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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 결혼식 사진을 찍는 커플
▲ [당신에게, 실크로드 04] 말을 알아 듣는 꽃 - 시안 02 시안 결혼식 사진을 찍는 커플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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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알아듣는 꽃, 양귀비

백거이는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를 기울게 한 미모라고 했다. 총명하고 아름다웠기에 현종은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꽃, 해어화(解語花)라 불렀다. 양귀비 이야기다.

한때 죽은 양귀비가 살아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안사의 난을 피해 도망치던 중, 환관 고력사에 의해 자결한 것으로 알려진 양귀비. 하지만 사실은 일본으로 피신해 야마구치현 나가토시쪽에 살며 후손까지 남겼다고 한다. 1970년대 후반 일본 아이돌의 최정상에 있었던 야마구치 모모에는 자신이 양귀비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볼셰비키 혁명의 아나스타샤 공주를 넘어서는 스토리다. 1200년 전 인물이니 DNA 검사를 할 수도 없고, 믿거나 말거나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만큼 양귀비라는 이름 석 자는 아직도 매혹적인 향기를 내뿜고 있다.

양귀비의 후손이라 주장하던 1970년대 일본의 전설적인 아이돌
▲ 야마구치 모모에 양귀비의 후손이라 주장하던 1970년대 일본의 전설적인 아이돌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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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청지행 버스에서 내리자 양귀비와 현종의 거대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마치 이 둘이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과연 그랬을까. 심사가 꼬인 채로 화청지를 둘러봤다.

화청지는 현종이 온천 지역인 여산 기슭에 지은 궁이다. 당시 불타 없어진 건물을 다시 지었지만 돌로 된 목욕터는 남아 있다. 작고 동그란 꽃 모양 연못이 양귀비와 현종이 함께 목욕을 했다는 해당탕이다. 아무래도 둘이 들어가기에는 조금 작은 듯하다. 달리 생각해 보니 그래서 작게 만든 건가 싶다. 어머.

우리도 한때 양귀비 뺨치게 이뻤지~~
▲ 목욕을 마친 양귀비 상 우리도 한때 양귀비 뺨치게 이뻤지~~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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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와 현종의 해당탕, 다른 탕에 비해 작은 것이 포인트
▲ 해당탕 양귀비와 현종의 해당탕, 다른 탕에 비해 작은 것이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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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청지의 최고 명소는 목욕을 마친 양귀비가 나오는 동상이다. 너도 나도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이 동상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양귀비는 현종과 큰 싸움을 하고 오빠 양국충의 집으로 쫓겨났다. 그러자 양귀비로 인해 권세를 누리던 오빠 양국충은 이 둘을 다시 만나게 하기 위해 계략을 짰다. 우연을 가장해 현종과 양귀비를 화청지에서 다시 만나게 한 것이다.

현종이 오는 시간에 일부러 젖은 머리카락을 하고 목욕탕에서 나서는 양귀비... 그 모습을 재현한 게 이 반라의 D컵 양귀비상이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나 인도 아잔타 석굴에서도 늘 생각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진리는 D컵'인 듯하다. 이거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성 아닐까.

당시 양귀비는 '뚱뚱한 요부(비비, 肥婢)'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 몸매가 당시 유행조차 바꿔놨다고 한다. 당시 무덤에서 출토되는 여인상을 보면 7세기의 여인상은 몸통이 늘씬한데 8세기 중반에 출토된 여인상은 통통하다. 거기다가 중앙아시아의 복식이 유행하면서 여인상도 호풍의 옷을 걸쳤다고 한다. 당시 실크로드를 따라 진주, 조개 목걸이, 무소 뿔과 같은 사치품뿐 아니라 타조, 코끼리, 사자와 같은 이국의 동물, 참깨, 오이, 양파, 포도와 같은 식료품도 들어왔다. 양귀비는 현종의 총애를 입고 이 유행을 선도하고 있었다. 심지어 안고 다니는 강아지도 사마르칸트산 강아지였다고 한다.

김정은처럼 생겼는데... 어쨌든 8세기 전후 당나라 여인상은 풍만한 H형 몸집과 통통한 볼을 지니고 있다
▲ 8세기 당나라 여인상 김정은처럼 생겼는데... 어쨌든 8세기 전후 당나라 여인상은 풍만한 H형 몸집과 통통한 볼을 지니고 있다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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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가 총애한 사마르칸트산(産)은 또 하나 있었다. 바로 절도사 안록산이다. 안록산은 돌궐족 어머니와 사마르칸트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고 한다. 당시에는 중앙아시아 출신들이 많아서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시인 이백도 중앙아시아 출신이다. 양귀비는 젊은 장수 안록산을 수양아들로 삼고 곁에 머무르게 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안록산과 양귀비의 열애설이 퍼진다.

755년, 세력이 커진 안록산은 양귀비의 오빠 양국충을 벌한다는 명목으로 군사 15만을 이끌고 장안으로 향했다. 안록산의 난이다. 안사의 난을 피해 도망가던 현종과 양귀비에게 병사들은 소동을 일으켰다. 나라를 망친 양귀비를 죽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며. 결국 현종은 양귀비를 내어주고 자신의 목숨을 선택했다.

그리고 후에 사람들은 양귀비 이야기를 하면서 "남자는 무릇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 "미인은 화를 부른다"며 교훈을 되새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양귀비야말로 시아버지 잘못 만나 팔자 꼬인 여인네다.

애초에 자신의 아들과 결혼해서 6년째 살고 있었던 양옥환을 꼬여 도교의 도사로 신분 세탁을 한 후, 귀비로 만든 것도 현종이었다. 치세 전반, '개원의 치'라는 칭송까지 들으며 태평성세를 구가했으나, 정세에 무감해져 민심을 흉흉하게 만든 것도 현종이었다. 그런 그가, 한때 시아버지였고 지금은 남편이던 그가, 뒤에 군대가 쫓아오자 목숨보다 귀히 여기던 여인을 죽이라고 내준 것이다. 비겁하고 비굴한 인생이다. 나라가 망한 책임이 어디 그녀에게만 있을까.

5분의 4가 행복한 나라, 중국

화청지 내부의 작은 기념품 가게에 장개석과 모택동이 사이좋게 웃고 있는 인형이 있었다. 허와 판을 불러 보여주니 픽 웃는다.

"둘은 살아생전에 한 번도 이렇게 사이가 좋았던 적이 없어."

저렇게 해맑게 웃던 사이가 아닐텐데...
▲ 장개석과 모택동인형 저렇게 해맑게 웃던 사이가 아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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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청지에는 양귀비와 현종의 이야기 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바로 서안사변이다. 1936년 12월 12일, 국민당 동북군 사령관 장학량은 하극상을 일으킨다. 그는 서안의 화청지에 머물던 장개석 총통을 납치했다. 그리고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함께 항일투쟁을 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선통일 후항일'을 외치던 장개석은 별수 없이 공산당의 주은래와 회담을 가지게 됐다. 그 결과 제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그때만 해도 공산당은 압도적인 열세였다. 그러나 항일투쟁을 하며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게 되고, 결국 내전에서 승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패배한 국민당은 대만으로 도망쳐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 하극상을 일으킨 장학량은 10년의 금고형을 받고 이후 자택에 유폐되어 90살이 되어 풀려났다.

화청지 뒤편의 오간청에 가면 당시 장개석이 생활하던 방과 그때 당시 수행원이 묵었던 방, 벽의 총알 자국 등을 볼 수 있다. 방안을 들여다 보니 그가 잠을 자던 침상, 회의하던 테이블들이 놓여 있다. 판은 이곳에서 보디가드 17명이 사살되었다고 전해 주었다. "만약 장학량이 하극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내 질문에 그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대답했다.

"천안문에 모택동 대신 장개석 사진이 걸려 있겠지."

총탄자국에 손을 넣고 사진찍는 관광객
▲ 오간청의 총탄자국 총탄자국에 손을 넣고 사진찍는 관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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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간청을 떠나며 판에게 대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다. "어차피 사람만 행복하다면 어디서 살든 상관없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의 외삼촌도 국민당과 함께 중국을 떠나 지금 대만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럼 중국 사람들은 어때? 행복해?" 그러자 씩 웃더니 스마트폰을 들어 보인다. 그전에는 모두가 다 행복하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젠 이 인터넷 덕분에 정부 발표가 전부가 아니란 걸 알게 됐단다. 중국은 지금 산업화 시대와 인터넷 시대가 동시에 진행 중이다. 중국 정부는 페이스북이나 유튜브를 차단하고 모든 인터넷 사이트를 검열하고 있다. 그럼에도 과거와 달리 더 이상 정보는 권력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허가 끼어들더니, "그래도 중국은 5분의 1 빼고는 행복하다"고 한다. 허가 말하는 5분의 1은 지역적 구분이란다. 서쪽과 남쪽 일부인데, 그쪽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공업화가 안 되고 인구수가 많아서란다. 가난하고 애가 많다는 거다. 뜬금없이 '행복하냐'는 추상적인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개발이 안 되고 가난하면 불행하다'는 중국청년들의 생각이 흥미롭다. 이들의 이런 사고방식은 낙후된 서쪽을 개발로서 풍요롭게 한다는 중국 정부의 입장과도 일치한다.

중국 어디에나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심지어 베이징에서 2시간 떨어진 시골에서까지 부자들의 별장이 마을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조슬린과 나는 악취미인 별장을 보고 깔깔 웃었지만, 그곳 농부는 부자들의 별장이 점점 마을 안까지 들어와 농지를 잡아먹고 있다고 한숨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급속한 산업화의 결과는 최근 환경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2013년 중국 하얼빈에선 세계보건기구(WHO)의 건강기준을 40배나 초과한 미세먼지가 발생했다. 그날 신호등이 보이지 않아 모든 고속도로와 공항이 폐쇄되고 2000곳이 넘는 학교가 3일간 휴교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도 매년 편서풍을 타고 도착한 중국발 미세먼지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런 부분에 대해 중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다들 이전에 이루지 못했던 물질적 풍요에 경도되어 있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준 건 조선족 친구 엔지였다. 그녀는 베이징에서 외신기자로 일하다 지금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유학중이다.

"중국이 기아와의 싸움을 끝낸 지는 몇 년 되지도 않았어.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찢어지게 가난했거든. 우리 부모님만 해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정말 행복해졌다고 해. 지금 중국은 인권문제, 소수민족문제, 환경문제 등 다양한 문제가 있긴 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배불리 먹게 되었으니 생각난 문제라는 거야. 그전에도 이런 문제는 존재했지만 감히 입 밖에 올리지도 못했어. 이제야 중국은 이런 문제를 이야기할 때가 된 거야."

실크로드의 서쪽시장 - 대당서시

오릉의 소년들 금시 동쪽을 지날 때
은안장 백마 타고 봄바람을 가르네
떨어진 꽃 짓밟고서 어디로 놀러가나
웃으면서 들어가니 호희의 술집이네
- 이백 '소년행(少年行)'

호희(胡姬)는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외국인 무희였다. 당시 이백의 시에는 벽안의 금발 미녀에 대한 언급이 자주 보인다. 전유일준주항(前有一樽酒行)에도 '호희의 얼굴은 꽃 같은데 목로앞에 앉아 봄바람에 미소 짓는구나'(胡姬貌如花, 當壚笑春風) 구절도 있다. 어지간히 빠져 살았나 보다. 여기 나오는 금시가 당나라의 서쪽시장, 서시(西市)의 다른 이름이다.

장안에는 동시(東市와) 서시(西市)가 있었는데, 동시는 귀족과 관료가 이용했고 서시는 일반 백성이나 외국인이 사용했다고 한다. 동시, 서시만으로 부족했는지, 밤낮 불빛이 꺼지지 않는 야시장까지 말 그대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8세기 중엽, 당시 장안의 인구는 100만이었다. 성 밖에 100만이 더 살았다고 한다. 장안성은 지금 남아있는 명대성곽의 10배 크기. 세련되고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였다. 그 에너지의 근원은 바로 교역이었다.

유난히 미녀가 많았던 시안
▲ 시안에서 만난 미녀 유난히 미녀가 많았던 시안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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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서시에는 실크로드를 통해 소그디아나, 페르시아, 아라비아에서 온 상인들로 붐볐고, 견직물, 저울, 과자, 의약품, 장신구, 보석 등을 파는 상점이 밀집해 있었다. 술집에서는 유리잔이나 야광배에 포도주를 내놓고, 사람들은 바닥이 아닌 의자와 탁자에 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풍(胡風)의 음악에 맞춰 호희가 춤을 추었다. 당시 호복(胡服), 호모(胡帽), 호식(胡食) 이렇게 오랑캐를 뜻하는 호(胡)자가 붙은 것은 무엇이든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서시는 이국의 물건과 사람들로 가득한 교역과 유행의 중심지였다.

대당서시에서 만난 당나라 미녀
▲ 미녀 대당서시에서 만난 당나라 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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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다큐멘터리에서 이 서시를 봤다. 다큐멘터리속의 서시는 그저 오래된 재래시장일 뿐이었다. 상인들은 의욕이 없어 보였고, 감자며 양파와 같은 채소와 플라스틱으로 된 볼품없는 생활용품들을 팔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시장은 여전히 서시이며 그 옛길은 여전히 각국의 상인들이 오가고, 소년들이 호희를 만나러 가던 그 길일 것이다. 과거의 서시는 동대문 도깨비 시장 같은 곳이었을까. 외국에서 온 예쁜 아가씨들이 즐비했다는 서시의 술집은 어땠을까. 서시에는 교회도 있고 모스크도 있었다는데.

기대를 품고 서시가 있었다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택시에서 내리자 생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그 일대가 모두 새로 지은 복합단지였다. 입구에는 거대한 배 모형이 있고, 광장에서는 행사 중인지 각 지방 특산품 판매 부스가 늘어서 있었다. 광장 너머엔 과장된 디자인의 호텔이 보였다. 호텔 양 옆으로는 쇼핑몰이며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낙타를 탄 비천상 형상의 구조물도 보였다.

그 자리에서 급하게 검색해 봤다. 시안시는 2006년부터 45억 위안을 투자해 총 30만평의 면적에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남루하던 시장 상인들은 개발명령에 다들 이주했다고 한다. 옛 시장의 윤곽이나 흔적은 찾아 볼 수도 없었다. 서시는 단지 이름만 남아 있었다. 그 이름조차 계승이 아니라 그저 차용일 뿐이었다.

복합단지 실물모형
▲ 대당서시 복합단지 실물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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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을 하다 보니 이곳 실크로드 문화거리에 한국관이 있다기에 가봤다. 라면, 화장품, 칫솔, 치약 등 영문 모를 자질구레한 상품만 놓여 있을 뿐 본격적인 판매준비는 되지 않았다. 일본, 태국 등 다른 나라거리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이 실크로드 문화거리를 찾는 손님도 거의 없다. 백화점을 기웃거려 봐도 한산하기만 할 뿐. 이정도 규모의 복합문화공간이 이렇게 한산해도 될까 싶다. 웅장하지만 속은 비어 있는 느낌이다.

대당서시 한국관, 신라 김교각 스님상이 전시되어 있다
▲ 한국관 대당서시 한국관, 신라 김교각 스님상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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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대학 때 자취하던 동네를 찾아간 기분이다. 좁은 골목이 가득하던 그 동네는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사실 동네가 험해서 늘 좋은 기억만 있던 건 아니었다. 힘든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다 눈 쌓인 언덕길에서 미끄러지던 기억이나, 새벽 일찍 '변태'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던 기억도 있다. 여담인데, 그 동네 변태는 꼭 이른 아침에 활동을 했다.

하지만 그 곳엔 이야기가 있었다. 어두운 가로등과 가파른 계단이 있던 옛 골목, 다닥다닥 붙어 있어 볕도 안 들고 사생활이 없던 집들, 일요일 아침이면 커피믹스와 라면을 사오던 구멍가게, 골목 골목 어두운 구석마다 숨어 있던 연인들, 어지럽게 엉킨 전선들, 도둑고양이들 그리고 스무살의 내가 얇고 까만 코트만 입고 겨울을 나던 곳. 그 이야기들은 모두 사라지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하얀 아파트 단지가 생겼다. 기억을 환기할 수 없는 그 곳에서 나는 조금 다리가 휘청거렸다.

이곳 대당서시에서도 같은 기분이었다. 누적된 시간은 증발했다. 고유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는 사라지고, 어느 도시에 가도 있는 획일적이고 기능만 남아 있는 장소가 생겨났다. 수천 년 이 땅에서 살아 숨쉬던 사람들의 역사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쫓겨났다.

옛 시장을 불도저로 밀어 만든 화려한 새 시장. 과거의 흔적은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늘 미래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풍요의 약속을 내세운다. 과거의 기억은 그저 약속의 미래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상상력이 1mm도 들어갈 틈이 없는 이 곳, 천진하게 환상에 젖어 여기까지 왔던 스스로가 민망할 정도다. 어째서 기억과 미래는 함께 할 수 없는 걸까? 나는 까칠해져서 숙소로 돌아갔다.

덧붙이는 글 | 2014년 4월부터 10월까지의 여행 중, 실크로드- 경주, 중국,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로마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실크로드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 진행형 이야기입니다. 더불어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노처녀의 한풀이이기도 합니다. 실크로드에서 건져낸 이야기를 점과 점으로 이어,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또 하나의 실크로드가 그려졌으면 합니다.



태그:#실크로드, #시안, #대당서시, #화청지, #오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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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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