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선물이라고 했던가. 어수선하기만 하고 실속없이 밍밍한 연말을 의미있게 정리하고자, 크리스마스 낀 징검다리 연휴를 이용해 일본 큐슈 여행을 다녀왔다.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간단한 수속을 거쳐 오후 8시에 출항하는 부관훼리 소속 성희호에 승선하니 여행 기분에 들뜬 승객이 분주하게 오가며 선내를 탐색한다. 16875톤급의 여객선은 세월호의 약 2.5배 크기로 식당, 카페, 오락실, 목욕탕까지 갖춘 매머드급 선박이다. 승객들은 출항하기도 전에 삼삼오오 휴게실에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저녁식사를 하는 등 취흥에 젖었다. 방학을 맞아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단위 여행객이 많아 더 선내는 소란스럽다.
객실에 여장을 풀고 가볍게 샤워를 하고 나오니 날아갈 듯 상쾌한 기분이다. 배는 부산의 야경을 뒤로 한 채 호수처럼 잔잔한 암청색의 밤바다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가고 있다. 작은 미동도 느껴지지 않는 휴게실 테이블에 아내와 마주앉아 미리 준비한 도시락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자판기에서 뽑은 아사히 맥주로 목을 축였다.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끝없이 오가고, 간간히 스치는 밤바다의 불빛이 별빛처럼 아련하다.
승객들의 수선에 잠에서 깨니 어느덧 배는 시모노세키(下關)항의 조용하고 맑은 아침에 들어서 있다. 부지런한 갈매기들의 환대를 받으며 우리 일행은 미리 준비된 버스에 올라 여행 첫날의 하루를 시작했다.
먼저 들른 곳은 우사진구(宇佐神宮)이다. 일본 전역에 44000사(社)가 있다는 하치만구([八幡宮)의 총본사란다. 725년 창건되었으며 남쪽으로 면해있는 본전(本殿)은 1861년 재건된 것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울창한 숲 속에 붉은색의 건물이 웅장하나 일본 전역에 신사가 많은 터라 큰 감응은 없었다.
다음으로 찾은 유후인은 연휴에 맞춘 한국, 중국 그리고 일본 자국민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거리는 카페와 선물가게, 갤러리 등이 어우러져 동화의 나라처럼 아기자기한 골목이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연상케 한다.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을 따라 올라가면 긴린코 호수가 나온다.
호수바닥에서 냉수와 온수가 함께 솟아 안개를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호수이다. 호수를 돌아 난 산책길을 따라 걷노라니 아름답게 조형된 건물과 수변의 우람한 스기나무가 이국의 정취를 더한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온천마을 뱃부다. 유황꽃을 재배하는 유노하나가 신석기시대의 움집처럼 즐비하게 늘어서 짙은 유황냄새를 품어내고 있다. 그 옆으로 가마토 지옥온천이 있다. 색깔이 다른 여섯 개의 연못으로 구성된 가마토에서는 끊임없이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가마토를 돌며 코믹한 목소리로 해설을 해주는 주인장이 담배연기를 가마에 품으면 신기하게 수증기 양이 많아지며 춤을 춘다.
신경통과 만성소화기질환 등에 좋다하여 80℃가 넘는 온천수를 받아 마셔보니 유황냄새를 품은 약간 짭조롬한 맛이 썩 좋지는 않다. 온천에서 익힌 하나에 70¥하는 계란과 사이다로 입맛을 바꾸고 효탄온천 체험에 들어갔다.
탕 안은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닌데도 천장이 높고 방한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아 우리나라 온천들과는 달리 썰렁하다. 피부가 좋아지고 피로를 풀어준다는 말에 폭포탕, 보행탕, 노천탕, 한증막 등을 오가며 땀을 빼고 나니 여독이 풀린다. 호텔에 도착해 따뜻한 사케를 반주삼아 늦은 저녁식사를 마치니 저절로 눈이 감긴다.
여행의 둘째 날은 큐슈의 작은 교토 히타로 이동했다. 큐슈 오이타현(大分) 히타(日田)시 안에 있는 마메다마치(豆田町)는 17세기 에도막부 시대의 정취와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하천을 끼고 천변에 위치한 히타 소주공방을 방문했다.
공방 안쪽에서는 직공들이 술을 빚느라 여념이 없고, 입구에는 여러 종류의 사케와 술잔 등이 진열되어 여행객들의 발길을 잡는다. 거리에 늘어선 상점들은 나막신, 전통술 등 일본 전통의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다.
오후에는 큐슈 제1의 도시 후쿠오카로 이동했다. 일본 최초의 개폐식 지붕 시설을 갖춘 야후돔 구장을 한바퀴 돌았다.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홈구장으로 야구경기가 없는 날에는 인기 아티스트의 콘서트나 각종 이벤트에 이용되기도 한다는데, 콜로세움을 모방한 외형이 인상적이다. 야후돔을 돌아 나가면 시사이드 모모치 해변이다.
총 길이 2.5㎞에 달하는 인공 해변의 중앙에는 다양한 시설이 결집된 '마리존'이 있어 결혼피로연, 웨딩촬영의 명소일 뿐 아니라 손꼽히는 인기 데이트 코스란다. 해변을 접한 길 건너에는 시사이드 모모치의 랜드마크인 후쿠오카타워가 우뚝 솟아있다. 높이가 무려 234m로 일본에서 가장 높은 해변타워이며,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높이 123m의 최상층 전망대에 올라가면 후쿠오카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단다.
다음 코스는 다자이후 텐만궁(太宰府 天満宮)이다. 학문의 신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모시는 신사로 919년에 창건되어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합격이나 학업성취를 기원하는 참배객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신사로 들어서는 도로 양 옆으로는 우리나라의 큰 절 입구처럼 다양한 상가들이 형성되어 있고, 여러 나라의 관광객들로 번잡하다. 경내로 들어서니 잘 가꿔진 정원과 건물들이 조화를 이뤄 저절로 숙연해진다.
후원으로는 식당들이 몇몇 한산하게 손님을 기다리고, 다른 곳보다 먼저 꽃을 피운다는 매화 '도비우메'가 군데군데 고적하게 봄을 기다리고 있다. 신사 본전에서 소망을 빌고 돌아서니 덴바이산(天拝山) 너머로 석양이 내린다.
3일차 마지막 날에는 후쿠오카 시내에 있는 캐널시티에 잠깐 들러보고 기타큐슈로 이동해 고쿠라성(小倉城)에 들렀다. 고쿠라성은 제곽식 평성으로 에도시대에는 고쿠라 번의 번청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석벽의 일부와 해자가 남아 있으며, 천수, 망루, 정원과 무가저택이 재건되어 있다.
인근에 위치한 모지항은 큐슈의 관문으로 번영해 온 곳으로, 19세기 후반 서양식 건축 붐이 일어 이국적 분위기의 역과 세관 및 상사 건물이 아직도 근대화의 상징물로 남아있다. 우리가 시간을 잘 맞춰 갔는지 보행자 전용 개폐식다리 '블루윙모지'가 개폐를 하며 그 위용을 자랑한다.
항구의 전망 좋은 5층 식당에서 늦은 오찬을 즐기고 시모노세키로 이동해 아카마 진구(赤間神宮)에 들렀다. 12세기 대무사단, 겐지와의 전투에 패한 헤이케와 어린 나이에 희생된 안토쿠 천왕을 위로하기 위한 신궁으로 붉고 멋진 문은 용궁성의 문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조선과 수교 후에는 조선통신사의 혼슈지역 첫 방문지이자 숙박지이기도 했단다.
짬이 나 가라토시장(唐戶市場)에 잠깐 들렀는데 파장시간이 다 되어 상인들이 마무리 하느라 분주하다. 일본 복어 생산량의 80% 가량을 유통시키는 시장답게 온통 복어 천국이다. 큐슈와 혼슈를 잇는 관문대교를 건너 시모노세키항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우리의 공식 일정은 끝났다.
입국 수속을 밟고 부관훼리에 올라 현해탄을 건너면 바로 우리의 조국이다. 3일간의 짧은 여행이 꿈결처럼 흘렀다. 다사다난했던 갑오년도 이제 3일 남았다. 새롭게 맞을 을미년 새해에는 나와 나의 가정뿐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안녕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평화로운 한해였으면 하는 바람을 새기면 발길을 옮긴다.