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곧 만 여덟 살이 되는 아들 주언이의 장래희망은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스페인 축구선수 카시야스처럼 훌륭한 골키퍼가 되고 싶어 한다. 축구선수를 꿈꾸는 주언이는 틈만 나면 거실에서 의자로 대충 골문을 만들어 놓고 형은 공격수가, 자기는 골키퍼가 되는 축구게임을 한다. 또 상대가 누가 됐든 장소가 어디가 됐든 테이블 풋볼을 쉬지 않고 즐긴다.
휠체어 농구에 빠진 아이, 휠체어 타는 장애인입니다유튜브에서 가장 즐겨보는 동영상은 이제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이나 비행기 관련 동영상이 아니라 축구경기가 되었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각 팀 공식 홈페이지를 제집 드나들 듯 분주하게 오가며 각종정보들을 섭렵한 후 나름의 잣대를 가지고 분석한다.
주언이는 제 힘으로는 일어설 수도 없는 척수손상 장애인이다. 주언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항공사 직원이 되고 싶다며 인터넷을 무한 탐색했다. 그런데 학교 체육시간에 축구 경기를 시작하고 골키퍼로 활약(?)하게 되면서 축구에 무한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영국의 또래 아이들이 이맘 때 갖기 시작하는 축구 사랑에 편승해 친구들에게 결코 뒤쳐지지 않는 정보력을 자랑하며 축구에 관한 대화를 리드한다.
체육 선생님도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라는 주언이의 정체성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늘 골키퍼 역할을 맡겨 주신다. 덕분에 휠체어까지 한 몸으로 엮어 당당하고 멋진 모습으로 친구들의 골을 막아내 'Man of the Match(오늘의 선수)'로 뽑혔다며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엄마에게 자랑한다.
주언이가 사는 이곳 영국에는 장애인이 불편 없이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스포츠 프로그램이 구비되어 있다.
주언이가 얼마 전에 휠체어 농구 영국 국가대표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그리고 나서 농구선수가 되겠다고 해 휠체어 농구를 시작하기 위해 클럽에 방문했다. 서류상으로는 8살부터 가능하다고 되어 있다. 주언이의 나이는 일곱 살. 하지만 실제로 보니 열두 살 정도는 되어야 공이라도 한 번 만져볼 수 있을 정도로, 참여한 친구들의 평균 나이가 높았다.
휠체어를 분주히 굴려 공을 쫓아다니지만 골을 잡는 것도 골을 넣는 것도 힘에 부쳐 보였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 밤이면 휠체어를 굴리느라 과부하가 걸린 팔이 시려서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의욕은 하늘을 찔렀지만 정작 도전해 보고는 한계가 느껴진 것일까. 주언이도 조금 더 커서 다시 시도해야 겠다고 슬며시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니 짠한 생각이 들었다.
기성용을 만난 후, 우리 아이가 변했다그러던 중 지난 21일 열린 프리미어 리그 스완지 시티와 헐시티의 경기를 보게 됐다. 스완지시티에는 한국 출신의 기성용 선수가 뛰고 있다.
아이들이 축구를 좋아하긴 하지만 프리미어 리그의 경기를 직접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때문에 아이들도, 아이들을 데리고 간 엄마도 경기 전부터 기대감에 휩싸였다. 먼저 어웨이(방문경기) 서포터즈에게 할애된 휠체어 좌석을 배정 받고 입장했다. 아이들은 자신과 같은 눈높이에서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을 코 앞에서 바라보고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특히 기성용 선수가 몸을 풀 때에는 목청껏 응원을 보냈다.
이 날의 경기는 어웨이 팀이었던 스완지 시티가 1:0으로 헐시티를 이겼다. 결승골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기성용 선수. 경기가 끝난 후, 혹시 기성용 선수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어웨이 팀의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그곳에 있는 다른 스완지의 팬들과 함께 추위 속에서 선수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추위를 참아내면서도 기성용 선수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간절한 모습이란….
얼마나 기다렸을까, 경기가 끝나고 샤워를 마친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나와 하나 둘씩 버스에 오르기 시작한다. 드디어 기다리던 기성용 선수의 모습이 보이자, 용기를 내어 아이들과 사진을 찍어줄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기 선수는 다른 팬들에게 사인을 모두 해준 뒤 흔쾌히 같이 사진을 찍어주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시간이 아이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위대했다. 주언이는 정말로 축구선수가 되기로 결심한 듯 보였다.
이제 평소 재활 운동을 무척 싫어하던 주언이는 틈만 나면 엄마한테 운동을 시켜달라고 요청한다. 뻣뻣하게 굳어 잘 안 움직이는 고관절 운동도 시켜달라고 하고, 상체를 강화하기 위한 윗몸일으키기도 형과 동생의 도움을 받아 그들만의 놀이로 승화시켜 가며 제법 열심이다. 사이사이 구글링을 통해 기성용 선수 관련 기사와 정보를 읽고 현지 언론의 인터뷰를 찾아서 보고 보고 또 본다. 기성용 선수를 다시 만나고 싶은 욕심에 이번 시즌의 경기 일정을 확인하고 데려가 줄 수 있는지 엄마에게 거듭 묻기도 한다.
아이가 누군가를 직접 만나고 나서 이렇게까지 많은 것이 달라질 줄은 정말 몰랐다. 단순히 프리미어 리그 축구경기를 한 번 보고 왔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간절히 바라던 셀러브리티를 만났다는 것에 엄청나게 고무됐다.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인 나로서도 감동적이었다.
주언이가 정말로 축구선수가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금 주언이는 휠체어를 떼어내고 당장 두 발로 뛰는 축구선수라도 될 것처럼 애쓰고 있다. 하지만, 기적이 찾아오지 않는 한 주언이가 휠체어에서 독립하는 것은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주언이에게 휠체어 축구를 대안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어린 주언이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하더라도 아이가 품고 있는 희망을 눈앞에서 깨고 싶은 엄마가 그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더욱 기성용 선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내 아이가, 그가 가진 장애와 무관하게 커다란 꿈을 꿀 수 있게 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