 거 몰랐는데 한글배움터에 다닌다는 걸 사람들이 알고 나서 상처를 받은 거죠."그래서 집 주변이 아닌 멀리 다니는 분들이 꽤 된단다. 그러나 박씨는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달랑 두 달을 다닌 게 학교생활의 전부인 박씨는 웬만한 글자는 읽을 수 있지만, 겹받침이나 조금 복잡한 글자는 아직도 서툴다.
"여기는 3월부터 다녔어요. 글은 어깨너머로 배워 알지만, 그것 말고도 여기 오면 모르는 걸 많이 터득해요. 배우면서 제일 좋았던 것은 어려운 일 닥칠 때 당황하지 말고 여러 가지 해결방법이 있다는 걸 선생님이 가르쳐줄 때예요. 책보다 그런 얘기들이 더 잘 들어오죠."
공부하면서 힘들었던 건 뭐냐고 묻자, 받침이 달린 글자는 여전히 쓰기가 쉽지 않단다. 박씨는 올해 초, 초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이곳 한글배움터에서 유일하게 초등학교 졸업자격증이 있는 셈이다. 내년에는 남인천중·고등학교에 입학한다. 학력이 인정되는 이 학교에서 중학교 과정을 배운다.
글을 읽을 줄 아는 박씨의 아내가 반상회보에서 검정고시 안내를 보고 남편에게 제안해, 3개월간 공부해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직원 20여 명이 일하는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는 박씨는 대기업 계열사에서 몇 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15년 전에 운전면허증을 땄다는데, 그것도 1종이란다.
"그게 나도 신기해요. 완전 까막눈은 아니라 읽고 답안지를 작성하긴 했죠. 면허시험을 보려면 수입증지를 붙여야 하는데, 열 번 떨어져서 운전면허 서류 한 바닥이 증지로 너덜너덜해 나중엔 붙일 데가 없었다니까요."객지에서 사업하려면 계산해야 할 일도 많아 애로도 많았다.
"그런데 하니까 되더라고요. 혼자서 책을 보고 듣고 했는데, 머리에 슨 녹을 벗기느라 고생이 많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어요.""어르신들 실생활에 도움 줄 때 가장 보람을 느껴요""이곳에 오시는 분들의 연령대는 다양해요. 50대에서부터 80대까지 있어요. 그런데 사실 70대 중반이 넘어가면 새로운 지식을 익히는 게 힘들죠. 특히 아쉬운 건 큰 수술을 하거나 뇌졸중을 앓다가 다시 나오는 분들은 퇴행이 눈에 띄게 보여요."연수구 연수동에 사는 박 교사는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결혼과 동시에 전업주부로 지냈다. 아이들도 어느 정도 키워놓고 나서 사회생활을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다문화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기회를 얻었다. 7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지인의 제안으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한글 문해(글자 해독)교육을 시작했다. 부평도서관에서 운영하는 한글배움터는 인천에 거주하는 사람이면 연령과 상관없이 누구나 올 수 있다.
"열심히 배우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분들이 계셔요. 남편이 아프거나 자식한테나 집안에 일이 생겨 포기할 때는, 안타깝고 아쉽죠. 좋았던 때요? 집안에 잔치가 있을 때 저를 부르기도 해요. 글자를 익히게 해줘 감사하다고도 하죠."박 교사는 일의 보람을 느꼈던 몇 가지 사례를 더 얘기해줬다.
"한번은, 자식들이 '엄마는 한글을 모른다'고 보험 계약을 자식의 이름으로 해놓은 것을, 한글을 배우고 나서 자식들한테 얘기해 본인 이름으로 바꿨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감사하다고 했어요. 그런 말을 들을 때 보람을 느끼죠. 어느 건물에서 자동문인 줄 알고 그냥 서 있다가 문이 안 열려 창피를 당했던 사람이 '눌'자를 배운 후에는 '눌러보세요'을 읽고 누르고 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는 그냥 글자를 가르친 건데, 그분들한테 큰 도움이 됐다고 하니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박 교사는 글을 모르다 배우러 오신 분들이라 글자를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자 자체보다는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주요하게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워낙 영어가 대중화돼 기초적인 영어 대문자를 가르치기도 해요. MBC, KBS, MRI 같은 것들을 가르치는데, 예전에는 병원에 가서 간호사나 의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데 지금은 말뜻을 이해하고 다음 상황을 준비하기도 한답니다."강의 계획서에는 대중교통 이용방법 익히기, 친척의 호칭 익히기, 신문에 있는 일기예보 읽기, 병원에 있는 시설과 이용절차 익히기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