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濟南)으로 가는 기차에서 승무원 장나이쥔(張乃駿)을 만났다. 지난으로 여행을 간다는 말에 그는 몹시 흥분된 목소리로 자기 고향이 바로 지난 부용가(芙蓉街)라며 여행 코스를 추천해준다.
오래된 족보를 들먹이며 자신의 집안이 송(宋)나라 때부터 지난에서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아마도 가장 오래된 명문가였을 것이라고 자랑한다. 만약에 문화대혁명(1966~1976, 10년 동란)이 없었더라면 말이다.
문혁 때 집안이 봉건 지주계급으로 몰려 풍비박산 났고, 자신도 학교가 문을 닫으며 배움의 기회를 잃고, 홍위병에 가담했다가 어떻게 열차 관련 일을 해오고 있다고 한다. 거대한 시대의 흐름이 그 삶의 물길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돌려놓았을 텐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자신의 지난날을 들려주었다.
천불산(千佛山)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부용가를 지나는데 그가 생각난다. 과거시험장으로 쓰였다는 공묘(孔廟) 옆 어딘가가 그의 집일 것이다.
포돌천에서 솟아오른 샘물이 대명호로 흘러드는 그 길목에 자리한 부용가는 지난의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전통문화의 거리였지만, 지금은 새로 지은 건물에 상가들이 가득 입주해있다. 호객을 하는 소리가 넘치는 거리 바로 곁에 관제묘(關帝廟)도 고즈넉이 자리해 있다. 전통과 현대가 참 얄궂게도 만나는 느낌이다. 허름한 옷을 입은 몰락한 귀족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슬그머니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것처럼 부용가 패방이 물끄러미 서 있다.
버스가 천성공원 곁을 지나는데 길가에 세워진 큰 기념비가 눈에 띤다. 1928년 5월 3일에 발생한 지난학살사건(五三慘案) 기념비다. 제2차 북벌이 한창이던 시절, 일본은 북벌이 성공해 중국이 통일되면 침략이 더 어려울 것으로 판단해 국민혁명군에 공격을 가했다.
지난에서 외교 교섭관이던 차이공스(蔡公時)의 귀, 코를 자르고 눈을 파 피살한 것을 시작으로 1만 7천여 명의 학살을 자행한다. 지난시에서는 매년 5월 3일이면 '국치를 잊지 말자(勿忘國恥)'는 의미와 희생자 추모의 뜻을 담아 사이렌을 울리고 있다고 한다.
버스 창밖으로 지나가는 도로명 이정표도 특이해 물어보니, 동서 도로는 경도로, 남북은 위도를 이용해 도로명을 정했다고 한다. 민국(民國) 시절 산둥성 주석이던 한푸쥐(韓復榘)는 군벌 출신으로 배움이 짧았는데, 자신의 책상에 놓인 지구의를 보고 즉흥적으로 지시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나름 쉽게 위치를 알 수 있어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인 것 같다.
태산의 서쪽 자락에서 이어진 천불산은 해발 285m의 비록 낮은 산이지만, 지난 사람들의 소중한 휴식처이자 도시를 내려다보는 발코니 같은 곳이다. 원래 역산(歷山)으로 불리던 산인데, 순임금이 이 산자락에서 밭을 일구며 생활했다는 전설 때문에 순경산(舜耕山)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재앙을 불리치는 천불(遷祓) 의식을 이곳에서 진행하면서 발음이 같은 천불(千佛)산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산 정상 부근의 바위에 많은 불상들이 조각되면서 명실상부한 천불산이 된 셈이다.
가을 국화 축제가 막 끝난 천불산 패방이 있는 입구에 들어서니, 양 옆으로 18나한(羅漢)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당송시대 크게 유행했다고 하는 나한신앙이 반영된 것인지 자유분방하고 개성 있는 나한들의 모습이 오히려 편안하고 재미있게 느껴진다. 모든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얻은 성자라고 하지만 그들인들 어찌 끊임없이 생겨나는 상념이 없겠으며, 신체적 생리현상을 어찌 다 막을 수 있겠는가. 수행이란 고요한 듯 보이지만,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욕망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리라.
나한들 좌측으로 사찰들이 있는데 소원을 비는 곳인지 향 내음이 가득하다. 삼청관(三淸觀)이라는 사찰 입구에는 순임금의 왕비, 태산할미, 삼신할미가 모든 소원을 다 들어준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계단을 따라 오르는데 수원과 지난 두 도시의 자매결연 10주년을 기리는 화강암으로 만든 우정의 문이 나온다. 수원 화성을 연상시키는 구조물을 낯선 곳에서 만나니 무척 반갑다. 고목이 우거진 산 중턱에 노란 가사를 입은 와불(臥佛)이 길게 누워 있다. 떠나가는 가을을 담담히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그 곁으로 만불동(萬佛洞)으로 가는 소로가 나 있는데 그 양 옆의 두 불상이 앙증맞게 서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산과 사찰이지만, 도심에서 가깝다보니 온갖 환란을 온몸으로 겪어내느라 훼손이 심해선지, 건축물이나 유물들이 최근에 단장된 것이 많다.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민 키 큰 불상이 산둥성이 비록 유교의 발상지이긴 하지만 일찍이 불교 또한 융성했음을 말해주려는 듯하다. 산둥성는 중국측 해상 실크로드의 종착지로 남조의 불교문화가 전래되어 새롭게 뿌리내렸으며, 이런 산둥성의 불교문화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불교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정 바로 아래에 자리한 흥국선사(興國禪寺)는 수대에 건립된 사찰로 서쪽은 부처를 모신 사찰이고, 동쪽에는 순임금, 공자, 노반(魯班, 장인의 수호신)을 모신 사당이 있어 유불선 3교의 혼합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암벽을 둘러싸고 수당 때의 불상들이 많이 남아 있으나, 문화대혁명 때 대부분 머리 부분이 훼손된 것을 애써 복원해 놓은 모습이다.
흥국선사를 뒤로 하고 걸어 나오니, 지난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안개 때문에 멀리 황허의 물줄기는 보이지 않지만, 청말 유악(劉鶚)이 쓴 여행 소설 <노잔유기(老殘遊記)>의 표현대로 늦가을의 천불산은 저마다의 색깔을 간직한 채 병풍처럼 아름답다. 유악도 아마 이쯤에서 멀리 황허의 물길을 바라보며 제국주의의 침탈과 관료의 부패로 병들어 신음하는 황허의 아픔을 떠올렸을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 노잔(老殘)이 바로 작가 자신의 분신인데, "바둑은 이미 형국이 기울었고, 나도 이제 늙었구나(棋局已殘, 吾人將老)"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청말 유악은 몰락하는 조국을 힘없이 묵도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개탄했지만, 100년이 지난 목하 중국의 모습은 사방이 고층빌딩 숲을 이루며, G2의 위상을 넘어 더 높은 비상을 준비하고 있으니 그 변화가 새삼 놀랍다. "바둑은 이제 새로운 대국이 시작되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유악에게 말해주고 싶다.
산길을 내려오며 문득 지난이 하늘이 준 샘물 덕분에 오랜 문명을 꽃 피워왔지만, 또 한편 많은 상처를 간직한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열차에서 만난 1961년생 장나이쥔도 떠오른다. 어쩌면 불상을 깨뜨린 홍위병 중에 그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문혁이 없었다면 그의 삶은 또 어떻게 펼쳐졌을까 생각이 꼬리를 문다. 삶은, 역사는 그것이 아픔이든, 상처든 모두 보듬고 도도히 흐르며 새로운 물줄기를 만든다. 한때는 심한 병을 앓았지만, 지금은 조금씩 기운을 차려 지난 곁을 유유히 흐르고 있을 황허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